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어워드 수상작 ‘리시안셔스’ 읽고, 작품 모티브 선물 받자!💐

2022.3.23

🌼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는 사실 친구에게 ‘이런 장면 어때?’라는 아이디어를 제안받아 구상을 시작한 단편이에요. ‘주인공들이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긴히 상의하는 모습’이 그 장면이었는데요, 과거에서 온 사람,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한 시간대에 만나 그렇게 작전 회의하는 모습이 담기면 재밌겠다고 생각해서 처음엔 타임리프물로 시놉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다른 방향의 전개가 떠올라서 규희라는 인물만 남겨두고 이야기를 새로 짰어요. 어쩌면 「리시안셔스」는 『공정하다는 착각』의 독후활동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덕분에 최초의 아이디어에서는 천만 광년 멀어지고 말았지만, 이야기가 스스로 갈 길을 찾아냈다는 묘한 믿음을 주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첫 시놉은 언젠가 다른 소설로 탄생하겠죠?)

🔥 가빙라이트

더위엔 꽤 강한 편인데 추위엔 한없이 약한 제가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초능력을 주인공 가빈 씨에게 허락해 보았습니다. 따끈한 손으로 식은 커피도 데우고, 토스트도 굽고, 수족냉증으로 싸늘해진 발도 데우고 이래저래 유용할 것 같았죠. 그렇지만 소소한 제 삶이 아닌 소설에서는 그 정도론 유쾌통쾌한 플롯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하루는 일반 단독 주택에 거주하는 직장 동료가 한파가 몰아닥친 날 대문이 얼어서 안 열리는 바람에 담을 넘어 출근했다는 비극을 듣고,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끄덕이며 멈췄던 글을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빙 라이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옥수수-팝콘 장면이에요. 이 소설집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일지도 몰라요.

🥗 시금치 소테

「시금치 소테」는 상실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돌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설집의 다른 화자들은 대부분 현재 노동자이거나, 근로자가 되고자 애쓰는 반면 미하는 돌봄을 받아요. 가끔 일상에 부침이 있을 땐 이것도 저것도 다 놓고 이불 속에만 있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결국 출근은 누가 하고 원고는 누가 하고 가족들은 누가 돌보지 등등을 계산하다 보면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마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소설에서는 자살생존자로 한정했지만, 위기에 빠진 사람 누구라도 기꺼이 조건 없는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는 아주 사소한 욕망에서 출발한 소설입니다. 소설 안에서는 긴 시간 양육자로서 시호를 돌보는데 전념했으나 상실을 마주하며 지쳤을 미하에게, 소설 바깥에서는 단단한 어른으로 살아가느라 어느덧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독자분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글이기도 하고요.

※ 자살생존자의 원래 의미는 가까운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영향을 받게 되는 가족 친구 등의 주변 사람을 뜻합니다. 단, 소설 속에서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은 당사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였습니다.

💧 면도

저자 소개에 기억과 떠남,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적기도 했는데요, 저는 특히 기억의 다양한 변주를 좋아합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써도 질리지 않는 소재랄까요.

단순하게 기억을 ‘과거의 정보’ 정도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 깊숙한 의식이 때론 사람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때론 앞으로 나아가게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늘 흥미롭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기억도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에 닿을 수 있다는 점도 그렇고요. 소설 속 ‘나’도 데이터화 된 기억을 경험하기보다, 직접 맞부딪혀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었을 거예요. 나무에 자란 이끼를 해석했듯이요.

그리고 소설집의 단편들은 모두 어떤 기억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면도」는 결이 약간 달라서 쓰는 재미가 남다른 단편이기도 했어요. 공유된 기억이 아닌 일방적인 기억, 아주 적은 힌트로 더듬어가는 상대방의 마음 같은 것들이요.

🧟 좀비 보호 구역

한번 대차게 잘 써보고 싶은 제 마음을, 결국 제 손이 배반하고 마는 장르가 코미디입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정말 웃긴 이야기를 쓰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유머 코드 잘 맞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를 웃긴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글로요.

고전적인 좀비물도 재미있게 보지만 사실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나 <좀비 랜드> 같은 코미디 좀비물도 제 취향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듬뿍 묻어나는 아이러니에 자꾸만 피식피식 웃게 되는 그런 거 있잖아요. 공포와 맞닿은 웃음의 순간이요!

비록 제 손의 배반 탓에 욕심만큼 웃겨드리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언젠가 정말 웃긴 좀비물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옹알이로 봐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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