‘네 번째 차원’
얼마나 매혹적인 주제인가! 누구나 한 번쯤 이 주제에 심취해 본 적 있으리라. ‘이다음 차원’을 발견해내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공상. 생각보다 낯익은, 이 허기는 모두가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 같다. 과학자를 꿈꾼 적 없는 소년조차 같은 망상에 푹 빠져든다고 하니, 탐구와 공상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날것 같은 본질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서두에서 제안하건대, 우리 황홀했던 그 시절의 상상력을 한번 되살려 보자.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니까. 여러분은 차원을 더하는 아주 간단한 공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1차원인 ‘선’이 2차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어느 한 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선을 뻗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곧 ‘x축’과 ‘y축’이 되어 ‘면’을 구성한다. 3차원도 같은 원리다. 면 한가운데로 다시 한번 직선을 꿰뚫게 하자. 사람들이 통상 ‘z축’이라고 일컫는 것, 바로 제삼의 새로운 축을 말이다. 그러면 그로부터 ‘공간’이 탄생한다. 그때부터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선들의 경계 안쪽까지도 우리가 손쉽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우주의 법칙이란 이토록 간단하다. 이런 단순한 함정에 꾀인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음 네 번째 차원을 찾아내고자 하는 유혹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 ‘우리를 가둔 공간을 가로지르는 이다음 세계의 축.’ 지금도 일련의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쫓는 그 제4의 축을 나는 ‘오메가 축’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갈구하는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과 수많은 도시들, 우리의 살과 피와 모든 장기들이 이 축에 나란히 꿰어 있다. 감히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하는 사람은 축의 요동이 뒤따름에 짜릿한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만한 열망에 휩싸이면 휩싸일수록, 낙담은 커지고 고통은 더 강해진다. 그 축은 일종의 울타리인 셈이다. 광활한 질서에 불응하는 일탈자를 막고, 우리가 태초의 좁은 시야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인식의 덫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흉폭한 마수와도 같은 우주 너머의 볼 수 없는 심연이 이 땅에 스며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만약 이 축이 무너지고 기준점의 매듭이 풀린다면, 우리는 뼛속에서부터 마구 뒤엉키다가 어둠보다 난해한 공허 저편으로 삼켜지고 말 것이다. 내가 그 축을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오메가’ 축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이러해서다.
그러나 부디 학구적인 욕망을 접어두라고 호소할 생각은 없다. 학자들이라면 상식의 한계를 벗어난 이야기를 스스로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그들은 흔들리는 초점 속에서 길을 잃고, 곧잘 깊은 회의에 빠져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그들과는 좀 다른 부류의 인간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망상광이었다.
환상적인 축보다 더 신비롭고 불투명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남자. 그는 자기 환상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 축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비범하고 불순한 사내였다. 고차원 연구에 매달린 작자들이 보이지 않는 오메가 축을 숭배하듯 추구한 것과는 달랐다. 그자는 언제나 그 축이 자기 손 안에 쥐어져 있다는 듯 행동했다. 이 차이가 양자의 운명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무튼 날 놀라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경배와 정복욕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미지의 어떤 것을 대할 때 그것의 정체가 점차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경외심이란 빠르게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복하려는 욕구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라도 시간이 갈수록 뜨겁고 맹렬히 타오를 뿐이다.
그렇다. 그것은 정복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우리 삶을 속속들이 관통하고 있는 존재를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차 있었고, 허황된 정열에 매혹되었으며, 꿈과 광기라는 낱말의 동질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마침내 가련해질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아서 핀테일은 앞서 얘기한 ‘오메가 축’에 주목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가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남게 된 것은 그의 몽상적인 기질과 유서 깊은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력, 그리고 물론 검게 이글거리는 눈동자 덕분이었다. 그 눈동자는 오직 열망에 사로잡히는 방법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동자였는데, 여지없이 고양이의 눈을 빼닮았었다. 고양이 눈을 빼닮았다는 표현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다. 평소 그의 시선이 어딘가 모호한, 경계 저편의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곤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는 그런 식으로 눈을 치켜뜰 때마다 영문 모를 도전의 뜻을 내비치곤 했었다.
