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연재 가이드라인
목차
0. 서문
1. 핵심 재미, 주가 되는 재미
2. 메인 장르, 서브 장르
3. 에피소드별 목표 설정
4. 스케일, 비중, 그리고 분량 조절
5. 장기적인 호흡 조절
6. 무게감과 속도감 조절
7. 장면 속 인물의 수 조절
8. 각종 조절을 위한 조절
9. 자잘한 가독성 개선
10. 마치며
0. 서문
장편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은 단거리 질주가 아닌, 끝을 가늠하기 힘든 마라톤과 같습니다. 수많은 회차 동안 독자를 붙들어 두고 작가 자신도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에만 의존해서 집필하면 안 됩니다. 특히나 이야기는 가지고 있지만 장편 연재의 경험이 없는 작가라면 더더욱이요.
본 글은 그런 작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입니다. 본 가이드라인은 장편으로 쓸 이야기가 있다는 전제 하에, 핵심 재미의 설정부터 구체적인 가독성 개선까지, 쓰면서 터득하게 되지만 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헤매기 쉬운 지점들을 다룹니다.
1. 핵심 재미, 주가 되는 재미
장편 연재의 성패는 독자가 매 회차 무엇을 기대하고 작품을 클릭하게 만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주가 되는 재미’입니다. 주가 되는 재미란 작품 내에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반복되는 재미 구간이자 포인트를 말합니다.
이는 매번 똑같은 내용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틀은 유지하되 끊임없이 신선한 변주를 불어넣는 지속적인 재미, 곧 일종의 매력적인 ‘패턴’ 구축을 뜻합니다.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성장, 매력적인 악당들을 차례로 무찌르는 퇴치, 에피소드마다 들어오는 소소한 의뢰 해결, 혹은 캐릭터들의 티키타카에서 오는 일상 개그 등이 모두 해당됩니다.
주가 되는 재미는 작품의 메인 장르와 강력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특정 장르를 선택했을 때 기대하는 핵심적인 재미가 바로 이 구간에 존재합니다. 만약 작가가 이 주가 되는 재미의 끈을 놓쳐버린다면, 작품의 방향성은 급격히 흔들리고 난해해집니다. 반대로 장르적 색채가 다소 옅더라도 주가 되는 재미의 패턴이 확고하게 살아있다면, 그 패턴 자체가 작품의 독보적인 정체성으로 자리 잡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장르를 쓰고자 마음먹었다면, 내가 전해줄 수 있는 ‘변주를 통한 반복적인 재미’가 무엇인지 깊이 고찰해야 합니다.
이와 비교하여 ‘핵심 재미’는 초점에 따라 주가 되는 재미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유동적인 개념입니다. 작품 전체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핵심 재미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나 거대한 서사의 종착지에 가깝습니다. 반면 회차 단위의 미시적인 맥락에서는 주가 되는 재미의 틀 안에서 터져 나오는 뜻밖의 반전, 중요한 정보의 해금, 결정적인 개그 타이밍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주가 되는 재미가 매주 독자를 찾아오는 안정적인 ‘틀’이라면, 핵심 재미는 그 틀 속에서 독자의 마음을 정확히 관통하는 ‘좌표’와 같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 재미의 대전제는 ‘작가 본인이 그 글을 진심으로 재미있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타인이 이 글을 재미있어할지 마냥 눈치를 보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내가 느낀 재미와 흥분을 온전히 문장으로 담아내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장편 연재를 시작하는 작가의 가장 첫 번째 과제입니다.
2. 메인 장르, 서브 장르
장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맺어지는 암묵적인 계약이자 약속입니다. 독자가 SF라는 단어를 보면 과학적 발상이나 사변적인 확장을 기대하고, 호러라는 단어를 보면 가슴을 조여오는 으스스함을 기대하는 것처럼, 장르는 곧 독자로 하여금 특정한 독법을 갖추고 작품을 예측하며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특정 장르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그 장르 안에서 독자가 마땅히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중적인 장르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대를 저버리거나 비틀고 싶다면, 독자가 느낄 배신감을 상쇄할 만한 확실하고 압도적인 보상(대체 불가능한 재미)이 주어져야 합니다. 장르를 전복하거나 완전히 해체하려는 시도, 즉 장르를 배반하려는 시도는 위험합니다.
