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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사는 곳, 내가 쓴 소설 내가 코멘터리

분류: 내글홍보, 글쓴이: 박규동, 1시간 전, 읽음: 18

‘노인들이 사는 곳’

2025년 가을에 완성한 소설이다. 115,121 글자, 200자 원고지 기준 640장.

브런치와 브릿G를 통해 2025년 12월 중순쯤부터 연재했던 소설.

집필기를 풀기 전에 어떤 소설인지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노인들이 사는 곳’ 소개.

서울에서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을 목격한 후 PTSD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아버지의 고향인 시골 마을로 귀농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주인공은 마을 노인들이 숨기는 왜곡된 신앙과 그로 인한 비밀을 하나씩 밝혀내며,

점차 깊어지는 갈등과 서스펜스 속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작품은 주인공 내면의 변화와 물리적 플롯의 평행으로 주제를 더욱 강렬하게 부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본래의 영성을 잃고 원시적 기복신앙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주인공과 마을 노인들의 신앙적 충돌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농촌 사회에서 발생하는 편견과 차별, 부조리 역시 외지인의 시각에서 다층적으로 묘사했다.


소설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뭐였지?

첫 구상은 여름에 시작했던 것 같다. 오컬트, 공포, 농촌이란 테마를 입기 전 나는 혐오와 공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혐오와 공포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 답이 ‘무지’라고 결론지었다.

‘무지’라고 하면 흔히 무식이나 낮은 지능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리지만, 애초에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존재다.

당장 가장 친한 친구가 어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객체를 두려워하거나, 혐오한다. 굳이 공포와 혐오 중에 순서가 있다면 공포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길을 가던 중, 나와 아주 아주 아주 다른 사람을 마주쳤다고 상상해 보자. 얼굴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고 거대한 모자를 쓰고, 칼이 달린 신발을 신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면?

어쩌면 평행 우주, 다른 지구에서는 평범한 패션일지 모르지만 난 분명히 놀랄 것이다. 무서울 것이고, 내가 무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남자가 혐오스럽다고 느낄지 모른다.

‘내가 약자라서 두려운 게 아니라, 저렇게 기괴한 차림을 한 자들은 혐오스럽고 나쁜 놈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을 피하는 진짜 이유를 스스로 속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피어싱과 문신을 한 청년들을, 청년들은 과거의 사상과 문화에 갇힌 어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는 어렵지만 혐오는 쉽고 간편하다.

나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대표하는 존재를 ‘노인’으로 묘사했다. 나의 몸도, 나의 믿음도 결국엔 늙기 마련이다.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젊은 남자가 시골에서 겪는 일들. 극 전반에 대립하는 두 개념을 뼈대로 삼았기에 ‘노인’이라는 상징이 적절했다. 여름과 가을, 낮과 밤, 도시와 시골, 청년과 노인, 세속주의와 영성, 토박이와 외국인 등등.

심지어 첫 챕터와 마지막 챕터의 시작조차 대립되는 단어들로 배치해서 수미상관을 완성시켰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설은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해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반드시 문장이어야 하지?’

당시 Future와 Metro boomin의 앨범 ‘We don’t trust you’의 14 트랙 ‘GTA’를 듣고 있었는데, 이런 가사가 나왔다.

Drinking on syrup, work, splurge

Adderall, Perc’, Xan’, X

P90 Ruger, fully loaded TEC

단어만을 나열해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방식은 2번째 벌스에도 등장했다.

Hemi, Trackhawk, Scat Pack, dash

458 Ferrari, driving it fast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단어들만 나열해도 독자는 스스로 이를 조합해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릴 텐데, 굳이 완벽한 문장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물론 소설 전체를 단어만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면 안 되겠지만, 소설의 시작을 여는 방법으론 나쁘지 않았다.

챕터 1은 이렇게 시작한다.

뜨거운 태양. 여름. 도시. 14 : 00. 흩뿌려진 피, 비명, 소란, 사이렌, 그리고 공포.

마지막 챕터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차가운 달빛. 가을. 시골. 02:00. 무덤, 십자가, 고요, 그리고 부활.

독자들이 읽으면서 글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길 원했다.

첫 페이지의 공포와 마지막 페이지의 공포는 입장의 차이라는 간단한 개념을 통해 큰 대비를 갖는다.

첫 번째 챕터는 도심의 칼부림 사건에 대한 주인공의 악몽으로 시작했다.

‘칼을 든 광인’은 소설에 등장하는 첫 번째 외지인이다. 매일 도심에 섞여 살아가지만 도시는 그를 외지인으로 만들었다. 작품 내에서 진정한 ‘외지인’의 속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나는 이 절대적으로 ‘모르는 존재’에 대해 일절 설명하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와 빌딩에 반사되는 태양 빛과 피를 생각하며 글을 쓸 때, mamas and papas의 ‘California dreamin’을 반복해서 들으며 학살을 적어갔다.

악몽의 몽롱함, 여름의 뜨거움, 그 아지랑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방법을 이용하는데, 그 음악을 나름의 사운드 트랙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쓴다.

2024년 2월에 출판한 ‘대마왕’을 쓸 때는 Santo and Johnny의 Sleepwalk를 질릴 정도로 많이 들었다.

10만 자가 넘는 소설을 최대한 일관된 분위기로 끌어가야 하는데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내가 갖는 감정이 얼마나 다를진 나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감정선을 유지해 줄 앵커 역할로 음악을 이용했다.

‘노인들이 사는 곳’에서 악몽 장면에는 칼을 든 광인이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럴 때마다 california dreamin’을 무한 재생했다.

