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동안 느낀 점
이번 리뷰단 활동을 하면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작품들을 접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그것들을 조금 다뤄보고 공유해볼까 해요.
의견이나 토론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자유롭게 개진해주세요. 다만 브릿G 댓글 시스템은 글자수 제한에 최대 6개까지 연속으로 표기되고 7개부터는 하루이틀 지나고 표기되기 때문에 할 말이 길어지겠다 싶으시면 아무래도 새 글을 파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1. ‘언젠가’라는 고문과 초연함
‘재야의 고수를 찾아서…’라는 큐레이션을 작성하면서 느낀 거지만, 묻히는 원석과도 같은 글들이 정말 많습니다. 브릿G 추천작, 곧 편집부가 찾아내고 발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죠. 편집부도 사람이고, 일하는 직원들이고, 직업적 소명과 프로의식이 있을지라도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독자로서 이런 작가들을 찾아냈을 때 제가 든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찾았다!와 다행이다…였죠. 전자는 원석과도 같은 재미난 글을 읽음에 대한 독자로서의 순수한 기쁨에 가깝고, 후자는 작가로서 이 글이 용케 삭제되거나 비공개되지 않고 남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입니다.
자유게시판에 홍보하고, 다른 작품에 찾아가 은근히 자기 작품도 읽어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도 좋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독자가 찾아 읽게 만드는 소설이란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작품의 질만이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죠. 물론 작가가 작품 안에서 노력할 수 있는 요소는 있습니다. 그건 조금 나중에 다뤄보기로 하고…
하지만 그렇기에, 자기 작품이 묻혔기에 비통해하고 침울해하며 글을 조용히 없애야 할까요? 비통해하거나 침울해하진 않더라도 ‘음 아무도 안 보는 글이니 없애도 문제는 없겠군’하는 것이 좋을까요. 제가 리뷰한 소설들이 이랬다면 제가 큐레이션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요.
그럼 그렇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견될 날을 기다리기 위해 희망고문을 견뎌가며 가만히 내버려둬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최소한 영영 삭제하는 건 아니니 반응이 없으면 삭제하고 다시 올리는 ‘재업’을 반복해야 할까요?
초연해진다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초연해질 수 없으니 그 불안 속에서 헤매는 것이겠죠. 그 방황이 어디에 가닿을지는 각자 저마다의 답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명쾌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특히 AI는 더더욱이요)
초연해진다는 말 대신 익숙해진다는 말은 어떨까요. 아, 이건 그래도 쉬워보입니다. 썩 괜찮은 결말처럼 보이기도 하죠. 익숙해지는 건 능동적일 수 있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죠.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익숙해지면요? 초연해지면요? 그런다고 작품의 반응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자기 자신의 환경을 재구성한다고 해서 원료가 바뀌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저 역시 초연해졌다거나, 익숙해졌다거나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하지 못하죠. 저도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글쟁이라면 평생의 과업으로서 저마다의 결론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고요.(그렇기에 많은 이가 기성 작가에게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것이겠죠)
2. 그래서 어떤 글을 읽었나?
저 역시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으로서 글을 찾아 읽을 때 재미있어 보이는 글을 찾고자 ‘선별’했고, ‘선별’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선별의 기준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어느 정도 효과 있는 선별의 기준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별에 쓰이는 재료는 4가지입니다. 장르(브릿G 시스템상의 분류), 제목, 태그, 작품 설명(로그라인). 넷은 한 박자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이중에서 비중이 가장 큰 건 역시 작품 설명, 로그라인이겠죠. 기피하거나 택한 부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장황한 설명은 전부 피했습니다. 중단편이든, 연재든 간에요. 자기소개서에 ‘저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라고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를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런 장황한 설명 대부분은 사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줄거리가 많고요. 줄거리 자체를 풀어내는 게 정말 흥미로웠다면 얘기는 달랐겠지만, 그렇게 흥미롭게 풀어낼 줄 알면 자기 작품 설명을 그렇게 장황하게 적을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로, 장르를 설명하는 것 역시 피했습니다. 브릿G 시스템에서 장르 분류가 뻔하게 있고, 이것이 온전하지 않기에 태그로도 장르 분류를 세밀하게 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 설명에까지 이 작품은 이러저러한 장르(이야기)다…라고 적는 건…… 초입부터 지치더군요.