기반이 되는 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 받쳐주지 않는 장르 전복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보다, 그저 자기만족에 빠진 자아도취형 실험이나 얄팍한 홍대병으로 인식되기 십상입니다.
만약 메인 장르가 너무 거대하여 보편적인 재미 요소를 포착하기 어렵다면, 장르를 더 세부적으로 쪼개어 접근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를 들어 ‘SF’라는 거대한 장르를 스페이스 오페라, 하드 SF, 사변 소설, 포스트 아포칼립스, 대체 역사, 타임리프 등으로 세분화하는 것입니다.
장르를 쪼갤수록 독자가 원하는 재미의 과녁이 명확해집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장르의 작품들을 섭렵해야 합니다. 선배 작가들이 그 장르의 재미를 어떻게 충족시켜 왔는지 구조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내 작품을 찾아올 독자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작품의 근간이 되는 메인 장르는 뼈대이자 독법의 토대이므로 장기 연재 내내 각별히 신경 써야 합니다.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장르적 외피만을 취사선택하는 스킨입니다. 이는 장르의 깊은 규칙과 클리셰를 걷어내고 대중성을 확보하는 라이트(가벼움)와 다릅니다.
가벼운 장르란 것은 규칙을 깊게 파고들지 않되 보편적인 재미의 본질은 유지하여 누구나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덜어낸 것입니다. 반면 스킨은 표면적인 묘사나 껍데기 클리셰만을 가져와 작가가 보고 싶은 특정 외피만을 다루는 형태를 말합니다. 작품의 호흡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장르 스킨은 독법과 마찰을 일으키므로 지양해야 합니다.
3. 에피소드별 목표 설정
장편 소설은 수많은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루어집니다. 독자가 길을 잃지 않고 서사에 몰입하게 하려면,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최종 목표’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가지는 분량은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많은 단계(인과관계)를 거치는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됩니다.
소설의 전개는 대개 연쇄적인 구조를 띱니다. 최종 목표인 A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B를 해결해야 하고, B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C를 해결해야 하는 식입니다. 여기서 A가 에피소드의 메인 목표라면 B는 중간 목표, C는 구체적인 세부 목표가 됩니다.
서사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A를 달성하기 위한 하위 목표를 B-1, B-2, B-3로 쪼개고, 다시 이를 위해 C-1, C-2, C-3로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쪼개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목표를 과도하게 쪼갤수록 작품이 감당해야 할 회차와 분량의 할당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비중을 분배하기가 까다로워질 뿐만 아니라,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전개가 지지부진해지고 목표 달성의 성취감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피소드의 볼륨이 커짐에 따라 세부 목표가 다양해지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에피소드 안에 성격이 다른 주요 핵심 목표들이 여러 개 혼재하는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목표가 난립하면 중심축이 흔들려 서사가 지극히 난잡해집니다. 에피소드 하나에는 오직 하나의 최종 목표만 존재해야 하며, 인물들이 온 힘을 다해 그 목표를 성취하거나 혹은 실패함으로써 깔끔하게 종결되는 것이 좋습니다. 결말의 뒷맛이 씁쓸하거나 여운이 남는 것은 전개 자체가 난잡한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목표가 사방으로 흩어지면 무엇이 중심인지 무게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비중 분배에 실패한 하위 목표들은 독자에게 그저 불필요한 이야기, 즉 ‘시간 낭비’로 인식됩니다. 마찬가지로 에피소드의 목표 자체가 불분명한 경우에도 독자는 이야기의 진척도를 가늠할 수 없어 금세 초조해지고 막막함을 느끼며 이탈하게 됩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목표를 숨겨 독자를 미궁에 빠뜨리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가이드라인이기에 긴장감을 잘 다룰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4. 스케일, 비중, 그리고 분량 조절
스케일과 비중, 분량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사건의 스케일이 클수록, 혹은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인물이나 사건의 비중이 중요할수록 그에 요구되는 분량 역시 물리적으로 늘어나야 합니다.