아서는 체구가 크고 피부가 누리끼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몸 전체가 윤기로 번들댔던 사내다. 구레나룻이 짙었고 입이 컸으며, 자주 멋진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정장을 맞춰 입고 다닌 것은 물론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지역 철도 회사와 연계된 작은 공장을 운영해 왔다. 계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어떤 길을 선택했더라도 필연적으로 세간에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나는 사업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공장이 실제 가치보다 몇 배 더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따금 기억 속의 흐릿한 형상을 더듬으며 난 아서를 추억하곤 했었고,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그가 사업에 탁월한 수완을 지니게 되었으리라 짐작해 왔다. 실제로 신문 기사에서 사치스러운 물품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그의 사진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젯거리를 자처하는 인간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흑색 편지 봉투 위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와 교류가 끊어진 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세하여 승승장구하는 옛 친구에게 뒤늦게 연락을 꾀하는 일이란 염치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사실 그때, 나는 아서가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 양 여기고 있었다. 신문으로 들려오는 ‘아서 핀테일 씨’의 소식조차 추억 한 편에 대못으로 걸어둔 액자를 바라보듯이 할 뿐, 나 자신과 어떠한 접점이 존재하는 자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뒤 나는 꿈을 떨쳐내듯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겨우내 한 가지 재밌는 실험을 벌일 참이다.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조만간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믿는다. 그동안 저택에 머무르며 말벗 되어줄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 자네가 좋은 구경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 나는 그날로 필요한 일을 정리한 뒤 곧장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의 이름은 ‘클락스빌’이라고 해 두겠다. 어쨌든 지금은 잊힌 장소이고, 굳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혀서 과거의 망령을 들쑤실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클락스빌은 산자락으로 가로막힌 땅에 세워진 도시였다. 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터널이 도시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였다. 터널은 차량을 위한 작은 것과 기차가 다니는 큰 것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통행자 대부분이 기차를 이용한 탓에 작은 터널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 우리는 초라한 헤드라이트 불빛 두 개만으로 암흑을 조심스레 헤쳤다. 벽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 소리가 덜커덩덜커덩 울려 퍼졌다. 아무 말이 없던 택시 기사는 그때 딱 한 번, 돌아오는 길에는 기차를 잡아야 할 거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비친 클락스빌의 전경에 나는 그만 숨이 턱 막혀 버렸다. 유황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짙은 황색 불꽃으로 가득 찬 희뿌연 안개가 산등성이 밑자락에 내려앉은 광경이었다. 그 위로 그을린 연기 한 자락이 피어올랐다. 새까만 밤하늘과 클락스빌을 흡사 탯줄처럼 이어주고 있었다. 택시가 비탈길을 휘돌아 내려가면서, 흑요석으로 마감한 석재 건물의 단면들이 희미하게나마 산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열기에 스멀거리는 형체가 드러났고, 그 위로 잿가루가 휘날리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탁한 구릿빛으로 번쩍이는 도시는 마치 밤의 마수에 달구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같은 감상의 탓일까, 클락스빌은 전체적으로 측은한 애수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곳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의 야심한 밤이 무색했다. 높은 곳에 달린 창문마다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자신이 가둔 빛으로 밝혀진 창살들은 현대적이면서도 거꾸로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풀무 소리가 차가운 밤의 정적을 흩뜨리고 있었다. 메아리가 되어 가로변에 부딪는 소리는 거리에 맺힌 외로움을 더 깊게 정제했다.
우리는 곧 입구에 다다랐다. 해묵은 광산 도시의 위압적이면서도 고혹적인 공기가 나를 매료시켰다. 대장장이의 신을 찬미하는 신전의 강철 기둥처럼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틈바구니서 고개를 들어 보니, 도시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뿌연 숨결이 보였다. 이것은 아까 보았던 탯줄의 강을 이루었다. 강은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하늘 저편으로 찢어져 가냘픈 비명처럼 흘러갔다.
