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문체에 대한 생각
저는 현학적인 글쓰기를 구사합니다. 그야 뽐내지 않는 문장을 적는 것은 보고서로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아니 보고서에도 있는 체 하는 문장을 쓰는 것이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결체와 건조체를 병용해 상술한 내용들을 재진술한다면, ‘김밀세는 소설과 보고서에서 모두 화려체를 사용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에게 글을 쓰는 작업을 견인하는 원동력은 문장 쓰기 자체의 즐거움입니다. 문장 간에 낙차를 만드는 일도 꽤 재밌습니다. 다만 장면의 유미성에 함몰되어 이야기 본연의 재미를 놓치는 사고도 종종 내지요. 간결체의 장점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앞서 진술을 위해 사용했던 ‘김밀세는 소설과 보고서에서 모두 화려체를 사용한다.’라는 문장은 전보에나 어울릴 법한 단정적인 어조의 평문인데, ‘그는 어느 날 실험 보고서와 공모전에 낼 사변 소설을 바꿔 제출했다.’ 라는 간단한 설정 제시가 뒤따른다면 어느 소설의 도입부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지요.
독자는 불필요한 인지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되니 이야기의 흐름을 뒤쫓으며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기 편합니다. 게다가 건조체라고 해도 무엇에 작가가 집중하느냐에 따라 고유한 문체의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팝 아트가 앤디 워홀이라는 한 사람만의 화풍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는 기만적이고 자기분열을 겪으며 파편화된 문장으로, 또 누군가는 현대인의 비루한 감각을 절제하여 입힌 문장으로 서사를 힘 있게 전개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화려체를 쓰냐. 그야 뽐내고 싶기 때문이지요. 사회주의, 화학, 퍼즐, 언어유희,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천착 말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먼저 사회주의는 시대착오(anachroism)로서 과거에 내린 닻으로, 요즘의 문학장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사상입니다. 건조한 문장으로는 찬양이나 고발을 적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은 이미 많이 시도되었지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수용소 문학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사회주의 담론이 농담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창작물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자극받은 역사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자기반성이 결여된 작품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를 다루고 싶어서 믿지 않으면서 믿고 싶은 사상을 있는 그대로 녹여내기엔 복잡하면서 어딘가 허한 문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주의가 공기던 시절을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체요. 불가코프의 환상문학이 검열을 피할 수 없었기에 우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제 문체는 그 시절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감추면서 드러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콘크리트 건물에 궁전이란 화려함의 기표를 차용하면서, 정작 속살은 우울한 권위의 상징인 동유럽 브루탈리즘 건물들 같은 스타일을 통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지요. 물론, 이 비유는 제가 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발견했습니다.
고유하고 싶다는 욕망도 문체의 형성에 기여했는데, 제가 배운 화학이란 학문이 변화의 학문이어서 그런 면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수렴하기보다는 발산하고 싶다, 이런 느낌입니다. 정작 퍼즐은 정답이 지정되어 있어야 공정한 편이라서 역설적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동하는 글을 독자가 포착하여 자신만의 경험으로 환원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잘 진동하는 글을 마련해야 합니다. 롤랑 바르트의 쓰기 가능한 텍스트란 개념과도 공명하는 바가 있겠네요. 어쩌면 중국 가챠 게임 특유의 장황한 스토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제 두뇌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글을 재생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하여 인민의 문호 밀세씨께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를 개발하고 마음 편히 눈을 감으셨다.’
이 글과 함께 한 가상의 어느 소설을 이 정갈한 문장으로 마치지요. 부디 괜찮으시다면, 문체와 관련된 독자 제군의 경험을 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