특정 파트의 분량이 길다면 그 이야기가 가진 스케일이 거대하거나 작가가 부여한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으로 독자에게 받아들여집니다. 즉, 작가가 작품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복선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충분한 분량을 할애해야 합니다.
만약 작품의 모든 장면에 균일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면, 역설적으로 그 어떤 장면도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과 다름없습니다. 분량에 따른 비중 계산은 언제나 다른 회차, 다른 장면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분량이 적게 할당된 장면은 독자의 뇌리에서 자연스럽게 비중이 작은 단발적인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장르적인 기교를 발휘한다면, 이러한 독자의 심리를 역이용해 비중이 적어 보이는 가벼운 일상 회차에 결정적인 대형 복선을 슬쩍 심어두는 변칙적인 연출도 가능합니다.
사건의 스케일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분량만 할애된다면 이는 둘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디테일한 묘사와 감정선을 모두 생략한 채 결론만 다루는 날림 전개(혹은 연출)가 되거나, 세부 디테일을 전부 뭉개고 역사 교과서처럼 사건을 나열하는 거시적 전개(혹은 연출)거나. 전자는 피하는 게 좋지만 후자는 경우에 따라 의도적으로 노릴 수도 있습니다.
스케일, 비중, 분량 사이의 비례 관계는 수학 공식처럼 명확한 수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작품의 성격, 다루는 내용, 서사의 전개 속도, 세부 디테일에 따라 늘 유동적으로 변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필 과정 속에서 나만의 균형 잡힌 비례 관계를 체득하고 파악하는 일입니다.
5. 장기적인 호흡 조절
장편 연재는 매우 긴 여정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듯, 작품 역시 지속적인 환기와 변주가 필요합니다. 피폐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작품일수록 독자의 숨통을 틔워줄 환기 구간이 필요하며, 가벼운 작품이라고 해서 변주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상 개그나 가벼운 분위기를 지향하는 작품은 애초에 독자가 느끼는 피로도가 낮습니다. 따라서 굳이 긴장을 빼고 휴식하는 개념의 에피소드를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벼운 작품에서 요구되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전환하는 ‘색다른 변주’입니다. 늘 보던 유쾌한 패턴에서 벗어나 약간의 진지한 에피소드나 색다른 갈등, 혹은 평소와 다른 관계성을 보여주는 식으로 서사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변주가 필요합니다.
반면 무거운 작품은 시종일관 이어지는 진지함이 독자에게 과도한 심력 소모를 유발하므로, 독자의 숨통을 틔워줄 물리적인 ‘쉬어가는 에피소드’가 필요합니다. 다음은 무거운 작품에서 긴장을 풀기 위한 ‘쉬어가는 에피소드(혹은 장면)’을 배치하기 좋은 때입니다.
1. 독자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직전, 즉 심각하고 중대한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바로 앞
2. 휘몰아치던 거대한 사건이 일단락된 후, 상당한 분량의 에피소드가 끝난 직후
3. 여러 개의 소형 에피소드들이 쉴 틈 없이 전개된 후, 연속된 서사가 완전히 종결되었을 때
만약 이야기의 흐름상 에피소드 전체를 쉬어가는 파트로 쓰기 부담스럽다면, 에피소드란 단어를 장면으로 치환하여 에피소드 내부에 짧은 휴식 구간을 삽입하는 방식을 취하면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쉬어가는 에피소드라면 웬만해서 ‘확실하게’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휴식을 주는 구간에서조차 은근한 갈등이나 새로운 긴장을 유발하는 요소를 어설프게 집어넣으면, 독자는 일반적인 전개 에피소드를 읽을 때보다 훨씬 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긴장의 끈을 완전히 내려놓고 캐릭터들의 매력을 즐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단, 쉬어가는 에피소드가 완전히 끝나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결말부에 서사의 원동력을 이어가기 위해 새로운 긴장감이나 훅(Hook)을 부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호흡 조절은 작게는 한 문단부터 크게는 수백 회차의 전체 줄거리 배열에 이르기까지 소설 전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6. 무게감과 속도감 조절
무게감과 속도감, 두 개념은 서로 독립적인 요소이면서도 동시에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지닙니다. 무게감이란 사건이 가진 비중과 작품 전개 전체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를 가리키며, 속도감은 이야기 내에서 주요 정보나 핵심 전개가 얼마나 빠르게 풀리는가, 즉 ‘단위 분량당 정보량’에 의해 결정되는 빠르기입니다.(많을수록 빠르고, 적을수록 느립니다)
이 두 요소의 조합에 따라 작품의 인상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 무게가 가볍고 속도가 빠른 경우 (무가속빠): 사건과 갈등의 깊이가 얕고 정보가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독자가 큰 부담 없이 다음 에피소드로 빠르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독자의 뇌리에 남는 깊이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적습니다.
