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브릿G스타] * 야심한 밤. 자유게시판에 올리는 단편 하나.

분류: 수다, 글쓴이: 슬픈거북이, 6시간 전, 댓글14, 읽음: 62

1.

무대 위의 조명이 꺼졌다.
마지막 기타 리프가 공중에서 한 번 더 떨리다 사라졌다. 드럼의 잔향은 아직 천장 근처를 맴돌고 있었고, 앰프에서는 미세한 잡음이 지직거렸다.

객석은 조용했다.
박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은 환호라기보다, 방금 무언가 끝났으니 예의상 손바닥을 마주쳐야 한다는 식의 짧고 얌전한 소리였다.

심사위원석 한가운데 앉은 남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네, 잘들었습니다.”
그는 앞에 놓인 참가자 명단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종이 위를 몇 번 오갔다. 찾지 못한 듯했다.

“그룹명이랑 방금 앨범명이 뭐였죠?”

무대 중앙에 선 손이 잠시 굳었다.
검은 손목 밴드를 찬 오른손 하나가 마이크 스탠드 앞에 서 있었고, 다섯 손가락은 각자 악기를 들고 있었다. 엄지는 보컬이었다. 검지는 기타, 중지는 베이스, 약지는 키보드, 새끼손가락은 드럼이었다.

“네, 슬픈거북이 입니다. 앨범은 황금의 서사고요.”
그중 엄지가 마이크를 붙잡고 대답했다.

“네, 노래는 잘들었고요. 이름을 저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 참가자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죄송하지만, 양해를 좀 부탁드릴께요.”

“아, 네… 이해합니다. 그럼요.”

검지는 기타 넥을 붙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중지는 베이스 줄 위에 얹은 몸을 꿈틀거렸다. 약지는 눈치를 보듯 키보드 위에서 살짝 떨었고, 새끼손가락은 드럼스틱을 쥔 채 천천히 바닥을 두드렸다.

톡. 톡.

엄지가 새끼손가락 쪽을 힐끗 보자 소리가 멈췄다.

“자, 그럼 중요한게 앨범에 대한 평가인데.”
심사위원이 다시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네.”

“어, 그래요. 일단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성이 좀 불분명한거 같아요. 너무 빠르고 음역이 높아요. 샤우팅? 보컬의 목소리가 너무 커요. 과도하게.”

엄지의 마디가 움찔했다.
검지가 아주 작게 기타 줄을 긁었다. 끼잉, 하는 소리가 났다. 중지가 검지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엄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저희 락 음악인…”

“뭐라고 하셨나요?”
심사위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닙니다. 계속말씀하세요.”
엄지는 마이크를 잡은 채 잠깐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웃었다.

“뭐랄까. 가사도 좀 투박해요. 너무 박자와 멜로디에 짜맞춰 넣은 느낌? 독자가 좀 더 감성적으로 다가갈 문장이 중요한데, 이 황금의 서사라는 노래는 전반적으로 그렇지가 못해요. 서두의 멜로디는 많이 느리고 장황한데 나중은 정신없이 빨라요.”

“네.”

“흠. 그래도 음악을 포기하지는 마세요. 누구에게나 좋은 음악의 길은 열려있으니까요.”
심사위원은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조명이 더 어두워졌다.
슬픈거북이는 악기를 챙겨 무대 뒤로 내려갔다. 엄지는 마이크를 놓았고, 검지는 기타 케이스를 닫았다. 중지는 베이스를 어깨에 걸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지는 키보드 전원을 껐다. 새끼손가락은 드럼스틱 두 개를 주머니에 찔러 넣다가 하나를 떨어뜨렸다.

딱.

아무도 줍지 않았다.

잠시 후, 대기실 구석.
다섯 손가락은 둥글게 모였다.

“휴… 들었냐?”
중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요새 트랜드가 많이 바뀌었나봐.”
검지가 대답했다.

“우리가 음악을 처음해서 뭘 모르는 거 아닐까?”

“아니, 처음하는 건 하는거고 그렇다고 한번도 음악을 안들어본 건 아니잖아?”
중지가 바로 받아쳤다.

엄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컬이었던 그는 이제 리더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냥 지친 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몰라. 기본기가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이 참에 좀 더 들으면서 배워봐야지.”

“야… 근데 락음악이 뉴메탈 이후로 어떻게 이렇게 얌전해졌냐?”
약지가 고개를 들었다.

“모르지, 포크 록이나 모던 록 요즘은 그거 보다 한단계 더 잔잔한 분위기로 갔는지도.”

“야… 씨 그럼 우리는 나가리 아냐?”
새끼손가락이 불안하게 물었다.

“됐고. 일단 다른 그룹은 뭘 하는지 좀 살펴보자.”
엄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2.

