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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 번역문

글쓴이: 아이라비, 1월 24일, 댓글1, 읽음1304

원문 링크:

https://www.nytimes.com/2018/01/23/obituaries/ursula-k-le-guin-acclaimed-for-her-fantasy-fiction-is-dead-at-88.html

뉴욕타임스 부고

판타지 소설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 타계, 향년 88세

제럴드 조너스(번역: 장성주)

2018년 1월 23일

「어스시」 시리즈와 『어둠의 왼손』 같은 작품으로 과학 소설 및 환상 소설에 문학적 깊이와 강인한 여성적 감성을 부여한 인기 작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이 월요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사망을 확인한 사람은 아들인 시오 다운스 르 귄. 그는 정확한 사인은 밝히지 않았으나 지난 몇 달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르 귄은 자신이 선택한 장르의 보편 주제를 받아들였다. 바로 마법과 용, 우주선, 행성간 분쟁 등이었다. 그러나 르 귄이 만든 주인공들은 남성일 때조차도 수많은 과학 소설과 환상 소설의 주인공들과 달리 마초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주한 갈등은 대개 문화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해결 또한 칼싸움이나 우주 전투가 아니라 화해와 자기희생을 통해 이루어졌다.

르 귄의 작품은 4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다. 종래의 성별 구분법이 통하지 않는 행성이 배경인 『어둠의 왼손』을 비롯한 몇몇 작품은 거의 50년 가까이 절판되지 않고 발행되어 왔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르 귄에게 “상상력이 탁월한 창작자이자 위대한 문장가”로서 “환상 소설을 우리 시대의 고급 문학으로 끌어올렸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르 귄은 20종이 넘는 장편소설과 함께 시집 십수 종과 100편이 넘는 단편소설(선집 여러 권으로 편찬), 수필집 7종, 아동서 13종과 더불어 노자의 『도덕경』 및 칠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집을 포함한 번역서도 5종을 남겼다. 또한 작가들을 위한 창작 안내서 『글쓰기의 항해술』도 집필했다.

르 귄은 청소년을 위한 모험담에서 통렬한 철학 우화까지 다양한 소설을 썼다. 힘 있는 이야기와 정밀한 서사 구조,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가 결합된 이 작품들은 르 귄이 상상력의 “내적 세계”라고 칭한 영역으로 독자들을 이끌었다. 르 귄은 이러한 글쓰기가 도덕적인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 행동의 결과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또는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도,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르귄은 2005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기는 도덕적으로 아예 괴물이지요. 철저히 탐욕스러우니까요. 이들의 상상력은 훈련을 통해 통찰력과 공감 능력에 이르러야 합니다.”

르 귄은 작가의 “즐거운 의무”란 독자의 상상력을 “상상력이 빨아들일 수 있는 가장 값지고 순수한 영양분”으로 부지런히 채워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르 귄은 1929년 10월 21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부부 인류학자인 앨프리드 L. 크로버와 시오도라 퀸 크로버의 네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의 권위자였고, 어머니는 캘리포니아주의 ‘마지막 야생 인디언(※ 당시의 표현이며 지금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용어)’의 삶과 죽음을 담은 책 『두 세계의 이시(Ishi in Two Worlds, 1960)』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어린 시절 르 귄은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를 비롯한 신화 및 로드 던세이니의 『몽상가의 이야기』 같은 고전 환상 소설, 당대의 과학 소설 잡지 등에 탐닉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서자 곧 과학 소설에 흥미를 잃었는데 훗날 그런 이야기들이 “기계와 군대에만 치중하는, 백인 남자가 우주로 돌격해서 정복하는” 내용이었다고 회상했다.

르 귄은 1951년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했고 1952년에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로망스 문학 전공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역시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자 지금은 유족이 된 남편 찰스 르 귄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르 귄은 육아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르 귄 가족은 결국 포틀랜드주에 정착했고, 남편 찰스는 포틀랜드 주립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르 귄의 유족은 남편과 아들 외에 두 딸 캐럴라인과 엘리자베스 르 귄, 형제인 시오도어와 클리프턴 크로버, 자녀들의 자녀 네 명이 있다.

1960년대 초까지 르 귄은 주로 중부 유럽의 가상 국가 오시니아(Orsinia)가 배경인 장편소설 다섯 편을 썼으나 발표하지 못했다. 더 우호적인 시장을 애타게 찾던 르 귄은 장르 소설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르 귄의 첫 번째 과학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1966년에 출간되었다. 2년 후에는 『어스시의 마법사』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마법이 여느 과학과 마찬가지로 엄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모호하게 실행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어스시 시리즈’의 첫째 권이었다.