나는 말끔한 흰색 타일이 소용돌이치는 커다란 광장 끄트머리에서 내렸다. 교회의 첨탑을 연달아 셋 이어붙인 것 같이 생긴 괴상한 저택이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솟구친 세 개의 첨탑은 유리로 덮여 있었다. 모두 안에서 막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고, 그 위로 검은 쇠창살까지 내리질려 있어 몹시 금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러나 관리되지 못해 마구 뒤엉킨 장미 덤불은 탐욕스럽게 자라 있었다. 덤불이 저택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 주인의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욕망을 암시하는 듯했다. 저택의 초인종을 잡아당기자,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무겁고 장중한 소리가 났다. 놀랍도록 왕성하게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마치 황홀경에 빠진 자를 흔들어 깨우려는 시도 같았다. 공기 중의 진득한 습기와 혼합된 신호가 온몸의 피부로 기분 나쁘게 달라붙었다.
아서는 풍채 좋은 몸집에 단단한 검은색 가죽 오버코트를 두르고 나를 맞았다. 그가 새빨간 입속에서 상아처럼 흰 이를 드러냈을 때, 나는 뿌듯함과 불쾌감이 뒤섞인 괴이쩍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분명 아서가 나를 부른 까닭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짧은 만남에 불과했지만, 아서는 내가 자기 허황된 기질과 통하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내게는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제 능력을 인정해 줄 관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금기 행각을 벌이려 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완전히 동화되어 잠자코 배출될 열의를 받아 줄 사람으로 나를 골랐던 것이다.
내가 자존심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의도를 간파했을 때 화를 내며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혼탁한 발상은 세간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범한 것이었고, 거의 불경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도전적이었다. 허영심 때문에 이처럼 흥미로운 제안을 뿌리칠 생각이 없었던 나는 기꺼이 호기심에 순종했다. 그리하여 겨울 동안 아서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대부분의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아서가 처음에 이야기해 준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는 예의 ‘네 번째 축’을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내게 밝혔다. 그 축의 발견이 가지는 가능성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물론 자기 사업을 획기적으로 불릴 수 있는 주제가 될 것이다. 1차원과 2차원의 관계를 빌려 설명한 그의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가령 x축이라는 직선 위에 점 A, B, C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고 하자. 이 상태에서 점 A를 점 C로 옮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 B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조건을 변경하여, x축 위에 수직으로 직선 y축을 교차시키고, 활용 가능한 공간을 평면으로 확대시켜 보자. 그렇다면 점 A를 y축 선상에 올려놓고(아서의 표현에 따르면 ‘쏘아 올려놓고’), y축을 점 C에 맞닿도록 조정한 뒤 다시 점 A를 x축에 내려놓는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점 A는 점 B를 거치지 않고도 점 C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말하자면 차원을 넘나드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산이나 바다, 도시 경계 한복판에 박혀 있는 커다란 암석이라든가 아니면 광장 건너 멋들어진 시청 건물에 통행을 제약받지 않아도 된다. 비록 우리는 x축, y축에 z축까지 더해진 3차원에 살고 있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시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러나 네 번째 축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못해도 최소한 물건에 대해서만은 검증해 볼 가치가 있는 이론이라고 아서는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도 운송업의 혁명이 될 거라고. 그는 정작 그런 세속적인 명예에는 일말의 관심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로 열변을 토했다.