대기실 구석에는 길쭉한 접이식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엄지는 그 위에 참가자 안내 책자를 펼쳤다. 검지는 볼펜을 들었고, 중지는 팔짱을 꼈다. 약지는 괜히 테이블 위를 두드렸고, 새끼손가락은 의자 위에 올라가 겨우 책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이랬어.”
엄지가 말했다.

“그래서?”
중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다른 그룹 작품들 먼저 좀 보자.”

“아니, 근데 그냥 우리 만들어 놓은 것만 그냥 부르면 땡 아냐?”

약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소한 망신은 안당해야 할 거 아냐?”

“맞네.”
새끼손가락이 작게 끄덕였다.

엄지가 책장을 넘겼다. 참가자 명단이 빽빽했다. 밴드명인지 사람 이름인지 알 수 없는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다섯 손가락은 잠시 말없이 그 목록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먼저… 전에 우리 조언 해주신 그 분. 작품부터 보는건 어때?”

“천궁?”
검지가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건 미사일이고 븅신아. 그 분은 창.궁.”

“창궁? 뭔 뜻인데?”

“푸른 하늘.”
약지가 책자 한쪽에 적힌 소개문을 읽었다.

“뭐야… 앨범 제목은 전부 암흑인데?”
새끼손가락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음악을 추구하는 거지?”

“라디오헤드 같은 그룹이네 대충 들어보니까.”

“아… 좀 어려운 음악인가 보네.”
약지가 감탄했다.

“좋아, 다른 그룹도 좀 살펴보자.”

검지가 명단을 보다가 숨을 삼켰다.

“와… 뭔 그룹이 이렇게 많냐?”

“안되겠다. 이거 다 들으면 귀 찢어질거 같으니까. 일단 그룹명부터 전부 리스트화 하고 음악은 하나씩 천천히 듣자.”
중지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내가 불러볼께 일단 받아적어봐.”
검지가 종이를 끌어왔다. 윗줄에 크게 ‘브릿G스타 참가 그룹 분석’이라고 적었다.

“OK”
새끼손가락이 볼펜을 쥐었다.

“노르바.”
엄지가 첫 번째 이름을 읽었다.

“뭔 뜻이야?”
검지가 받아 적다가 물었다.

“마녀래. 우와…”

“왜?”

“이 사람 앨범이 90개야. 미친거 같아.”

순간 테이블 위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섯 손가락은 동시에 자신들의 앨범 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검지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노르바. 마녀… 보나마나 나이트 위시 같은 북유럽 메탈 계열이네. 근데 90개? 살짝 좀 미친사람인가 보다.”

중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적었다.
노르바 – 나이트위시 계열. 앨범 많음. 위험.

“다음은?”

“난네코.”

“네코? 고양이?”
새끼손가락이 고개를 갸웃했다.

“볼 것도 없네 J-ROCK, 비주얼 록 같은 건가 보네.”
검지가 바로 답했다.

“라르크 앤 시엘, X-JAPAN같은건가? …뭐 괜찮지.”
중지도 신이 났다.

“여자라는데?”
약지가 소개문을 조금 더 읽었다.

“그럼 QWER네 QWER.”
검지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최근 발매한 앨범은 뭔데?”

“하그리아 왕국.”

“일단 킵. 이건 오늘 중으로 들어보자. 느낌 괜찮다.”

“야. 시간없으니까 이제 좀 빨리가자. 다음.”

“김줴.”
엄지가 다음 이름을 읽었다.
새끼손가락이 받아 적던 손을 멈췄다.

“김줴? 김지혜? 아님… 김제?”

약지가 고개를 저었다.
“지역명 같진 않은데? 윤도현 밴드 같은거네.”

“오케이. 다음.”

“아침은 삼겹살.”

“와… 미쳤나봐 무슨 아침부터 삼겹살을 먹어?”
중지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보나마나 반체제 인사네.”
검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다음.”

“그거 맞아?”
약지가 멈칫했다.

“같은 음식이잖아.”

“아니 그럼 마룬5일 수도 있잖아. 스매싱 펌킨즈나 아니면…”

“그냥 더 정신 나간걸로 했어.”

“시간 없다며 좀 빨리 해.”

“용복”
엄지가 다음 이름을 읽었다.

“용이 엎드린다? 드래곤 포스네. 스피드 멜로딕 메탈.”
검지는 거의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뭔가 추구하는 방향이 우리랑 맞을 거 같다. 다음.”
중지가 종이에 커다랗게 별표를 쳤다.

“드리민”

“드림시어터.”
검지가 바로 말했다.

“영원한 밤.”

“블랙 사바스.”
중지가 짧게 말했다.

“김서윤.”

“쉽다. 김종서 같은 락발라드 쪽 사람인가보다. 다음.”
약지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한결스러운.”

중지가 피식 웃었다.
“원디렉션? 보이밴드네 이거. 기생오래비. 다음은?”

새끼손가락이 다음 줄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뭐야?”

정적이 흐른 뒤.

새끼 손가락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뿡아.”

