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00: SF의 세계와 내 세계의 SF

분류: 수다, 글쓴이: 양진, 5월 11일, 댓글2, 읽음147

서두:

나는 왜 이 글(들)을 쓰게 되었는가? 그냥 심심해서 썼는데 블로그를 닫았더니 올릴 곳이 없어서 여기에 올린다. 아마 여러분은 남 일기를 보는 취미가 없겠지만 뭐 누가 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안 보고 할 것이다.

다만 이 게시판엔 내 단편을 읽은 사람들이 몇 명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걸 통해 이 사람이 왜 이런 글을 쓰는가? 라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얻어가길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소설을 쓰겠다며 깝치기 시작한 이후로 언제나 불가피한 오독에 시달려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일단 나는 내 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한편으로 이것은 내가 생각중인 주제들에 대한 변명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이런 텍스트로 제 세계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난 여러분이 공유하는 세계에 정을 붙일 수 없고 제 세계가 좋습니다. 그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면책조항인 것 같다.

 

0.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 내 가방에는 이런 책들이 있었다: 버로스와 핀천과 퀸시와 포크너와 로트레아몽과 장 주네와 루쉰이…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한국 문단에 단 한 번도 적을 둔 적이 없다. 김연수와 백가흠 등 젊은 작가들은 물론이고 황석영이나 박경리 같은 원로들조차도 나의 관심에서는 저 멀리 벗어나 있었다. 지금껏 읽고 감명한 한국 장편 소설은 진실로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 내가 학교 도서관에서 민음사 이데아 총서의 53번째 권을 집어든 것은 어쩌면 예정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뮬라시옹>의 지금은 절판된 판형인데, 프랑스 철학자 특유의 뒤틀린 언어와 질 낮은 번역이 더해진 결과 문장 단위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책이 되고 말았다. {실재의 분신인 파생실재 속에서 실재의 모든 차원들을 합하는 것과 등가인 이러한 합산, 혹은 한 개인의 생식적 분신(동일등신군) 속에서 그 개인에 대한 모든 정보의 합과 등가인 이러한 합산은 이 분신을 즉각 형이상상pataphysique적인 것으로 만든다.} 솔직히 인정하건대, 내가 당시 이해한 것은 파생실재와 실재에 대한 몇 가지의 사변뿐이었으며 나머지 9할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박상륭의 저작을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을 답보하고만 있었다. 쉽게 말하면, 18개의 챕터 중에서 2개의 챕터만을 겨우 더듬거렸으며 나머지는 전혀 읽지 않았(못했)다는 것이다.

그 두 개는 첫 번째 챕터인 <시뮬라크르들의 자전>과 여덟 번째의 <충돌>이다. 아마도 <시뮬라크르들의…>를 읽은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갔던 것 같은데, 본 적이 있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영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기에 포기했다. 그 후로는 페이지를 슬슬 넘겨 가면서 익숙한 주제가 있나 찾기 시작했다. 내가 멈춘 곳은 186p의 이 대목이었다. {그녀의 죽음과 사지 절단은 폭발한 기술의 은총을 받아 그녀의 사지 각각과 그녀의 얼굴 각각의 관점에 대한, 그녀 피부의 점과 그녀의 태도 등에 대한 엄숙한 찬양으로 변하였다. 충돌의 연극무대 각 관객들은 이 여인의 격렬한 변형 이미지, 그 속에서 성과 자동차의 무거운 과학이 서로 얽히는 상처들의 그물 이미지를 실어 가지고 갈 것이다.}…그렇다. 하태환의 번역은 밸러드의 테크노-포르노를 보드리야르의 것만큼이나 기괴한 포스트모더니즘적 말뭉치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그것은 핀천이 쓴 테크노적 악몽처럼 보였다.

(*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발라드의 진짜 글을 접했을 때 다소 실망하게 되었는데, 그는 멀쩡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괴하긴 해도 내적 논리가 정립된 세계를 구축해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핀천/버로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미덕이다.)

