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애들인데
일생을 ‘공간’ 속에서 살아온 자가 ‘공간이 없는 세상’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지금껏 또렷한 의식만을 느끼고 살아왔던 자에게 무의식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 바닷물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또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그들세계에 대해 그들만큼 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줄도 안다. 내 의식으로는 여전히 그들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공간이 없는 세상(엄밀하게는 ‘거의 없는’이 맞다)에서 왔다. ‘그들은 몸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곳에서는 물리적으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입자가 있는 곳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암흑물질(빛을 내지도 반사하지도 않는 물질)이 둘러싸 입자와 공간을 유지시킨다. 이 암흑물질 너머로는 무한한 무공간의 암흑에너지(빛이 없거나 빛과 반응하지 않는 순수 에너지)가 요동한다. 이것이 그들이 보는 우주다.
여기서, 암흑물질이라는 매우 무거운 질량체가 내는 힘이 이른바 ‘중력’이다. 우주의 중력에 대해, 지구인은 질량이 시공간을 왜곡하면서 만들어 낸 ‘끌어당기는 힘’(인력)으로 본다. 반면, 그들의 중력은 암흑물질이 입자와 공간을 유지시키기 위해 ‘밀어내는 힘’(척력)이다.
암흑물질이 내는 척력은 물질에 가까워질수록, 물질의 질량이 무거울수록, 기이하게 강해진다. 그 때문에, 공간 내에서 물체는 그 형태를 지키고 물체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암흑에너지는 우주 척력의 원천이다. 다만 이곳은 블랙홀 내부처럼 무한한 질량의 척력이 작용하며, 암흑물질이라는 필터를 통해 비로소 입자계에 상응하는 척력으로 바뀐다. 물론 그들과학의 관점이다.
이 우주의 중간계인 암흑물질지대에, 그들이 무체인으로 산다.
암흑물질은 질량이 천차만별인 모든 물질 사이에 구름처럼 중첩하여 형성되어 있고, 은하계 단위로 확장해보면, 이 암흑물질 구름띠는 항성과 항성, 은하와 은하 사이의 빈공간을 연결하는 광대한 뇌신경망처럼 보인다. 지구천문학상 우주 최대의 구조체로 불리는 ‘우주필라멘트(UF, Universe Filament)’. 이곳에 그들의 의식이 고루 퍼져 있다.
그들이 무체인이 되어 우주필라멘트에 정착한 지는 그들시간으로 2천 년이 넘는다. 지구의 공전시간으로는 무려 2억 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이다. 그들은 육체를 버린 대신 거의 영구적인 생명을 얻었고,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존재가 되었다.
– 그런 존재면 뭐해,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애들인데 뭘. 다들 어서 일어나!
춘희가 보낸 신호였다.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떴을 때, 눈부신 광채 때문에 한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서 향긋한 단맛이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