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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 글쓰기 원칙 중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분류: 수다, 글쓴이: 은빛마루, 6시간 전, 댓글1, 읽음: 33

글들이 많이 올라오길래, 저도 글을 쓸 때 캐릭터를 창조하는 원칙 중 하나인 역사적 개연성에 대하여 한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고 사학과를 나왔으니만큼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깊은 고민을 해서 써본 것이 되겠습니다.

일단 역사적 개연성이 무엇이냐 함은, 어떠한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그 사건이 대개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면 정당한 당위성이 있는가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셀프 설정 태클에 가까운 거죠.

이러한 역사적 개연성은 주로 종족 혹은 국가의 설정, 성향, 인구수 등 다양한 요인 속에서 시나리오의 큰 틀이 되는 사건을 설계할 때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가 너무 억지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고, 잘못하면 설정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거든요. 마치 호전적인 종족이라는 오크가 자기네 영토를 인간이 침략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평화 협정부터 시도한다면 유저들은 거기에서 이상함을 느낄 겁니다. 물론 오크 부족의 지도자가 힘 센 평화주의자거나, 혹은 인간 세력이 오크보다 훨씬 강하다고 하는 식으로 작품 내에서 이러한 전개에 대한 당위성을 추가한다면, 이 개연성은 해소됩니다.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한 가지 구체적인 예시를 이야기해볼게요.

(과거에 실제로 겪은 일이긴 하나, 어느 팀인지는 당연히 밝힐 수 없습니다)

-가상의 중근세풍 세계를 배경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이종족과 인간이 삽니다.

-북쪽의 A,B,C,D,E 다섯 국가는 마왕을 중심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고, 남쪽의 가,나,다,라,마 다섯 인간 국가는 서로가 상호 동맹을 맺은 상태로 인간과 이종족이 서로 대치하는 중입니다.

-이종족은 오크, 악마 등 호전적인 종족들이 많으며, 그들은 인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마왕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합니다.

-인간 연합은 서로 간 동맹을 약속하며, 마찬가지로 동맹국이 공격받으면 함께 돕고, 동맹을 깨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합심하여 배신자를 처단하기로 합니다. 또한 이들 역시 대개는 이종족을 무시하며, 그들과의 교류를 금하고 있습니다.

-인간 연합의 군사 대국인 ‘나’는 연합의 정신적 지주인 ‘가’국을 상대로 기회를 봐서 ‘가’국을 정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이든, 방해공작이든 말이죠.

이제 사건이 벌어집니다.

-A국의 ‘갑’왕은 전쟁광이라서 이종족 연합 내부에서도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갑’왕은 스토리 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NPC라 사전에 숙청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갑’왕은 마찬가지로 중요 NPC인 ‘가’국의 ‘을’왕과 적대 관계입니다.

그리고 두 왕 간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경우 역사적 개연성을 참고하기 위해 알아볼 역사는 “현대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체제“와 “중세 봉건 사회의 국가/민족 간 전쟁“입니다.

먼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체제는 미국의 동맹국이 위험에 처할 경우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것을 기조로 하고 있으며, (뒤가 구리긴 하지만)실제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이유나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이유 역시 민주주의 국가(미국의 동맹)가 공산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게 할 수 없으며,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써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걸프전 역시도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침공을 받은 것을 명분으로 하여 일어났죠.

그렇다면 중세 봉건 사회의 전쟁은 어떨까요? 중세의 유럽 국가들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 기독교인=인간으로 취급되었고,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많은 판타지물에서, 이 같은 관계는 보통 인간과 이종족의 관계로 치환되어 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중세 역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십자군 전쟁 또한 그 명분은 성지가 탈환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명분과,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이익을 위해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앞다투어 성전에 병력을 보탠 것이었죠.

여기에 더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데 현대의 미국 중심의 동맹체제를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세 초기의 동맹과 전쟁을 봅시다. 중세의 동맹은 반쯤 휴지조각이었습니다. 왕이 수시로 바뀌던 시절이 있었고, 기사들은 깡패나 다름없어서 참다못한 교회가 기사도라는 것을 만들기 전까지는 개판 그 자체였고요. 당연히 왕위나 영토를 노린 전쟁 또한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애초에 위의 전제 상황에서 인간 국가 간 내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들어가 있고요.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정보를 바탕으로 위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진 예후를 추론해 봅시다.