물론 장르를 분류해놓는 건 중요합니다. 장르마다 독법이 달라지니까요. 독법이 달라진다는 건, 예측하고 기대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방향이 달라진다는 얘기고, 그렇기에 좋게 읽을 것도 실망하거나, 팔짱 끼고 볼 것도 좋게 읽을 수 있죠.
하지만 그걸 분류, 태그에 이어 작품 설명에까지 반복하는 건 둘 중 하나로 읽힙니다. 자기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없거나(해당 장르로 독해되지 않을 것이 두렵거나), 자기 작품의 독해 방식을 하나로만 규정해뒀거나. 그리고 저는 양쪽의 경우가 잘 쓰인 사례를 접한 바가 없습니다.
셋째, 한 문장, 내지는 두 문장. 짧을수록 효과적으로 끌렸습니다. 그러한 문장들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거나, 혹은 도입부의 핵심만 담은 문장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다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다 말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본인이 쓴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간결한 로그라인은 제게 있어서 “작가가 무슨 이야기인지 스스로 알기에, 그리고 그것을 독자가 읽으면 자연스레 알리라고 확신하기에” 그렇게 썼다는 일종의 신뢰로 작동했습니다.
짧은 설명을 쓴 작품이 모두 그랬던 건 아니지만, 좋은 작품들은 전부 직관적이고 한 눈에 들어오는 분량 안에 서술돼 있었습니다.
3. 다상량의 의미
제 리뷰들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제가 자주 지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연구와 분석의 부족함입니다. 반대로 칭찬하는 것중에 하나가 “본인이 뭘 잘하고 뭘 쓸 수 있는지 안다”이기도 하고요. 저는 자기가 뭘 쓰는지 아는 것을 자주 논하고, 자기가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자주 강조합니다. 저는 글쓰기의 영원한 진리이자 영원한 왕도인 ‘다독다작다상량’에서 다상량이 가리키는 게 연구와 분석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구와 분석은 단순히 배움으로써 깨닫는 영역은 아니고, 보다 실천과 실전의 영역이죠. 결론을 뭉개는 건 작가가 취할 수 있는 별로 좋은 결론은 아닙니다. 돌고 돌아서 왕도적인 진리로 귀결되는 것이라면 모를까요.(둘의 차이는 결국 본인의 연구방법론이 얼마나 다듬어졌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글쓰기는 타인에게 내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외부 피드백이 필수적이지만, 반대로 본인만의 색과 궤도를 갖추기 위해선 외부 피드백 따위 ‘일개 독자’의 반응으로 취급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의 미묘한 경계선을 어떻게 조절할까요? 어떤 독자의 말은 흘러 듣고, 어떤 독자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단순히 말의 논리정연함? 독자가 가진 어떤 권위? 비평의 정교함?
저는 거기에 ‘내적 기준치’라고 답하겠습니다. 본인이 본인의 글을 평가하고 다룰 수 있는 ‘내적 기준치’를 세우고, 그 기준치에 합당한지 먼저 스스로 판단한 후, 그것이 외부의 결과로서 얼마나 합당한지 외부 피드백을 수용함으로써 본인의 길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 그것이 작가가 갖춰야 할 ‘자가피드백 루프’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분이 제게 “자기 작품을 점검할 때 어떤 기준을 가져보면 좋을지”에 대해 일반론적인 접근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을 여기에도 공유하는 것으로 본 단락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자가피드백 루프를 확립하기 위해선 “자신이 무얼 쓰고 싶은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단순히 롤모델 수준 말고, 무엇을 쓰고 싶은지, 무엇을 다루고 싶은지, 문학인으로서 자신만의 문학관은 무엇인지, 그러한 ‘이상’을 구체적인 언어로 확립할 수 있을 만큼 잡아놔야 해요. 그래야만 그 이상을 기준치로 잡아두고 자신의 글과 비교하여서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디를 보완해야 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대략적인 감을 얻을 수 있는 거죠.
