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처들은 더욱 평등하다.
0.
이글이 게시판에 한번 더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 자게 댓글들을 쭉 읽으면서 든 생각에 대해 한 번 말해보고 싶습니다.
1.
저는 ‘혐오’라는 표현 속에 이미 “동물농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물들은 더 평등하다.’
모두의 존엄과 상처가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처는 더 보호받을 가치가 있고, 어떤 상처는 무시해도 된다는 서열이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혐오’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행위를 설명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때로는 누가 피해자로 인정받고, 누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의 언어입니다.
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언제부터인가 특정 집단의 불편감을 타인의 발언보다 우선시키는 권리로 변질되었습니다.
그 순간 ‘혐오’는 피해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발언권의 서열을 정하는 말이 됩니다.
불편감을 피해로 선언하는 순간, 타인의 표현을 제한할 정당성까지 얻게 되는 시대.
그것이 제가 바라보는 PC주의의 시대입니다.
2.
제 소설 중에 개러지 아프로디테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저는 이걸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걸 누가 왜 썼는지 알아보면 난리가 나겠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설에서 제가 대체 무엇을 문제 삼았는지, 오늘 제 입으로 직접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소설의 배경인 샌프란시스코는 재미있는 도시입니다.
1967년 ‘서머 오브 러브’가 일어난 도시이며, 이듬해 서구 유럽을 휩쓴 68운동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사랑, 해방, 자유.
오늘날 PC주의와 LGBT 운동의 선구자 격인 셈입니다.
제가 소설의 ‘구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한마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 새끼들이 권력을 잡더니, 전보다 더 빡세게 검열하고 착취하네?”
사랑과 해방을 외치던 도시는 여전히 사람을 계층과 인종, 거주 지역으로 갈라놓습니다.
창의와 혁신을 말하는 벤처투자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착취의 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성해방을 외치던 사람들은 이제 성인이 포르노그래피 하나 보는 것까지 간섭합니다.
사랑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역사와, 오늘날 권력을 잡은 대PC주의자들의 시대를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냥 이거,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 아닌가?”
한국의 586세대와 지금의 사회를 보면서도 같은 질문이 듭니다.
검열은 계속 쏟아집니다.
VPN을 막겠다고 하고, 얼굴을 인식하라고 하고, 성인이 자기 책임으로 포르노를 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모욕죄와 명예훼손을 들이댑니다.
이제는 국민을 무시한 축구감독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걱정해야 합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민주항쟁이었습니까.
누구를 위한 투쟁이었습니까?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이 검열하고 통제할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습니까.
3.
왜 저는 이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보는가
이런 해석이 너무 과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인 남성이자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성도 이해도 없이 자기변명만 반복하는 사람.
겉으로만 사과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되돌이표.
아마 그런 식으로 규정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제가 왜 앞에서 “동물농장”을 이야기했고, 왜 이 문제를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PC주의와 권력의 문제로 보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 군대, 직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집단에서 배제되고 따돌림을 겪었습니다.
힘이 없던 시절에는 폭력을 당했고, 도움을 요청해도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몸을 키우고 운동했습니다.
다시는 일방적으로 얻어맞거나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사고방식과 취향에서도 저는 스스로를 주류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여기에서 글을 쓰면서도 순문학적이지 않다, 문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 와서 들은 말 중에 “글을 왜 그렇게 쓰느냐”, “글을 지워라”, “댓글을 그렇게 달지 마라”, “리뷰를 지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누군가 제 생각을 이해하려 했던 기억보다, 항상.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훨씬 많습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업, 대출, 가산점, 혜택, 심사.
저는 국가나 사회로부터 특별히 보호받거나 배려받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
남자가 그렇게 살 거면 고추나 떼라는 말을 신나게 들었습니다.
남성다움과 힘, 책임과 의무를 요구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남성이고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자와 가해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소수자라는 감각은 학술 용어나 정치적 신분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배제되고,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인정받지 못했던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삶 자체가 소수자였습니다.
2) 성소수자와 관련해 불쾌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 중 한 남성이 유독 저에게만 접근해 허벅지를 반복해서 만졌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동료들이 말해준 뒤에야 그 행동을 확인했습니다.
제 주변에는 이후 성추행 문제로 처벌받은 성소수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경험을 근거로 성소수자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겪은 것은 특정 개인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잘못을 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의 성향이나 본질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3) 제가 요구하는 것도 똑같은 구분입니다.
BL을 희화화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 표현은 그 표현 자체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표현을 근거로 특정 장르를 전체를 조롱하거나,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표현과 한 사람의 사상 전체는 구분해야 합니다.
