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작가와의 대화 — 《비천》
이 가상의 인터뷰는 《비천》을 완독한 독자를 위한 보너스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비평가: 안녕하세요. 오늘은 《비천》을 쓰신 KRimmer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807매로 시작해서 외전까지 붙으며 1,033매가 된 이 작품, 다 읽고 나면 며칠은 다른 책을 못 잡겠더라고요. 일단 제일 먼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33천과 아수라의 전쟁, 왕후의 죽음, 독살, 자결까지 800매 넘게 웅장하게 쌓아놓고선, 마지막에 홍대 앞 이자카야에서 정종 마시다가 계란 후라이로 끝나잖아요. 이 낙차, 의도하신 겁니까 아니면 제가 과민한 겁니까?
KRimmer: (웃음) 과민하신 거 아닙니다. 정확히 보신 겁니다. 다만 방향을 반대로 읽으신 것 같아요. 저는 신들의 삶이 인간의 삶보다 더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신들이라 해봤자 복덕이 좀 많은 중생들일 뿐이니까요.
비평가: 그런데 지면은 800매를 전쟁에, 결말은 몇 페이지를 계란 후라이에 쓰셨잖아요. 지면의 물리적 비중 자체가 반대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인데요.
KRimmer: 그건 제가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야 할 게 있어요. 사실 저 홍대 편, 그러니까 지금 10화인 그 에피소드를 제일 먼저 썼습니다. 계란 후라이 장면이 씨앗이었어요. 그걸 먼저 쓰고 발표했고, 그 다음에 1화부터 9화까지의 33천 서사를 나중에 붙였습니다. 807매짜리 소설이 그렇게 완성된 거고, 그 뒤에 외전 《緣の香》을 또 붙여서 1,033매가 됐죠.
비평가: 그러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결말이 앞부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앞부분 전체가 그 마지막 장면 하나의 무게를 증명하려고 사후적으로 지어진 거네요.
KRimmer: 정확합니다. 저는 독자가 9화까지 장중한 신화적 비극을 읽고 무거워진 채로 작품 밖으로 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10화에서 가벼워지길 바랐습니다. 카페 문을 여는 소리 하나의 무게를 증명하기 위해서 33천과 아수라의 전쟁 전체가 소환된 거예요.
비평가: 그럼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그 낙차, 성공했다고 보십니까?
KRimmer: 그건 독자가 판단할 문제겠죠. 다만 확실한 건, 저는 그 두 세계가 저울 위에서 같은 무게로 재지길 바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 결코 더 가볍지 않다는 걸, 오히려 말이 아니라 형식으로—분량의 급강하, 톤의 급강하—겪게 만들고 싶었어요.
비평가: 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샤치, 아라, 수자타. 그런데 이상하게 대부분 나중에 다시 만나고, 용서받고, 행복해집니다. 주요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회수되지 않는 죽음이 마탈리인데요.
KRimmer: 마탈리는 전쟁 중에 죽었지만 연인, 그러니까 찬드라의 품 속에서 갔습니다. 그건 이미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외전을 따로 쓸 생각이 없습니다.
비평가: 그런데 이게 구조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마탈리가 회수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다른 인물들의 구원이 자동 안전망이 아니라 각자 얻어낸 것으로 보이거든요. 근데 애초에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틀렸다고 하셨죠.
KRimmer: 네, 그건 제가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에요. 환생은 보상이 아닙니다.
여백의미 님이 리뷰에서 쓰셨던 좋은 표현, ‘감정의 잔해’, 즉 찌꺼기가 남았기 때문에 다시 육신을 받는 것뿐이에요. 완전히 잔해를 남기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구원받은 거죠. 니르바나. 이 소설에서 니르바나에 가까이 간 것은 샤치 한 명뿐일겁니다.
비평가: 딱 한 명이요?
KRimmer: 네. 나머지는 전부 감정의 찌꺼기를 잔뜩 남긴 채 죽죠. 그래서 다시 태어나서 인연을 이어가는 거고요. 그건 구원이 아니라 그냥 끝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감옥이죠.