나는 거기에서 밸러드를 처음 만났고, 덕분에 꽤 오랫동안 SF의 계보를 더듬는 일 없이 그가 핀천의 옆자리쯤에 안치되어 있으려니 하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어쨌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순문학의 장 밖에는 어떤 유의미한 텍스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반 년이 지났다. 자퇴를 마음먹은 나는 완벽한 부외자가 되기 전에 이 책을 챙겨야겠다는 믿음으로 <시뮬라시옹>을 가방에 넣은 채 중학교를 떠났고(이 책은 아직도 반납되지 않은 상태로 내 옆에 있다), 그대로, 영원히 돌아가지 않았다. 행복한책읽기 출판사가 야심차게 총서를 내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밸러드는 나한테 포스트모더니즘 순문학 작가였고 SF는 공상과학이었으므로 그 소식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의 첫 챕터를 읽은 뒤 헿헿 존나 식상하넹 안읽음 수고 하면서 집에 가는 어린아이였던 것이다(참고로 이제 나는 헿헿 존나 식상하넹 안읽음 수고 하면서 집에 가는 어른이 되었다.).

whatever.

겨울에 자퇴한 나는 대부분의 자퇴생이 그런 것처럼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종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한 달쯤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헿헿 엿먹어 하고 그만둔 다음 그 어느때보다도 격렬하게 놀기 시작했다. 24시간 내내 만화방에서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와 하승남의 <골통>시리즈를 읽던 봄은 지나가고 여름이 왔다. 방에서 워크래프트를 하던 나는 sens x11의 발열을 이기지 못하고 에어컨이 틀어진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는 막 뽑혀 나온 <마일즈의 전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세 시간만에 내 문학관의 한귀퉁이에 구멍을 낸 뒤 나를 그 바깥으로 데려갔다. 포크너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즉 “개울에 비친 그늘을 묘사하고 나무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해서 창조하도록” 하는 동안 잊혀졌던 세계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림자들 속으로, 그림자들 위에 앉은 가벼운 먼지 같은 지나간 슬픈 세대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속으로 구부러져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고 중얼거리는 대신 {오후 햇살의 역광 속에서 부드러운 잎사귀들이 섬세한 초록색 빛을 발하고 있다. 바라야의 토착 식물들은 불그스름하거나 갈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언젠가 지구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지 질문을 던지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 <마일즈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해 SF의 거대한 계보도를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밸러드 역시 이 만신전의 중앙에서 봉헌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아주 놀랐고, 한편으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동일한 것에 매료되었으므로 A와 B에 동시에 빠진다는 현상은 그 둘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방증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가 두 작가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 둘은 동일한 장 안에 존재할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포크너와 루쉰을 사랑하며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아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정은 이제 20년쯤 보아온(실제로도 그 정도의 기간이 되었을 것이다) 늙은 아내에 대한 것이 되어 있다. 깊지만 결코 강렬하지만은 않은 끌림인 것이다. 반면 SF에 대한 내 감정은, 꽤 오랫동안 거래해 온 비즈니스 파트너에 대한 것과 같다. 내 글의 세계는 오로지 그 둘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도 늙은 아내와 오래된 비즈니스 파트너는 서로 조응하며 SF도 순문학도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합작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나? 거기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나는 대부분의 글에서 세계가 아닌 인간을 조명하게 되는데, 이때 이야기를 견인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며 외삽은 부차적일 뿐이다. 먼 예전에는 포크너나 바설미가 되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밸러드와 부졸드와 래리 니븐을 꿈꿨으며 지금은 배스터를 생각하는데 글을 쓸수록 나는 그 어디에도 가까워지지 못한 채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만을 거듭하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는다.

나 자신이 SF에 부적합할 사람이라는 심증만 깊어지는데, 순문학을 쓰고 싶진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고 있다(하지만 순문학도 쓰긴 써야 한다). 어차피 내가 이거로 밥먹고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차회 예고:

  1. 계보와 정통성이라는 허상에 대하여(나는 하인라인을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안 읽을 것이고 아시모프는 싫어하며 필립딕은 value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뜻)
  2. K-SF와 Pseudo-SF(소프트와 하드의 구분 바깥에서),
  3. 정상성 개념의 부정은 비정상 개체를 해방하는가(SF적 트랜스휴머니즘은 현실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4. 새로운 참여문학이거나 KAPF의 재림이거나(부제: 한국 목적SF의 거두 니그라토 선생과 그의 방향 다른 후예들)
  5. 인간종 특유의 자의식과잉

상기 리스트는 지금 떠오른 생각을 마구잡이로 적은 것이며 제가 다음 글을 쓸지 안 쓸지 그게 저 내용일지 아닐지는 확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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