* 무게가 가볍고 속도가 느린 경우 (무가속느): 가볍고 소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일상적 정보나 캐릭터 묘사는 많아지지만,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가 정체되어 독자의 흥미와 긴장도가 급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 무게가 무겁고 속도가 빠른 경우 (무무속빠):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대형 사건이 엄청난 정보량과 함께 몰아치는 형태입니다. 몰입도가 최고조로 보장되는 한, 장편 소설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최고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몰입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독자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를 따라가지 못해 아예 튕겨 나가게 됩니다.
* 무게가 무겁고 속도가 느린 경우 (무무속느): 대체로 거대한 파국이나 거대한 진실을 앞두고 긴장감을 극한으로 고조시키는 구간입니다. 다만 이 구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 독자는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해하고 지치게 됩니다.
장편 연재에서 정석적인 완급 조절 시퀀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가속빠 -> 무무속느 -> 무무속빠 -> 무무속느 -> 무가속빠 -> … (이하 반복)
가벼운 사건으로 발동을 걸고, 대형 사건의 서막을 열며 긴장을 고조시킨 뒤, 클라이막스에서 정보를 대폭 해금하며 휘몰아치고, 사건이 남긴 여파를 정리하며 숨을 고른 후, 다시 다음 장을 위해 가볍게 전환하는 루틴의 반복입니다.
여기에 변주를 준다면 다음과 같은 흐름도 가능합니다.
무가속빠 -> 무무속빠 -> 무무속느 -> 무가속느 -> 무가속빠 -> … (이하 반복)
위 변주는 거대한 하이라이트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도감을 희생하고 디테일한 묘사에 공을 들이는 경우입니다.
무게감과 속도감의 조합은 이보다 훨씬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습니다. 단, 이 공식들은 각 파트가 차지하는 구체적인 분량이 반영되지 않은 순수한 흐름도입니다. 실제 파트별 분량을 배분할 때는 앞서 설명한 에피소드 목표(3번)와 비중 조절(4번), 호흡 조절(5번)를 연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을 적절하게 본인의 작품에 적용하고 자유롭게 변주해내는 감각은 수많은 글을 ‘완성해 본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7. 장면 속 인물의 수 조절
텍스트 매체인 소설은 만화나 영상처럼 시각 정보가 직관적으로 동시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독자는 문자를 읽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화면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독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유의미한 ‘시간의 지연’이 발생합니다.
이는 다른 시각 매체에 비해 소설이 ‘다수의 인물’을 한 공간에 한꺼번에 등장시켰을 때 독자가 느끼는 인지적 부담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공간 안에 수십 명의 사람이 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물들이 각자 입을 열어 발화하기 시작하거나 저마다의 행동을 묘사하기 시작하면 소설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집니다.