개인의 행동과 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를 구분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개인의 불쾌감은 말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그 표현이 불쾌했다고, 기분이 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쾌감이 곧바로 타인의 생각과 표현을 심판할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왕따와 폭력을 겪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왕따를 당해서 폭력에 민감하니, 너는 왜 그런 글을 쓰느냐.”
그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제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제 기준을 적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단속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모든 민감성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1) 2) 의 경험이 있지만, 전 누구를 재단하거나, 하지 말라는 말을 안합니다.
브릿G에서 저에게 뭘 하지말라는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기분이 안나쁘거나, 무신경해서라기 보다는 존중의 의미로요.
‘그래.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경험도 사고도 다르니까.’
직접적인 공격과 일반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합니다.
내게 불편한 표현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소수자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타인이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처는 이해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상처가 검열권이 될 수는 없습니다.
4.
동시대성, 아픔, 취향, 혐오, 무신경함.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제는 화가 날 지경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검열할 생각인가?”
제게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초과이윤, 노동쟁의, 성소수자와 여성의 문제는 동시대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빚을 내고, 쉴 시간도 없이 일하며, 폐업의 공포를 견디는 자영업자의 삶은 외면합니다.
노동법 문제로 고용노동청에 불려 다니는 사장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악인으로 규정됩니다.
남성이나 이성애자는 소수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례한 인간으로 취급됩니다.
그들의 삶은 구조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이 들의 삶은 개인의 무능입니다.
그들의 불편감은 사회가 바로잡아야 할 피해입니다.
저의 불편감은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투정입니다.
그들이 겪은 배제는 사회적 억압입니다.
제가 겪은 배제는 제 성격과 처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화를 내면 정당한 분노입니다.
제가 화를 내면 반성과 이해가 부족한 가해자의 역정입니다.
저는 평생 주류에 속했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 차례 집단에서 배제되었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으며, 제 삶과 취향 역시 좀처럼 사회적 언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성이고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자의 자리에 놓입니다.
제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범주에 속했는지만으로, 제가 누린 사람인지 억압한 사람인지, 말할 자격이 있는지가 먼저 결정됩니다.
그렇게 인정받은 소수자의 상처는 사회적 정의가 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소수자의 상처는 침묵해야 할 개인사가 됩니다.
상대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상처를 불러와 제 표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오며 겪은 상처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논점을 흐리는 자기변명이 됩니다.
상대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말을 더 무겁게 만듭니다.
제 정체성은 제 말을 더 가볍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선택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이미 ‘동물농장’인 이유입니다.
모두의 아픔은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아픔은 더 평등합니다.
문학을 하시는 분들이니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과연 그것도 동시대성이라고 불러주실 겁니까?
이야기와 서사 자체가 남성적인 것이니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소설의 문체 하나를 두고도 여성의 정조와 여백을 생각할 권리까지 박탈한다는 소리를 듣는 판입니다.
과연 제가 말한 상처와 배제도 동시대의 문제로 읽어주실 겁니까? 진짜 소수가 경험한 지옥을 읊어도 될까요?
아니면 이것 역시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 속좁은 남자의 불평으로 치부하실 겁니까?
5.
저는 제가 BL을 희화화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먼저 건드린 셈이고, 그 표현으로 불쾌함을 느낀 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제 잘못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다만 제가 사과드리는 것은 타인의 취향을 가볍게 다룬 표현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이 곧 BL을 향한 혐오 혹은 장르 전체를 우습게 봤다고 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표현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불쾌했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말을 듣고 돌아볼 부분은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표현을 넘어 제가 가진 생각과 의도까지 단정하고, 저를 혐오주의자나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생각까지 제 글에 부여하고, 한 개인의 불쾌감을 장르 전체와 소수자 전체의 문제로 확장한 뒤, 혐오와 예의라는 이름으로 저를 심판하는 방식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넘어 가치관과 사고방식까지 교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앞으로도 계속 반성하고 자신을 의심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은 표현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한 사람에게 도덕적 교정의무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보편적으로 옳은 사고?”
저는 그런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타인을 교정할 만큼 올바른 사람이고, 상대는 지속적으로 반성하며 교정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믿는 것.
그것은 결국 선민의식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상처받은 당사자이므로 올바름을 판정할 위치에 있다.’
‘당신은 가해했으므로 자신의 의도와 판단을 의심해야 한다.’
‘사과만으로는 부족하며 앞으로의 사고와 행동까지 바꿔야 한다.’
이건 권력 행위의 다른 이름입니다.
저는 잘못한 표현에 대해서는 사과합니다.
그러나 비판할 권리와 타인의 가치관을 교정할 권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가치관 전체를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교정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