비평가: 그러면 이 소설에서 진짜 사랑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KRimmer: 진짜 사랑을 한 사람을 꼽는다면 샤치겠죠. 그런데 그마저도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죽어버리죠. 저는 그게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해요. 이 소설엔 주인공이 없어요. 시작과 동시에 죽어버린 사람을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비평가: 그럼 인드라도, 베마와 소하도, 수자타도 전부…
KRimmer: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갈애(渴愛)일 뿐이었죠.
비평가: 냉정하시네요, 자기 작품 인물들한테.
KRimmer: (웃음) 냉정한 게 아니라 정직한 겁니다.
비평가: 그럼 샤치 얘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이 인물은 소설 현재 시제에 단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아요. 시작할 때 이미 죽어 있고, 우리가 만나는 방식은 편지뿐입니다. 이거 처음부터 계산하고 쓰신 건가요?
KRimmer: 아니요. 그건 사후적으로 발견한 겁니다. 소설을 다 완결내고 몇 달이 지나서야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니르바나를 염두에 두고 샤치를 조형한 게 아니에요. 제 평소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거죠.
비평가: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굉장히 정교합니다. 니르바나는, 그러니까 갈애가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애초에 ‘장면‘이 될 수가 없거든요. 장면이라는 건 변화와 갈등과 시간의 경과를 요구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샤치를 소설 안에 직접 그리려 했다면 오히려 실패했을 텐데, “그리지 않음“으로 정확히 성공시킨 셈입니다.
KRimmer: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다시 보게 되네요. 저는 그냥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을 들으니, 주인공을 소설이 문법적으로 담을 수 없는 자리에 놓아둔 거였네요.
비평가: 그럼 수자타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이 인물, 정말 무섭게 그리셨습니다. 아라를 독살하고, 자기 죄를 비슈와카르만이 뒤집어쓰려 하니까 소하에게 가서 자백하고 자결하죠. 근데 외전 《緣の香》(11-18화)에서는 아마노 시오리라는 맹인 안마사로 환생해서, 비슈와카르만과 재회하고 결국 행복해집니다. 이 전환, 좀 급하지 않습니까?
KRimmer: 급하다고 느끼실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참회를 서사로 전시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죽음 자체가 이미 참회입니다. 그 뒤에 남은 건 다 태우지 못한 잔불뿐이고요.
비평가:
별노을 작가님이 <까뜨린느의 도서관> 8화에서 수자타를 소개하면서 이런 문구를 쓰셨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택받지 못했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택할 수 없었던 여인.” 근데 이거, 엄밀히 따지면 좀 안 맞는 말 아닙니까? 시오리는 결국 비슈와카르만을 선택하잖아요.
KRimmer: 그 문구는 ‘갈애에 사로잡힌 자의 구조적 무능력‘으로 읽으면 의미가 통하거든요. 수자타는 비슈와카르만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드라에게 마음이 온통 빼앗겨 있어서, 알면서도 시선의 방향을 바꿀 힘이 없었던 거죠.
비평가: 몰라서 못 본 게 아니라, 알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KRimmer: 네. 그게 이 소설에서 가장 어리석고 감정의 진폭이 가장 컸던 인물이 수자타인 이유예요. 그래서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죠.
비평가: 그럼 이 인물을 죽 지켜보면서 저는 이런 도식을 하나 세웠습니다. 수자타의 문제는 ‘결핍‘이고, 찬드라의 문제는 ‘상실‘이다. 이 둘이 다르다고 보시나요?
KRimmer: 완전히 다르죠. 결핍은 원래 주어진 적이 없는 것에 대한 갈증이고, 상실은 가졌던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박탈감이에요. 수자타는 감정적으로 미성숙했던 겁니다. 결핍은 채워져야 치유가 돼요. 그 결핍을 비슈와카르만이 도쿄에서 채워줬고, 죄의식은 아라가 직접 용서해줬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가능해진 거예요.
비평가: 찬드라는요?
KRimmer: 찬드라는 연인 마탈리를 잃고, 친구 소하도 잃었어요. 그런데 찬드라는 기본적으로 전신(戰神)이고, 수자타와 같은 부류입니다. 다만 짝사랑만 하다가 비극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은 아니에요.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의 장군과 비밀연애를 할 만큼 대담했으니까요. 라후가 아수라 왕으로 즉위한 뒤로는 아마 전선에서 물러났을 겁니다. 비로차나처럼 조용히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쳤겠죠.
