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무화하는 글쓰기

분류: 수다, 글쓴이: 조딘, 2시간 전, 댓글2, 읽음: 37

머릿속에서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하고 또 하고 또 해도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의 끝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는 막막함의 끝에서

더러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부조리극들에 천착하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를 무화시켜버리는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사랑해버리게 되는 거예요.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모스크바, 쁘레스냐, 황량한 눈 덮인 거리, 나무로 지은 평민의 초라한 집. (…) 나는 눈 덮인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현관문의 철사 고리를 잡아당기자 현관의 종이 딸랑거렸다. 그러자 문 뒤의 가파른 나무 계단으로부터 황급히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 나는 바람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퍼부었다. (…) 그녀는 떨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들어봐요, 우리 도망가요!’ 도망가자고! 어디로, 왜, 누구에게서? 이런 성급하고 어린애 같은 어리석음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우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 기억나는 것이 더 있을까? 봄, 꾸르스끼 역에서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발차 준비가 끝난 기다란 기차를 따라 달려갔던 것과, 사람들이 가득 찬 녹색 차량들을 눈여겨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마침내 그녀가 기차 계단 위로 뛰어올랐고,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손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2주 뒤면 세르뿌호프로 갈 거라고 약속했던 것도 생각난다.

그 이상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

– 낯익은 거리에서 / 이반 부닌

 

 

내가 어느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하고 청했는데도 그녀가 무심코 지나가버린다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명성이 자자한 공작도 아니고, 

인디언 같은 체격에 수평으로 붙은 눈, 잔디밭을 관통해 흐르는 강물의 공기로 마사지된 피부를 지니고 있는 미국인도 아니죠.

당신은 저로선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거대한 대양을 항해해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어여쁜 소녀인 제가 왜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잊고 있군요. 당신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에요. 

꼭 맞는 옷을 입고 축복의 말을 중얼거리며 당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추종자들도 보이지 않는군요. 

당신의 가슴은 코르셋으로 단정히 감싸져 있지만, 다리와 엉덩이는 그 단정함을 엉망으로 만들고도 남아요. 

당신은 지난 가을 유행이었던 옷을 입고 있지만, 그렇게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몸에 걸치고도 때때로 미소를 짓고 있다니.”

“그래요, 우리 두 사람 말이 다 옳아요. 

그러니 우리가 그런 걸 서로 너무 잘 알게 되어 어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지 않도록, 차라리 각자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낫겠군요.”

– 거절 /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뼈저리게 자각하는 거죠.

내가 나인 것은 그저 다른 방법이 없어서일 뿐이라고.

도망치려 해봤자 어디서든 나라는 것.

 

 

 

‘저 사막의 너머엔 무엇이 있습니까?’

‘또다른 사막이 있소’

-동사서독 / 왕가위

 

우리 할아버지께선 곧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이란 놀랍도록 짧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할 수도 있겠어. 예를 들면, ‘사람의 인생은 턱없이 짧기만 한데 -도중에 재난을 만나는 따위의 우연은 별도로 치고, 별 탈없이 시간이 무사히 흐른다 하더라도, 나이도 젊은 사람이 말 같은 것을 타고 이웃마을에 갈 마음이 왜 생기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웃마을 / 카프카

 

여행은 해서 뭐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인 것을. 결국 여기엔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보로메의 섬들 / 그르니에

 

 

그래서 특별한 재앙 같은 게 일어나지 않아도, 별 탈 없이 시간이 흐른다 해도

도무지 말 같은 것을 타고 이웃마을에 갈 생각같은 것이 들질 않는 것입니다.

결국엔 필히 어디서든 나라서.

 

날도 더운데 제가 좋아하는 농담 하나 남기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조딘입니다. 당신은요?”

“저는 아닙니다.”

 

 

안 웃기다면 죄송합니다.

 

 

당신은 아마도 안경 없이는 글자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평소에는 안경을 끼지 않는 걸 거예요

힘겨운 시간도 겪을 가치가 있었다고 말은 하지만

아마도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겠죠

아마도 당신은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극장에는 종종 가곤 하겠죠

아마도 서로에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 느끼면서도

여전히 엄마와 자주 싸울 거예요

어쩌면 펑크락에 관심조차 없으면서

아마도 네버마인드 앨범은 갖고 있겠죠

당신은 아마도 낯선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늘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왔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아마도 당신에게 말을 걸어보는 게 좋을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마 전 결국 다 망쳐버릴 거예요

그러니 우리 둘 다에게 최선은

제가 그냥 입을 다물고

여기, 기차의 반대편 좌석에 가만히 앉아있는 거겠죠

 

 

probably / 케빈 디바인

조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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