공포 영화, 공포 소설, 공포 드라마, 공포 게임 등 공포를 주제로 하는 매체에서 악몽이 갖는 반복되는 속성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분명히 꿈에서 두려움을 대면한다. 실존하는 현상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대립되는 두 개념, 타인을 향한 공포와 혐오, 도시와 시골, 노인이라는 콘셉트. 여기에 종교를 추가했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려 기도하지만, 그 목적이 영이 아닌 물질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영성은 물질주의와 정반대에 있는 개념 아닌가? 내게 그것은 비건 식당에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것처럼 기이해 보였다. (물론 나도 ‘그냥 돈 달라고ㅠ’하며 기도한다)

물질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경쟁이란 단어는 필수불가결하다. 경쟁은 흔해 빠진 단어가 되어 그 무서움을 잊게 되었는데. 경쟁의 본질은 분명하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패배한다는 것. 그리고 패배는 정말 거지 같다는 것!

이 소설을 쓰며 내 원고가 거절당했을 때, 역설적으로 누군가는 계약을 따내 승리했을 테니 참 좋은 일이라고, 누군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신이 나가버렸다.

인간을 향한 혐오를 숨기며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물질을 위한 기도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즉, 나는 주인공이 농촌으로 도망쳐 왔지만, 그가 쫓아가야 할 목적을 설정해야 했다.

이 부분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당장 나도, 옆집 아줌마 아저씨도, 보편적으로 쫓아야 하는 것은 간단했다.

먹고사는 일!

주인공의 직업을 번역가로 설정한 이유는, 성경의 해석이라는 소설의 종교주의적 색채와 번역을 통해 물질을 쫓는 비종교적인 모습의 대립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에게 돈을 달라고 기도해서야 되겠나, 종교인이 강도인가?

그러나 마을의 노인들(주인공이 거절하고 싶은 인간의 이미지)은 종교를 물질적 성공적으로 연결 짓는다.

단지 동네의 목사들만 잘 사는 것이 아닌, 정말로 물질을 얻어내는 기도.

그렇게 주인공의 양심은 저울에 올라간다.

기괴하게 뒤틀린 종교를 표현하기 위해 집필 과정에서 무속 음악을 많이 들었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연주하는 음악들. 나는 종교의 신비주의적 체험이 예술 창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가끔 내가 쓰고도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뮤즈와 빙의는 한 끗 차이다.

굿을 하는 부분을 적어갈 때, 나 역시 굿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무속 음악을 들으며 최대한 떠오르는 단어들을 그대로 적으려고 노력했다. 무의식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공포는 기괴함이 아닌 ‘불안’이었다. 물리적 플롯의 개연성을 보완하기 위해 주인공의 정신적 불안을 사용했다. ‘불안’은 간단하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공포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나면 나를 공포에 떠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판단조차 불가능해진다. 이렇듯 실체 없는 불안은 주인공의 영성을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는 데 쓰인 적당한 도구였다

단지 무섭거나 재밌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외지인’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공을 공포에 몰아넣은 첫 챕터의 외지인과 마지막 챕터의 외지인이 얼마나 다른지 그 얇은 차이를 보여줘야 했다.

소설 내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노인들의 차별은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이나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작성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해되지 못하는 구성원, 공포나 혐오 또는 착취의 대상인 외지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냈을 뿐이다.

후반부에는 최대한 서스펜스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다. 주인공이 집 앞에 담배 한 대를 피우러 나갈 때도 서스펜스를 담으려 했다. 영화 핼러윈의 OST인 ‘The shape stalks’를 들으며 작업했는데, 매일 서너 시간씩 공포 서스펜스 사운드트랙에 절여져 살다 보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었다.

물론 어떤 부귀영화도 얻지 못했다! ㅎㅎ;;

챕터 1, 2, 3을 지나 챕터 6의 다음은 7이 아닌 ‘챕터 66’으로, 그다음인 마지막 챕터는 ‘666’으로 달아 종교적 대미를 장식했다.

챕터 6에서 66으로 넘어가는 순간, 더 이상 현실적인 일상이 진행되지가 않는구나, 파국으로 치닫는구나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사실 소설을 완성했을 때엔 나름 자신감이 있었다. 이번엔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온갖 혼란스러운 실험적인 시도도 적었고, 기승전결에서 최대한 교과서적인 흐름을 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잔인하다는 평도 있었는데, 사실 나의 기준에선 그렇지 않았다. 나름 필요한 묘사만 사용되었다고 판단한다. 극렬한 갈등의 끝에서 ‘이 바보야’ 하며 꿀밤 한 대 쥐어박고 끝낼 수는 없는 노릇. 그저 ‘안전한 글’이 되기 위해 폭력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의 잿더미만 묘사하는 것이 과연 정직한 창작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사실 그런 부분은 각자의 입장과 취향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 잔인한 부분이 있었는데, 마지막 챕터에 나무에 매달린 인물을 열매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의 가사에서 따왔다.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원곡에서 갖는 열매의 의미와 이 소설에서 표현된 열매가 같은 개념을 갖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사는 곳에 담고자 했던 바는 명확하다. 혐오와 공포, 차별과 왜곡된 신앙, 탐욕과 착취, 그리고 트라우마와 불안. 그 모든 지옥의 군상들.

뜨거운 여름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챕터부터 차가운 가을로 끝나는 과정에 서스펜스는 즐거운 놀이기구였고, 이해의 부재를 향한 경고는 그저 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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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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