다독다작다상량 중에서 다상량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들여다보시고, 스스로를 연구하셔야 해요. 단순히 이 작품이 좋다 이런 걸 즐겨 읽었다를 넘어서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관에 부합하는 작가는 누가 있고 어떤 소설이 있는지를 알고 또 어떤 소설은 자신과 맞지 않는지 말할 수 있어야죠.
자기 감각의 지평을 날카롭게 다듬으실수록 자기 작품을 보는 객관적인 시각 역시 함양할 수 있습니다. 내적 기준치의 확립을 위해선 결국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선행돼야 하고, 그 답을 내리기 위해선 쓰는 것만큼이나 읽고 접하는 것, 그리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보단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상이 있어야 해요. 한 번 정했다고 고정시킬 필요도 없고요.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들여다보시고,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아셔야 하고,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연구하시면 그 끝에 타인과 세계를 향해 어떤 문학으로서 나아가야 할지 답을 찾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 승자 없는 경주, 완주 없는 경주
저는 글쓰기에 있어서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잘할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잘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을 냉정히 아는 것은 단순히 절필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자신이 정확히 어디로 발을 뻗어야 할지 알기 위함입니다. 부족하면 습작을 통해 보완하면 되고, 부족하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으면 되고, 부족하면 더 많이 연구해보고 분석하면 됩니다.
글쓰기는 다음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글쓰기가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즐겁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즐겁지 않다는 게 꼭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창작이란 건 내면의 것을 끌어다 쓰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란 건 썩 유쾌한 상황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룰 때보단 그 반대의 상황이 더 많죠. 원치 않은 상황들 가운데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 상황들은 때때로 외부적 요인 때문일 수 있고, 어쩌면 자기 자신이 초래한 것일 수도 있겠죠.
고통과 상처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기 몫입니다. AI나 타인이 아무리 대답해준들, 그 답을 답으로 삼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요. 답으로 삼고자 해도 깊은 내면 속 자기 자신이 거부하면,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이 답이란 게 참으로 강박적이기 쉽습니다. 마치 답을 내려야만, 명쾌하고 통쾌하며 상쾌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해소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다행인 건,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단 거죠. 창작은 답을 찾아야만 지속되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반대라면 반대입니다. 답을 찾아버린 창작은 그것으로 ‘완주’가 될 테니까요. “왜?”라는 질문은 그저 분수령일 따름입니다.(그리고 이는 절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요? 고통도, 괴로움도, 고민도, 고뇌도, 글쓰기의 막막함도, 무관심 속에 사무치는 외로움도 전부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또한 과정 중에 지나갈 것입니다. 또한 지나갔다는 것은, 그것을 넘기셨다는 뜻이기도 하죠. 살아남으셨고, 분수령을 통과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당신은 여전히 창작자이며, 조금 더 좋은 창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승자 없는 경주이고, 완주 없는 경주입니다. 영원히 달려야 함에 겁을 먹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승자도, 완주도 없는데 달려야 할 필요조차 없으니까요. 누군가가 달린다고 해서 조급함을 느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승자도 없으며 완주도 없기에 달릴 필요도 없는 경주라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 누가 감히 정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타인에게 가닿길 바라고,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범주가 어디까지이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정을 바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형태가 어떠한 것인지 말할 수 있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만들어놓은 그림자에 스스로 질겁할 뿐입니다. 형태 없는 공포는 이성으로서 분해하고 해체해야 마땅하겠죠. 자기 자신을 앎이 곧 불안과 조급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땅히 흔들리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온전히 서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괴로워하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온전히 즐거운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내와 연단으로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더욱 나은 창작자가 될 겁니다.
누가 보증하냐고요? 자기 자신이 보증인이 될 것입니다. 정진하는 삶은 그 자체가 산 증인이니까요.
야밤에 너무 긴 잡설을 늘여놓았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