어스시 시리즈의 첫 세 권, 즉 『어스시의 마법사』와 『아투안의 무덤(1971)』, 『머나먼 바닷가(1972)』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 청소년 독자를 위해 쓴 책들이다. 그러나 작품의 웅대한 세계상과 고아한 문체에는 독자를 낮춰 보는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스시의 마법은 언어를 동력으로 삼는다. 마법사들은 사람과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앎으로써 대상에게 힘을 행사한다. 르 귄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을 때 이 원리를 진지하게 적용했다. “올바른 이름을 찾지 못하면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가 없습니다.” 르 귄의 말이다. “이름이 틀리면 이야기를 쓸 수가 없는 거지요.”

‘어스시 시리즈’는 분명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르 귄의 이야기들은 선과 악의 성스러운 싸움 대신 서로 다투는 힘들 사이의 ‘균형’ 찾기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이는 르 귄이 평생 연구한 도교(道敎) 경전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르 귄은 훗날 어스시 세계로 돌아가 초기의 세 권에 더하여 일반 독자를 위한 『테하누(1990)』, 『또 다른 바람(2001)』 등을 썼다.

1969년에 발표한 『어둠의 왼손』은 게센이라는 행성이 배경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며 단지 재생산의 욕구를 느끼는 시기에만 양성 가운데 한쪽의 특질을 띤다. 나중에 르 귄은 인류학자 특유의 냉담한 어조로 자신의 소설을 가리켜 인간 사회의 본성을 탐구할 목적으로 고안한 ‘사고 실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둘 다 사라지면 남는 게 뭔지 알고 싶어서 성별을 없앴습니다.”(《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게센의 양성 원주민과 지구인 남성 사이의 관계는 전혀 냉담하지 않다. 『어둠의 왼손』은 과학 소설계의 양대 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했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 교재로 널리 읽히고 있다.

르 귄의 과학 소설들은 대부분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데, 바로 여러 세계의 느슨한 연합체인 ‘에큐멘’이다. 에큐멘을 세운 고대인들은 전 은하계의 거주 가능한 여러 행성에 인간의 씨앗을 뿌렸다. 여기에는 게센과 지구, 그리고 르 귄의 가장 야심찬 소설이자 ‘모호한 이상향(An Ambiguous Utopia)’이라는 부제가 붙은 『빼앗긴 자들』의 쌍둥이 세계가 포함된다.

부제에 함축되어 있듯이, 『빼앗긴 자들』에서는 두 가지 사회 구조가 서로 대립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수선하지만 활력이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하위 계급을 억압하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일부 기초한) 계급 없는 ‘이상향’은 나중에 나름의 순응주의적 방식으로 강압성을 띠게 된다. 르 귄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하늘의 물레(1971)』는 이상주의적 야심에 대한 판이한 접근법을 보여 준다. 꿈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남자가 정신과 의사의 손아귀에 들어가는데, 이 의사는 그 남자의 힘으로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세계를 만들려다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하늘의 물레』는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르 귄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1980년에 PBS 방송국에서, 또 2002년에 케이블 채널인 A&E에서 드라마로 만들었다.

르 귄의 작품을 영상화한 다른 결과물은 2006년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게드 전기」와 2004년 사이파이 채널에서 만든 미니 시리즈 「어스시의 전설」이 있다.

1980년도판 드라마 「하늘의 물레」를 제외하면 르 귄은 영상화된 결과물을 호평한 적이 없다.

르 귄은 언제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겼고, 심지어 장르의 인습 때문에 남성 주인공에 집중할 때에도 그러했다. 어스시 시리즈에 추가된 소설들이나 에큐멘이 배경인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1995)』, 『이야기(Telling, 2000)』 같은 후기작은 주로 여성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후기작 가운데 일부에서는 교훈주의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에 엄밀하게 구현한 고통스러운 교훈, 즉 균형과 공감의 필요성을 배우지 못한 인류에 싫증이 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4년 미국 도서상(National Book Awards) 시상식에서 르 귄은 미국 문학의 공헌자를 위한 특별 공로상(Medal for Distinguished Contribution to American Letters)을 수상했다. 르 귄은 환상 소설 및 과학 소설을 쓰는 동료 작가들을 위해 이 상을 받아들였다. 르 귄에 따르면 그 작가들은 문학적 영예가 “이른바 현실주의자들”에게 돌아가는 사이에 “너무도 오랫동안 문학으로부터 배제”당했다.

또한 르 귄은 출판업자와 작가들에게 이윤을 너무 중요시하지 말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저는 작가로서 길고 멋진 경력을 이어왔습니다.” 르 귄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 막바지에 이른 지금, 저는 미국 문학이 돈의 강에 떠내려가는 꼴을 결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라비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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