독자가 피로를 느끼지 않고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쾌적하게 따라갈 수 있는 한 장면 속 적정 주체의 수는 3~4명입니다. 작가의 역량에 따라 무리하면 5~6명까지는 어떻게든 난잡하지 않게 다룰 수 있으나, 등장인물이 7명을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일일이 이름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색해질 정도로 독해 피로도가 극에 달합니다. 그러므로 한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는 언제나 3~4명의 선을 유지하도록 의도적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장기 연재를 하다 보면 서사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수많은 인물을 한자리에 모아야 하는 대형 장면에서는 인물들을 개별로 다루지 말고, 성격이 비슷한 이들을 묶어 ‘그룹(집단) 단위’로 처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물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묶어내면, 한 장면에 그룹 3~4개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약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즉, 소설의 한 장면에서 다루는 ‘3~4명’이라는 숫자의 본질은 개별 인간의 수가 아니라 ‘독립적인 주체의 개수’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한 장면에 등장하는 주체의 구성이 [집단, 집단, 집단], [집단, 집단, 개인], [집단, 개인, 개인], [개인, 개인, 개인]의 형태라면 모두 가독성의 범위 내에서 성립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일단 집단 단위로 묶어서 장면 내에 등장시켰다면 그 장면 안에서 집단을 다시 개별 개인으로 쪼개어 발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국 한 장면에 등장시킨 주체의 개수를 다시 늘려 가독성을 파괴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만약 집단 안의 특정 인물을 쪼개어 부각하고 싶다면, 서술자가 ‘집단 전체’를 지칭하다가 자연스럽게 ‘쪼개진 일부’로 시선을 옮겨가는 명확한 명분과 서사적 전환 장치를 미리 구축해야 합니다.
다수의 인물과 집단을 한 장면에 밀어 넣을 때는 단순히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구분이 아니라, 그 구분을 통해 각 주체가 명확히 수행해야 할 역할과 비중이 사전에 정교하게 분배되어 있어야 합니다.
8. 각종 조절을 위한 조절
창작을 위한 온갖 이론과 기술을 익히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대전제는 ‘작가 본인이 평소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이는 플롯을 짜서 쓰는 엉덩이파인지, 즉흥적으로 쓰는 천재파인지 같은 집필 방식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출력되어 나오는 본인의 결과물이 어떤 개성과 고유의 색깔을 띠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인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글쓰기라는 예술의 영역에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법칙’이나 정량적인 ‘절댓값’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글의 모든 규칙조차도 원칙일 뿐이며, 모든 원칙은 예외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원칙을 기계적으로 사수하는 고집이 아니라, 작품의 상황에 맞춰 요리조리 ‘조절하는 감각’입니다. 원칙을 1%의 오차도 없이 절대적으로만 지키는 글은 독자에게 너무나 쉽게 간파당하며, 결국 지루한 예측이 일어나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작가는 자신만의 대략적인 ‘정석 비율’과 ‘변주 비율’을 마음속에 설정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두 가지 비율은 앞서 언급한 분량, 비중, 무게감, 속도감 등 소설의 모든 범주에 각각 적용되는 나만의 밸런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를 쓸 때마다 저울을 가져다 대듯 지나치게 의식하며 일일이 수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글의 기본값에 대한 대략적인 감각적 인식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 정석 비율: 평상시, 곧 작가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장기적으로 원고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상태의 비율을 말합니다. 무리 없이 장기 연재의 퀄리티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장기적으로 마감을 지키는 상태에서 나오는 비율이 곧 정석 비율입니다. 서사의 평탄한 진행과 빌드업 구간은 이 정석 비율 위에서 안전하게 흘러가야 합니다.
* 변주 비율: 본인이 임의로 설정한 작가적 추구미에 가깝거나 서사 속에서 진심을 발휘할 때 튀어나오는 파격적인 비율을 가리킵니다. 혹은 이와 반대로 특정 연출을 위해 평소보다 훨씬 가볍고 성기게 쓸 때의 비율도 포함됩니다. 이 변주 비율은 작품의 거대한 하이라이트가 터지는 순간이나, 장기적인 정석 비율의 유지로 인해 전개가 다소 늘어지고 지루해진다고 느껴질 때 구원투수처럼 투입합니다.
변주 비율을 머리로 계산하지 않아도 감각만으로 적재적소에 변주를 찔러 넣을 수 있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훈련을 거듭하여 어느 정도 완성의 감각을 터득하거나, 큰 기복 없이 창작의 최저 저점이 보장되기 시작하는 궤도에 오르는 경우입니다. 사실 둘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창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원칙에 집중하느라 집필의 감각이 가리키는 바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가이드라인은 절대값이 아님을 다시 강조합니다.
9. 자잘한 가독성 개선
아무리 뼈대가 훌륭하고 장대한 서사라 할지라도, 문장 자체가 읽히지 않으면 독자는 몰입할 수 없습니다. 본 가이드라인의 마지막은 이러한 가독성을 챙기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다룹니다.