비평가: 상실은 채움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요.
KRimmer: 네. 상실에 필요한 건 애도의 시간과, 그걸 붙들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는 관조뿐이에요. 그래서 찬드라의 결말은 재회가 아니라, 여생 동안 그 상실을 잘 짊어지고 가다가 담백하게 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찬드라도 샤치처럼 니르바나에 가까운 최후를 맞았을지 몰라요.
비평가: 결핍은 경험을 통해서만 치유되고, 상실은 성찰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KRimmer: 그렇죠. 그래서 윤회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결핍은 그걸 실제로 채워보는 경험이 있어야 치유가 가능하니까요.
비평가: 그런데 이게 좀 걸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대상을 얻었다고 해서 갈애가 자동으로 소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얻은 즐거움이 오히려 다음 갈애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KRimmer: 좋은 지적이에요. 그런데 시오리와 베마, 소하가 다른 인간들과 다른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환생한 뒤에 전생 기억을 되찾아요. 오랜 기억을 모두 되찾은 후에 소박한 일상에 착지하게 되는 거죠. 우리 인간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계속 실수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소설이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건, 만약 우리가 수많은 전생의 기억을 다 기억한다면 갈애를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얘기일지도 몰라요.
비평가: 시오리가 결핍이 채워진 후에 소박한 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자기 전생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모두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KRimmer: 맞습니다. 그리고 이게 불교의 정념(正念)과도 통해요. 정념은 무상, 고, 무아를 깊이 통찰하고 잊지 않는 것, 즉 ‘바른 기억‘이거든요. 시오리나 베마, 소하에게 정념이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라면, 그들은 전생을 기억함으로써 그것들이 무상하고 고통이었으며 부질없었다는 걸 기억해내고, 소박한 일상의 행복에 뿌리내리게 되는 겁니다.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갈구하기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빨래를 널고 저녁을 준비하는 삶이—보잘것없어 보여도—화려한 궁중 생활과 신들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서사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깨달음이죠.
비평가: 마음이 진동을 멈추고 잔잔해질 때, 갈애가 희박해지고 니르바나에 가까워진다…
KRimmer: 정확히 그겁니다.
비평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소금전쟁》의 에이라가 경복궁을 거닐면서 카엘로스에게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죠. 그리고 케라니아 호수의 퀸 운디네가 다렌 케이런의 편지를 읽는 순간도요. 이게 시오리나 소하의 결말과 같은 원리인가요?
KRimmer: 같은 원리예요. 충만감은 그 순간에 완성되어 영원성을 획득하거든요. 지속되지 않고 사라지더라도, 한번 그 충만감을 맛본 사람은 압니다. 그 충만감이 늘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충만감이라고만 하면 좀 어려운데요. 비유하면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완성하던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벅찬 희열감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되실겁니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죠. 지금 죽어도 좋다, 여한 없다라는 그 감정입니다. 그걸 기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그래서 에이라는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거예요. 카엘로스와 함께 있으면서 충만감을 느낀 순간 그녀의 사랑은 이미 완성됐으니까요. 퀸 운디네는 수명이 다해 죽을 때까지 다렌의 사랑을 기억했겠죠. 그를 그리워 할지라도 외롭진 않았을겁니다.
비평가: 그런데 이 “영원성“이라는 단어, 시간이 계속 지속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거죠?
KRimmer: 네,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거나 사라지지 않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느 특정 지점에 도달했을 때 마음속 갈애가 사라지는 현상, 마음속 갈애가 완전히 융해되는 지점을 뜻하는 거예요. 그때 인간은 평화를 느끼고 자유를 느낍니다. 그 상태는 어느 방향에서 출발해서 도달했더라도 같은 상태예요. 만족, 평화, 행복. 사랑이 완성됐을 때의 그 충만감의 순간을 한번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웃으며 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비평가: 그 말씀을 들으니, 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질문에 수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삶을 웃으며 마칠 수 있을까?
KRimmer: 그리고 그 답이 천상계 궁전의 화려한 삶이나 전쟁에서의 눈부신 승리 같은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 속에 늘 있는 사랑 혹은 충만감이라는 것, 그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