1. A국의 군세가 압도당해 A국이 ‘가’국한테 침공받는다.

-이렇게 되면 마왕으로써는 A국이 인간한테 침공을 받았으므로 다른 국가들을 규합해 싸워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원체 호전적인 이들이 많기도 하고, 아무리 통제하기 어렵긴 해도 규율은 예외사항을 기록하지 않는 한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중세 배경이기도 하고, 어쨌든 ‘갑’왕이 명분을 제공했음으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1-1: 함께 싸운다.

-이 경우 이종족 연합이 ‘가’국과 싸우기 때문에, ‘가’국은 압도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군사력은 약해질 것이고요. A국의 영토를 전부 회복하고 그곳에서 진군을 멈출 수는 있지만, 호전적인 종족들 사이에서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것이고, 연합 내부에서 전쟁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큰 내분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종족 연합은 당연히 불안해질 것이고, 인간 연합은 이 때를 노려 이종족을 향한 전면전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군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종족 연합과 인간 연합 간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집니다.

1-2: A국을 버린다.

-이 경우 다른 모든 국가들은 아무리 ‘갑’왕이 미치광이였다지만 자신들도 A국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갑’국의 백성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국가를 버린 왕에 대한 악감정을 품겠죠. 당연히 유대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동맹의 근간 및 마왕의 영향력이 매우 불안정해집니다. 결국 A국 출신의 잔당들 혹은 A국과 우호 관계에 있던 이들이 원인이 되어 내분이 벌어지든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가 치든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며, 이종족 연합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힘의 균형이 깨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힘의 균형이 깨지면 당연히 인간 연합이 이종족 연합을 쓸어 버리겠죠.

2. A국이 승기를 잡아 ‘가’국을 침공한다.

-이러면 인간 연합 또한 행동을 개시하겠죠, 단, ‘나’국의 경우 ‘가’국이 침공당하면 약해질 수 있고, 이러면 통수를 칠 수 있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일부러 무시하거나, 혹은 도와줄 수 있겠죠. 또한 이 경우 아래에서 설명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호전적인 이종족들은 인간을 향해 추가적인 공격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고, 마왕은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명분을 들어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아니면 평화 노선을 포기해야 하는 길을 택해야겠죠. 이 경우 위와 아래가 둘 다 개판이 될 겁니다.

2-1: ‘가’국을 도와주지 않는다.

-당연히 연합은 해체겠죠. ‘나’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남은 세 국가는 배신자에 대한 징벌을 시도할 것이지만, ‘나’국은 다른 세 국가와도 싸울 정도로 강한 국가입니다. 결국 지들끼리 싸운다가 이종족 연합군의 공격이나 약탈로 인해 인간 쪽은 개판이 되겠죠.

2-2: ‘가’국을 도와준다.

-그러면 당연히 ‘가’국은 A국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고, 여기서 진군을 멈추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국은 당연히 ‘가’국의 군세가 약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A국의 선제공격 등을 이유로 계속된 진군을 원할 것이고, 설령 진군이 멈춰지더라도 A국이나 A국의 동맹국들이 다시 힘을 길러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 기회에 A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올라와 진군을 멈추더라도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한바탕 일어날 것입니다. 계속 진군한다면야 그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거고요.

-혹은 ‘가’국을 도와준 것을 빌미로 이것저것 뜯어내며 주도권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인간 연합의 정신적 지주인 ‘가’국을 그렇게 대하는 걸 본 다른 국가들이 가만 있을 리가 만무하며, 전쟁이 벌어진 직후 바로 도와주지 않으면 결국 2-1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만약 도와주되 제대로 된 병력을 보내지 않고 대충 돕는 시늉만 하면 군사대국이 동맹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에 다른 국가들이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균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당연히 약해지는 건 ‘가’국이 아니라 자신들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도운다는 것은 선택지에 넣지도 않을 것이고요.

결론: 일단 전쟁이 벌어졌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가적인 전쟁은 못 막는다.

이게 역사적 개연성입니다. 종족 간의 배경과 성향, 역사라는 정보들이 있다면, 그 정보들을 가지고 납득이 가능한 전개를 추론해야겠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작품 내적으로의 핍진성을 추가하든지 해야겠죠. 만약 역사적 개연성을 무시하고 시나리오를 전개할 경우, 설정오류/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인디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도 겸하고 있는지라 본 글은 인디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로써 겪은 일을 말하기는 했지만, 글을 쓸 때도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은빛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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