작가가 글을 쓰는 집필 속도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개하는 속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양쪽의 속도는 독자가 모니터 화면을 통해 글을 읽는 속도와 다릅니다. 만약 본인이 쓴 글이 독자에게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원고를 무조건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입니다.
원고를 소리 내어 낭독할 때, 뇌내보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읽어야 합니다.
1. 첫째, 문장 중간에 온점(.)이나 반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무조건 한 호흡으로 이어서 읽을 것.
2. 둘째, 반점(,)을 만난다면 실제 호흡을 살짝 쉬고, 그 뒤를 다시 쭉 이어서 읽을 것.
3. 셋째, 온점(.)을 만나면 실제 호흡을 확실하게 끊어 쉬고, 완전히 새 숨을 들이쉰 다음에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것.
이 원칙대로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내 문장이 어디서 호흡이 꼬이는지, 어디서 독자의 숨을 가쁘게 만드는지 그 단점이 적나라하게 인지됩니다. 이 훈련을 통해 내 문장의 실제 호흡을 정확히 파악하고 교정할 수 있습니다.
가독성을 즉각적으로 올릴 수 있는 세부적인 실전 체크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만연체의 배제: 만연체를 의도하는 게 아니라면, 하나의 문장 안에 수식어구가 2개 이상이거나, 안긴문장(절)이 2개 이상 있는 문장은 모두 쳐내고 끊어야 합니다.
* 시제의 통일: 소설 서술에서 시제가 왔다 갔다 하면 장면 구성에 혼란이 생겨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일반 설명문을 제외하고, 인물의 행동과 사건을 묘사하는 모든 문장은 ‘과거형(-했다)’으로 통일하면 문장이 단조로울 순 있어도 혼란은 없습니다.
* 서술자 위치의 명확화: 시점의 주체가 되는 서술자가 지금 작품 내부에 존재하는 인물(1인칭)인지, 작품 외부에서 전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3인칭, 작가)인지 위치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서술자의 위치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제약과 정보 접근 수준이 엄연히 다르므로, 이 경계가 모호해지면 서술을 받아들이는 독해 역시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 전환의 직관적 구분: 서사 내에서 시간대가 급격히 이동하거나(플래시백 등), 큰 단위의 장면 및 시점이 완전히 전환될 때는 공백 레이아웃이나 특정 문양을 활용하여 독자가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명시적인 구분을 지어주는 것이 친절합니다.
* 연출의 일관성과 통일성: 문단 배치, 대사 연결, 시점 묘사 등 작품 내에 도입한 모든 연출은 장기 연재 내내 일관되고 통일된 형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일관된 연출은 독자로 하여금 별도의 노력 없이 그 작품만의 독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만들며, 이후 작가가 그 연출을 활용할 때 독자가 곧장 따라오게 됩니다.
* 불필요한 반점 쳐내기: 간혹 문장의 멋을 부리기 위해 문법적 활용을 벗어나 임의로 반점(,)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 빼는 편이 가독성에 좋습니다. 독자에게 이 타이밍에 쉬어 읽으라며 독법을 강요하는 어색한 모양새가 되기 때문입니다.
* 대사의 특수성 감각: 소설 속 대사는 순문과 장르의 감각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두 극단을 제외한다면 대사의 표현 범주는 대단히 폭넓게 허용됩니다. 또한 실제 인간이 현실에서 말하는 구어체와 텍스트로서 정제되어 읽히는 대사 사이에는 어느 정도 간극이 존재합니다. 말하듯 쓴다고 해서 언제나 잘 읽히는 대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만으로 모든 인물의 이름이 완벽히 구분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장면 속 인물들의 이름 서술 없이 대사만으로 핑퐁이 오가도 누가 누구인지 대략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말투의 개성과 캐릭터 고유의 색깔’을 부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대사를 한 줄 쓸 때마다 그 대사가 가진 무게감과 전개 속도, 그리고 독자가 읽을 때의 호흡 속도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어휘 활용의 안전성: 작가 본인이 평소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장악한 어휘만을 문장에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잘 모르는 단어를 사전을 보지 않고 대충 감으로 가져다 쓰면, 독자는 어색하게 뒤틀린 어휘 활용을 알아채고 몰입이 깨집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거나 뜻이 헷갈리는 단어가 있다면 반드시 사전을 활용해 정확한 사전적 정의와 용례를 확인한 뒤 원고에 올리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 기호의 표준화: 말줄임표를 사용할 때는 임의로 점을 찍지 말고 문장 부호 규칙에 맞춰 …… 형태(6점)로 깔끔하게 사용하고 뒤에 문장 온점을 찍는 등 일정한 규격을 유지합니다.