나는 ‘네 번째 차원’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놓고 아서가 운송업 따위를 운운하는 것에 조금 실망할 뻔했다. 그러나 앞서 기술했듯이, 그의 상기된 눈동자는 그가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인 욕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식과 탐식 사이의 무언가. 그런 존재가 그의 날 선 이빨 사이로 엿보였다. 확실히 이 일을 대하는 동안 아서가 보여준 모습은 여타 사업가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과학을 연구하며 두 물질이 서로 붙었다 떨어지는 원리를 화제에 올렸다. 기술적인 이야기 도중에 종종 고전 철학서가 인용되기도 했다. 한편 실체 없는 화폐와 담보의 관계 같은 경제학적인 문제를 화제로 끄집어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는 그러한 주제를 바탕으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패러독스를 해결하려 했다. 아서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너무 광범위했고 그것을 다루는 태도도 무척 관념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대화가 있었다. 내가 묻기를, 다른 차원으로 보낸 대상을 어떻게 다시 회수할 생각이냐고 했다. 앞에 사용한 비유를 재활용하자면 ‘y축으로 쏘아 보낸 점 A를 무슨 힘으로 다시 x축에 안착시킬 셈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에는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거기서 벗어난 존재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도록 되어 있어. 만물의 향수가 가진 동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걸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 힘을 무르는 방법이야.”
우리는 겨울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서의 저택은 생각했던 대로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응접실은 궁전의 홀처럼 넓었고 가구는 모조리 북쪽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언제나 육즙 가득한 고기 요리가 저녁 찬거리로 나왔으며, 찬장마다 해묵은 술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는 내 편의를 충분히 봐 주었다. 큰방을 내준 것은 물론이요 내가 구독하는 신문을 배달받기로 계약을 맺었다. 또 시간을 보내는 데 쓰라고 돈까지 쥐여 주었다. 내가 할 일이라곤 오직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아서는 항상 내키는 대로 떠들어 댔다. 실험에 관해서, 사업에 관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설명하고 동조를 구했다. 그 아이디어에 흥미를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난데없이 벌컥 화내고 자리를 떠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리고 그랬다면 반드시 다음 날 술과 함께 사과했다. 사과와 더불어 실험의 결과를 한탄하던 말이 괴상한 우화와 이론으로 변질되는 일은 항다반사였다.
그의 표현에는 알쏭달쏭한 대목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광기로 치부하기에는 다분히 작위적인 면모가 있었다. 내게 매몰찰 만치 감정을 쏟아 부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진 불순한 구석까지는 드러내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그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종내 그것들에 아무런 알맹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어진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서는 첫 번째 설명 이후 기실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세부적 계획과 진척이 몹시 궁금하였지만,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졸라 본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엔 간밤의 꿈에서 얻은 힌트나 철학 논법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내 물음 역시도, 아서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함에 지나지 않게 됐다.
그러나 한 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서의 저택에 도착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의 계획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음에 조바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으나, 그는 더 이상 ‘네 번째 차원’이라든가 ‘환상의 축’과 같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이야깃감이란 물론 날마다 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어떤 기술적 문제에 부딪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내뱉는 단어들에서는 지리멸렬한 토의에서나 느낄 수 있는 답답한 말맛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서는 그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 지엽적인 내용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주일,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기회를 엿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서가 잔을 도로 채우는 짧은 순간이었다.
아서는 내가 말하는 제안을 제안으로서 취급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기준에서 내 사고는 범인의 그것과 마찬가지였고 그런 졸렬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이것이 그의 마음에 차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자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어디선가 몇 마디 주워들은 것이 있어. 자네가 말하는 그 ‘환상의 축’이 바로 ‘시간’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더군.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시간의 흐름을 공간 개념과 연관 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듣자 하니 중력이 큰 행성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더군. 중력에 빛이 붙들리는 정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들이 보는 세상은 한층 더 굼뜨고 둔하다는 설명이었네. 그러니까 거대한 세계일수록 정체된 것처럼 보이고, 작은 존재에 의한 영향을 덜 받는다는 말이야. 그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간의 분화가 공간끼리의 격리로 전이되면서, 결국 같은 공간을 살아도 같은 공간을 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지.”
나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 가설을 길게 주절거렸다. 하지만 아서는 이를테면 천사의 마법을 빌려서 씨앗이 싹트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로,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잠시 뒤 그가 안심하라는 듯 나지막이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 시간이라. 자네 말이 완전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할 답을 찾게 도와줄 질문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단 말일세.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시간’의 축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알아보아야 할 걸세. ‘시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