“……뭐라고?”
검지의 볼펜이 멈췄다.

“뿡아라고.”

“……”

“뿡아.”

그 순간 다섯 손가락은 모두 책자 위의 두 글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장르를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도 밴드명을 음악과 연결하지 못했다.
아무도 감히 추론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는 아침에 삼겹살을 먹는다는 이유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끌고 왔던 검지조차 침묵했다.

한참 뒤, 엄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일단… 그 밴드는 앨범 들어보기 전엔 모르겠다. 넘어가. 다음.”

약지가 다음 이름을 읽었다.
“녹차백만잔.”

중지가 의자를 박차듯 몸을 세웠다.

“녹차를 무슨 수로 백만잔을 먹어!! 다음—!!!”

3.
대기실 스피커에서는 한참 동안 다른 참가자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다섯 손가락 모두 진지하게 들었다. 검지는 목록에 별표를 치고, 약지는 앨범 제목 옆에 짧은 감상을 적었다. 중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고, 새끼손가락은 중간중간 드럼 리듬을 따라 하려다 몇 번이나 멈췄다.

곡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도 바뀌었다.

어떤 팀은 아주 조용했다.
어떤 팀은 소개글과 주석문까지 음악처럼 썼다.
어떤 팀은 장르를 들고 있었지만 장르가 장르처럼 울리지 않았다.
어떤 팀은 노래가 끝났는데도 끝난 줄 알 수 없었다.

엄지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 검지가 먼저 헤드폰을 내려놓았다.

“와… 얘네 음악들 개쩌는데?”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근데, 우리 같은 락 음악은 없잖아.”

“맞아. 우리랑 전부 달라…”

책자 위에는 별표와 동그라미, 물음표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슬픈거북이와 비슷한 표시가 붙은 팀은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이상한데? 트랜드 탓이라기엔… 우리가 여기 잘못 온 거 아니냐?”

“브릿G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공연장입니다… 맞잖아?”
엄지는 그 문장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음악을 들어보니까… 우리 잘못 온 거 맞네. 여기 사실은 브릿 팝만 공연하는데 아냐?”
검지가 잠시 표지를 보다가 말했다.

“그럼 G가 뭔데?”
중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글로벌, 그래미? 넌 G를 뭐라고 생각한 건데?”

“기타 아니면 그런지 락, 개러지 락, 글램 락…”
새끼손가락이 작게 대답했다.

“……”

“아닌가?”

“……”

“미치겠네…”
중지가 이마를 짚었다.

약지가 책자를 덮었다.
더 들어봐도 결론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잘하는 팀은 많았다. 좋은 음악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찾던 자리는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말했다.
“옆 동네로 가야하는 거 아냐?”

“어디 노베르 피아? 거긴 클럽이잖아.”
중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분위기 봐서는 거기 아닌가?”
새끼손가락이 털컥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야. 기타들고 가서 안녕하십니까.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온 뭐 그런거야? 클럽이래도 거긴 나이트가 아냐 힙합이랑 EDM인데? 장르가 달라요 장르가.”
중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븅신새끼야. 적어도 여기는 팝이니까. 악기라도 비슷하지.”

“듣는 새끼 기분 나쁘게 이것들이 진짜.”
참다 못한 새끼손가락이 드럼스틱을 휘저으며 말했다.

다섯 손가락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엄지는 스페이스 바 근처에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데?”
검지가 초조하게 엔터키를 두드리며 물었다.

“일단 앞부분 몇 장만 올려보자.”
엄지는 책자를 덮었다.

“어디에?”

“나중에 준비되면 인스타든, 페북이든, 아님 다른 플랫폼 아무 데나.”

“락밴드가 가오 떨어지게 밤무대 전단지 돌리냐?”
중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여기서 누가 우리 무대 세워줄 때까지 기다릴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나 사람들이 반응하면?”

엄지는 잠시 생각했다.

“그때 다시 부르는 거지.”

“여기 브릿G스타에?”
약지가 말했다.

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지가 쳐다보는 대기실 한쪽 벽에는 오래된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거대한 용과 영웅들의 그림이 그려진 가운데, 어느 인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걸린지 오래된 그림이었지만 거기엔 한톨의 먼지도 없었다.

조명 아래로 찬란히 빛나는 금빛.
액자 아래에는 작은 금속 명패가 붙어 있었다.

전설의 락커,

「이영도」

다섯 손가락은 잠시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 했대?”
중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몰라. 전설이니까 했겠지.”
검지가 말했다.

엄지는 기타 케이스를 들었다.

“가자.”

“어디로?”

엄지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서 아직도 다음 참가자의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음악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들어도, 락 음악은 아니었다.

엄지가 말했다.

“밖으로.”

그리고 그룹 슬픈거북이는 퇴장했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제가 플랫폼을 잘못 찾아왔나봐용 ㅋㅋㅋ.

그래도 뭐 받아주시는 분들 덕에 계속 재밌게 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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