* 벽돌 문단의 지양: 지나치게 길고 빽빽하게 채워진 긴 문단(일명 벽돌 문단)은 가독성을 크게 떨어뜨리므로 적절한 호흡으로 문단을 쪼개어 여백을 주어야 합니다.
* 문장 쪼개기 줄바꿈 지양: 지나친 문단 구분을 넘어서 단일 문장까지 인위적으로 쪼개어 무분별하게 줄바꿈을 넣는 것 역시 좋지 않습니다. 소설이 추구하는 서사적 호흡과 리듬감은 행과 연의 분절을 통해 여백을 만드는 시의 리듬감과 엄연히 다릅니다.
문장을 강제로 쪼개는 줄바꿈은 소설 특유의 매끄러운 문장 연결성과 산문으로서의 몰입감을 해치고, 도리어 독법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낳습니다.
* 설명의 명분 구축: 세계관이나 캐릭터 설정을 독자에게 설명해야 할 때는 작가가 서술자로 튀어나와 일방적으로 주입하기보다, 주인공이 그 정보가 반드시 필요해지거나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등 작중에서 자연스럽게 ‘설명할 명분’을 먼저 제시한 뒤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가장 매끄럽습니다.
10. 마치며
장편 연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빈말로라도 만만하다고 말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정입니다. 장기 연재라는 여정은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를 품고 있습니다. 아무리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시작할지라도, 연재가 이어질수록 지치고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장편 연재라는 거대한 바다에 아무런 대책 없이 무턱대고 뛰어드는 일입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은 장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고 싶어 안달하지만, 그 조급함을 현명하게 다스리지 못해 결국 좌초되고 맙니다. 그렇게 미완으로 남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고, 작가 자신에게조차 상처로만 남게 되는 걸 숱하게 봤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오랜 문장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장편 연재라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상대해야 할 장 장편 연재라는 무대가 어떤 생리를 가졌는지 냉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장편 연재를 지속하기 위해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요소들을 예민하게 신경 써야 하는지, 그 판의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얼마큼의 집필 감각과 완성의 감각이 갖춰졌는지 돌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또한 장편 연재가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본인이 이야기를 언제까지 붙잡고 쓸 수 있는지, 그리고 본인의 한계가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본 가이드라인은 지피지기 중에서도 지피를 담당하고자 쓴 글입니다. 물론 이 글로 장편 연재의 모든 속성을 온전하게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본 가이드라인은 어디까지나 창작자가 숙지해둬야 할 기초적인 영역만을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는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간과하기 쉬운 영역들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본 가이드라인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무적의 치트키가 아닙니다. 본 가이드라인을 향해 보내는 절대적인 신뢰야말로, 가이드라인에게 배신당할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본 가이드라인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조그마한 나침반 정도로 여겨주시면 감사합니다. 결국 나아가기 위해선 직접 구르고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연재 속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과물의 퀄리티와 관계없이, 어떤 성취, 성과와 관계없이, 끝끝내 완성한 그 이야기는 누가 뭐라 해도 가치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가치는 지난 연재 동안 작가 개인의 희노애락이 담긴 삶의 가치입니다. 정말로 잘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끝끝내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4,263자
위 가이드라인은 약 2주 전 다른 작가님 장편 피드백을 끝마칠 무렵에 ‘이거 그냥 가이드라인을 제작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작성하기로 마음 먹고 최근에 쓰게 된 것입니다. 콘티를 먼저 작성한 뒤(약 6,400자), 제미나이에게 줄글화 맡기고 그걸 다시 퇴고한 것입니다.
위 내용은 파일로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클릭하면 다운로드할 수 있는 링크로 연결됩니다.
브릿G의 모든 장편 연재 작가님들 건필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