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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슬릿 실험과 양자역학이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이 영화를 보세요. [세계의 주인] 감상

분류: 영화, 글쓴이: 아침은삼겹살, 3시간 전, 댓글7, 읽음: 24

엄청나게 좋은 영화를 보고, 그 감상이 흩어지지 않게 모아보려고 써본 감상문입니다.

극장에서 못 본 게 후회되는 엄청난 영화였고, 현재 넷플릭스에 있으니 강력 추천 드립니다.

 

 

이중슬릿 실험과 양자역학이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이 영화를 보세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세계의 주인」을 보면서 이중슬릿 실험을 떠올렸다.

영화 보다가 양자역학을 떠올리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나도 영화관에서 공책 꺼내놓고 파동함수 붕괴를 외치는 사람은 아니고  아직도  양자역학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그랬다. 사람 하나를 똑바로 보겠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다. 정확히는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그 사람을 한 칸에 밀어 넣는다.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겪은 뒤, 내 웃음이 언제부터 괜찮아 보일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높은 확률로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뒤, 며칠의 연차가 끝나고 출근해야 했을 때 내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밝으면 이상할까. 너무 어두우면 부담스러울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차가워 보일까.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 민폐일까. 그러면 성폭력 피해자는 어떨까. 그것도 어렸을 때 당한 피해라면, 며칠이 지나야 일상으로 돌아와도 되는 걸까. 몇 달이 지나야 웃어도 되는 걸까. 몇 년이 지나야 키스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피해자답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주인이다. 이름처럼 당차고, 밝고, 자신 있다. 장난도 짓궂을 만큼 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농담을 능청스럽게 연기해서 주위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떤 때는 귀엽고, 어떤 때는 얄밉고, 어떤 때는 도무지 속을 모르겠다. 그런데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주인이 앞에 이상한 현미경이 놓인다. 그때부터 주인이의 웃음은 그냥 웃음으로 남지 않는다. 장난은 그냥 장난으로 남지 않는다. 키스는 그냥 키스로 남지 않고, 밝음도 그냥 밝음으로 남지 않는다. 왔다갔다하는 태도도 십대의 변덕으로 지나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인이의 행동을 하나씩 해석하기 시작한다. 괜찮은 척인지, 방어인지, 진심인지, 피해자인데 왜 저렇게 밝은지, 밝은 척을 하는 건지, 왜 그렇게 왔다갔다하는지 따진다. 이쯤 되면 사람 하나가 아니라 실험실 쥐다. 아니, 쥐도 억울하겠다. 쥐는 적어도 자기 표정까지 해석당하진 않을 테니까.

영화의 겉 이야기는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다. 주인이는 어릴 때 삼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가해자는 감옥에 있다. 사건은 오래전에 있었다. 그런데 오래전 일이 정말 오래전에만 남아 있느냐. 영화는 그걸 묻는다. 상처가 달력 뒤쪽으로 밀려났다고 해서, 그 상처가 사물함 안에 얌전히 접혀 있는 건 아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영화는 피해자 중심주의, 2차가해, 피해자의 주변화 같은 문제를 건드린다. 그러나 이 말들은 비슷한 다른 영화에서 이미 많이 들은 말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이 영화도 구호판이 될 수 있었다. 피해자와 연대하자는 말, 2차가해를 멈추자는 말은 맞다. 그런데 맞는 말도 너무 크게 걸어두면 현수막 냄새가 난다. 이 영화는 현수막을 안 건다. 대신 교실을 보여준다. 친구들의 눈을 보여준다. 피하는 몸짓을 보여준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굳어버리는 얼굴을 보여준다. 주인이가 중심에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주인이가 자기 이야기를 손에 쥐지 못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중간에 한 번 크게 멈췄다. 성폭력 피해자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예상한 모습이 있었다. 스킨십을 어려워할 것 같고, 사랑을 말하기 힘들 것 같고, 몸을 닫을 것 같고, 어딘가 조심스럽고 위축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주인이는 키스를 좋아한다. 장래희망으로 사랑을 써서 낸다. 엄마도 초반부터 성에 대해 꽤 개방적으로 이야기한다. 처음엔 당황했다. 그다음에는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주인이의 몸 전체를 가져가지는 못한다. 그 일이 주인이의 욕망을 압수하지 못한다. 주인이가 키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처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다 나았다는 뜻도 아니다. 그냥 주인이는 주인이다. 여기서 영화가 꽤 세게 관객을 친다. 피해자를 보호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나는 피해자에게 어떤 자세를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울어야 하고, 조심해야 하고, 성을 어려워해야 하고, 사랑을 말해도 아주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기대를 나도 갖고 있었다.

