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에 가려진?
그림을 그리지 못하지만, 어쩌면 그래서인지, 멋진 그림들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어요. 서점에서 발견하곤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샀다가… 제가 먼저 푹 빠져 읽은 책이 있어서. 소개해 봅니다.
로그라인. 거대한 전쟁이 끝난 세계, 도처에 뉴로캐스트를 쓴 시체들이 널부러진 세상… ‘미셸’이라는 소녀가 ‘스킵’이라는 로봇과 함께 미 서부를 가로지른다.
라는 단순한 설정이에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사막을 건너고 도시를 가로지르고 산맥을 넘으며 서부 해안까지 가는 이야기죠. 그러나 훌륭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 그 단순한 여정 안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상상하게 하고, 여운까지 남겨주는 작품이에요.
인상1. 당연히 섬세하고 신선한(?) 일러스트들이 매력적이에요. 디지털 아티스트이자 시각 스토리텔러라고 소개라는 이 스웨덴의 작가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미국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낯설고 처량한, 그러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이미지들을 전면으로 보여줘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러스트들이에요.
인상2. 하지만 저는 글쟁이라 그런가, 일러스트들을 보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짧은 소설이 더 매력적이더군요. 모호하게 제시된 세계관, 뉴로캐스트에 오염된(?) 사람들, 그것을 사용할 수 없는 소녀, 그 떨어진 객체로서의 소녀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 자체로 멋진 SF소설이에요.
저는 아포칼립스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그 세계가 제시하는 풍경들에 빠져들곤 하는데, 이 작품은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히 시각적이에요. SF소설이란 관점에서 보면, 일러스트들은 그 세계를 매력적으로 구현하고. 텍스트는 세계관으로 일러스트들을 강화해 주고 있어요.
인상3. 개인적으로, 내용과 일러스트들을 따라가면서 궁금한 게 있었어요. 바로 주인공 곁에서 말없이 따라다니는 스킵이라는 로봇의 정체예요. 읽는 내내 (글쟁이 버릇이 발동해선) 이 녀석의 정체가 뭐지? 분명 사연이 있을 텐데…? 하는 의문을 가졌었죠.
스포라 밝힐 순 없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밝히고 싶네요. 먼저 영상 하나. 마지막의 아련한 여운을 잘 표현한.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환경 관련 석사학위 영상이라네요)
일러스트 작품이라 그런지, 텍스트로는 로봇의 정체와 사연을 밝히지 않아요. 작품에서도 이미지들로만 묘사하지요. 처음에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게 뭘까 궁금했는데… 뒤늦게 스킵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아련함과 깊은 여운 같은 감정에 휩싸이더군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어요.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추천. 검색해 보니, 멋진 그래픽노블 또는 아트북으로만 소개되고 홍보되던데. 그 안에 보다 깊은 사색과 정서, 여운이 있는 SF소설로도 소개하고 싶었어요… SF가 미국과 영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고. 자극이 필요한, 그리고 멋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계실 SF 작가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낳는 법이니까요… 물론 좋은 작품을 찾는 독자들께도요.
덧, 구경거리. 작가 시몬 스톨렌하그의 갤러리예요. 다른 작품들도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