주인이는 그걸 안 한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이를 밝은 빛으로만 칠하지도 않는다. 주인이의 밝음은 형광펜이 아니다. 어두운 책장에 줄 하나 쫙 그어놓고 희망이라고 쓴다고 그게 정말 밝아 보일까.

세차장 장면이 그랬다. 영화 내내 주인이는 발랄하다. 장난치고, 키스하고, 노래하고, 짓궂게 웃는다. 그 발랄함이 쌓이고 쌓여서 반창고가 두껍게 겹쳐진다. 관객은 그게 반창고인 줄도 모르고, 그냥 주인이의 얼굴인 줄 안다. 세차장에서 그 반창고가 아주 잠시 떼어진다.

기계 소음 안에서 절규가 터진다. 주인이는 운전대에 앉은 엄마에게 얼굴만 보고도 알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 얼굴을 똑바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장면은 내가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처참하고 무서운 장면이었다. 반창고 아래 살이 얼마나 헐었는지, 카메라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앞서 보인 발랄한 전반부와의 낙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직접 보여주지 않고 표현하는 최고의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가 말없이 휴지와 물병을 건넨다. 사과가 아니다. 설명도 아니다. 해석도 아니다. 그냥 건넨다. 이게 연대다. 주인이가 어느 구멍을 지나왔는지 확인하려 들지 않고, 그냥 옆에 있는 것. 말이 많으면 또 재판정이 된다.

나는 여기서 반창고의 기능을 생각했다. 찰과상이 나면 반창고를 붙인다. 반창고가 살을 새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상처 회복의 주인공은 결국 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반창고를 붙인다. 상처가 바지에 쓸리지 않게, 먼지 묻지 않게, 누가 무심코 손대지 않게 하려고 붙인다. 가면도 그렇다. 가면은 상처를 고치지 않는다. 그래도 필요하다. 내 안쪽이 매번 바깥 공기와 남의 손에 직접 닿으면 못 산다. 주인이의 장난, 밝음, 짓궂은 연기, 왔다갔다하는 태도도 그런 반창고일 수 있다. 거짓말이라서 붙인 게 아니다. 당장 쓸리지 않으려고 붙인 거다.

그러나 반창고도 평생 붙이고 살 수는 없다. 가면도 24시간 365일 쓰고 살 수는 없다. 히어로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자신과 주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스파이더맨도, 배트맨도, 온갖 망토 입은 양반들도 다 그렇다. 그런데 어떤 히어로도 가면 쓰고 평생 밥 먹고, 잠자고, 양치질하고, 주민등록등본 떼러 가지는 않는다. 가면은 출동복이다. 싸울 때 쓰는 물건이다. 집에 오면 벗어야 한다.

그런데 주인이에게는 가면을 벗을 방이 없다. 주인이가 당한 피해가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주인이의 가면은 너무 완벽하게 작동한다. 문제는 관찰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관찰은 해석을 요구한다. 학교에서도 주인이는 해석된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해석된다. 엄마 앞에서도 해석된다. 관객 앞에서도 해석된다. 가면을 벗기려는 사람만 무서운 게 아니다. 가면을 쓴 채로 그 가면의 의미를 설명하려 드는 사람도 무섭다. 박물관 유리장 안에 사람을 세워놓고 설명문을 붙이는 꼴이다.

그러니 주인이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 하나가 아니다. 영화에서 주인이는 사과를 싫다고 말한다. 이게 참 묘했다. 과일 사과이면서, 동시에 apology의 사과가 같이 떠오른다. 사과는 참 편한 물건이다. 내밀기 쉽다. 받으면 끝난 것처럼 보인다. 사과는 어느 순간 사건종결서류가 된다. 사과했으니 받아줘야 하고, 이제 끝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력이 따라붙는다. 도장 찍고 파일철에 꽂아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는 사과를 싫다고 한다. 과일이 싫다는 말인데, 영화 안에서는 이상하게 더 크게 들린다. 주인이에게 필요한 건 사과가 아니다. 주인이가 사과를 싫어해도 옆에 남는 사람이다.

연대라는 말 조차도 이 영화 안에서는 다시 해석당한다. 비슷한 처지의 여성 피해자들이 모인 봉사 모임이 나오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우울한 얼굴로만 앉아 있는 건 아니다. 공감과 마음이 통하는 공동체겠지만, 거기에도 차이가 있다. 평소에는 웃고 떠들지만, 사소한 것으로 서로 욕하고 싸우기도 한다. 연대는 거창한 깃발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초라하고 시끄럽고 종종 우스울 수 있다. 재판정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을 도와주는 것만 연대일까. 만나면 지지고 볶고, 서로 투덜대고, 가끔 싸우면서도 옆에 있는 것까지 연대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연대는 주인이가 왔다갔다해도 도망가지 않는 일이다. 밝아도 붙어 있고, 어두워도 붙어 있고, 장난쳐도 붙어 있고, 화내도 붙어 있고, 사랑을 말해도 붙어 있고, 갑자기 밀어내도 그 자리의 온도를 완전히 식히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인이는 완전무결한 피해자인가. 이 영화는 주인이를 안전한 피해자로만 두지도 않는다. 주인이는 같은 반 친구의 어린 동생인 누리를 꼬집고 괴롭힌다. 주인이는 피해자다. 그런데 누리에게는 가해자가 된다. 이걸 영화가 피하지 않는 게 좋았다. 상처받은 사람이 자동으로 천사가 되지는 않는다. 피해를 겪었다고 해서 남에게 준 상처가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주인이가 누리에게 한 일 때문에, 주인이가 당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 행동은 엔딩에서 다시 주인이에게 되돌아온다. 마지막에 꼬마가 원장에게 그 일을 말하는 장면은 내 마음을 후벼팠다. 어른들처럼 정리된 말도 아니고, 상세한 고발도 아니다. 작고 다듬어지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작은 말이 가끔 큰말보다 깊게 박힌다. 바늘이 칼보다 아플 때가 있다. 특히 꼬집힌 자리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이를 끝까지 한 칸에 넣지 않는다. 주인이는 분명히 피해자다. 그리고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그 두 이름표로 끝나지 않는다. 밝지만 밝음으로 끝나지 않고, 상처가 있지만 상처로 끝나지 않고, 가면을 쓰지만 그 가면이 전부 거짓은 아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을 회복 교과서 마지막 장에 붙은 예쁜 스티커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시 이중슬릿 실험이다. 주인이가 어느 구멍을 지나갔는지 확인하려는 순간, 주인이는 하나의 입자가 되어버린다. 피해자, 가해자, 밝은 애, 이상한 애, 괜찮은 애, 안 괜찮은 애, 사랑을 믿는 애, 방어하는 애. 그런 식의 이름표가 붙는다. 그런데 주인이는 원래 파동처럼 퍼져 있었다. 그게 사람이다. 한 사람이 여러 상태로 동시에 있는 것. 장난과 진심이 같이 있고, 상처와 욕망이 같이 있고, 피해와 가해가 같이 있고, 밝음과 어둠이 같이 있는 것.

우리는 자꾸 방사능 물질과 고양이가 함께 담긴 상자를 열고 싶어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진심인지 장난인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밝은 건지 숨기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질문지를 구겨버린다. 사람은 객관식 문제가 아니다. 주인이는 OMR 카드가 아니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하나만 칠하라고 들이밀면, 그 순간 사람이 망가진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도 그래서 무섭다. 이주인이라는 아이가 나온다. 이름부터 주인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이는 자기 표정의 주인이 되기도 어렵다. 웃어도 남들이 가져간다. 울어도 남들이 가져간다. 장난쳐도 남들이 가져간다. 사랑을 말해도 남들이 해석한다. 사과를 싫다고 해도 남들이 의미를 붙인다.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건 늘 맨얼굴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맨얼굴로만 못 산다. 가면도 필요하고, 반창고도 필요하고, 가끔은 농담도 필요하다. 진짜 중요한 건 내가 언제 가면을 쓰고, 언제 벗고, 누구 앞에서 반창고를 떼고, 무엇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느냐다.

이 영화는 절대 밝은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두운 피해자 서사 하나로 닫히지도 않는다. 밝은 사람조차 어둡게 읽히는 영화다. 상처 입은 사람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사과 하나로 끝나지 않는 영화다. 가면을 벗으라고 소리치지 않고,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해설판을 달지 말라고 말하는 영화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이중슬릿 실험을 떠올렸다.

주인이라는 사람이 모순적인 게 아니었다.

주인이를 하나로 관찰하려는 세계가 폭력적이었을 뿐.

아침은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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