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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해질녘

분류: 책, 글쓴이: 제오, 10시간 전, 읽음: 11

이 글이 이벤트 취지에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 적어도 후반부는. 적어도 직접은.

그 책은 아동용 공포 소설이었습니다.
어릴 때 읽고는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물건을 정리하다가 다시 발견했습니다. 196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 같았습니다. 표지는 하드커버였는데, 옛날 국민학교 교과서의 삽화 같은 수채화 그림이 사실적이고 소박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제가 요즘의 세련된 그림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잘 그린 그림일 수도 있겠죠. 문고 중 한 권은 아니고, 단독으로 출간된 것이었습니다. 앞표지에 쓰여 있는 작가와 출판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나오지 않더군요. 당시의 자료는 원래 많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이 책이 특이한 것은 뒷부분이 뜯겨 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봤을 때도 이미 그 상태였습니다. 앞부분을 다시 읽어 봤는데, 무섭다기보다는 서정적이고 아름답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딘지 쓸쓸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요. 어릴 때는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책 제목은 ‘해질녘’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진짜 이름은 아니고 제가 마음대로 지은 겁니다. 진짜 이름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부잣집 외동이었는데, 외톨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질 무렵 한 아이를 만나게 되고, 둘은 친해집니다. 아이는 저녁에만 찾아왔고, 어두워질 때까지 함께 놀았습니다. 둘이 노는 모습은 표지와 비슷한 그림체로 그려져 있었는데, 낡고 바랬는데도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바래면서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모르겠네요. 둘의 모습은 해질녘부터 어두운 밤까지 차례로 여러 장에 걸쳐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그림은 그 순간만의 독특한 색들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은 붉은색과 주황색,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는 깊은 푸른색과 별빛의 창백한 노란색, 그런 식으로요.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어쩐지 주인공 아이보다 주인공을 찾아온 아이를 더 가깝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은 찾아온 아이 쪽을 신비한 타인으로 그릴 텐데 말이죠. 그리고 그 아이는 어쩐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노골적으로 귀신처럼 그리지 않았는데도요. 한편, 주인공 아이는 한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갈 때마다 야위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행복하게 놀고 있었지만요. 결국 주인공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할 만큼 쇠약해집니다. 주인공 아이의 부모는 주인공 아이가 앓으면서 하는 헛소리를 통해 저녁마다 만나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 아이는 예전에 어떤 사건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을 때 죽은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에서 끊깁니다. 그 뒷부분은 위에서 말했듯이 뜯겨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읽다보니 낡아서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강제로 뜯어낸 것 같았습니다.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뒷부분의 내용이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인터넷도 찾아보고, 인터넷 카페 중에 옛날 콘텐츠들 동호회 쪽에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서적 경매 사이트에 책을 올려 봤습니다. 실제 팔리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작 가격은 아주 높게 매겼습니다. 그 사이트의 비슷한 연대의 비슷한 책보다 훨씬 비싸게. 뒷부분이 뜯겨나갔는데도요. 코멘트에는 뒷내용을 아는 분이 계시면 알려달라고 적었습니다.
입찰도 물품 문의도 들어오지 않다가, 기한이 거의 다 됐을 때 1:1 상담문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황당하더군요. 경매를 당장 내리라는 거였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저나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책을 없애라고도 했습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시작가의 두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그냥 입찰을 하면 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 책이 자기 근처에 오는 것도 싫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화를 끊었고, 찜찜해져서 입찰도 내렸습니다.
그 뒤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울 때 걷다 보면 뭔가 주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뭔가는 제 뒤를 쫓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몰래 감시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을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은요. 어떤 때는 뒤를 돌아봤을 때 검은 형체가 시야 한 구석에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걸 보기도 했습니다. 경매 때 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잠시 해 봤지만, 우스울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깼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이. 그리고 옆에 뭔가, 아니 누군가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누워있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주인공을 찾아온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아이의 모습은 마치 수채화로 그려진 것 같았습니다. 수채 물감 아래로 도화지가 비쳐 보이는 것처럼 아이의 뒤쪽이 흐릿하게 비쳐 보였습니다. 아이의 손에는 제가 가진 것과 같은 책이 들려 있었는데, 뒷부분이 온전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책… 읽어줄까요?”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조금 있다가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진 책에서 뜯겨나간 부분부터요.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아이는 한글을 깨우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릿느릿 조곤조곤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그 사건은 아이가 읽기에는 너무 끔찍했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는 그 정도는 아이도 읽을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건은 6.25 전후에 일어났던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나중에 찾아보면 실제 사건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부분에도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그림을 아이의 표현을 사용해서 묘사했는데, 너무 끔찍했고 아이가 그걸 보고 설명하는 것은 더 끔찍해서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학살이 아이에게 이르면서, 누가 아이를 죽였는지,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는지 밝혀집니다. 바로 주인공 아이의 부모였습니다. 두 집안은 알던 사이였는데, 주인공의 부모가 죽은 아이의 부모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주인공의 부모는 학살이 일어나는 도중에 패거리들과 함께 아이의 집에 쳐들어와 부모를 죽입니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아이는 갑자기 불안해하더니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습니다. 그리고는 “숨어야 돼요!” 라고 다급하게 말하더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는 다음날 밤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아이를 숨깁니다.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하며. 부모가 죽는 장면도 그림이 있었고, 아이는 그 장면을 설명했습니다. 끔찍한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주인공의 부모는 집안을 샅샅이 뒤졌고, 아이를 찾아냅니다. “여기서 내가 죽어요.” 아이는 자신이 들키는 그림, 그리고 죽는 그림을 담담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전날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야 돼요.” 라고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사흘째, 아이는 마지막 부분을 읽어주었습니다. 주인공의 부모는 그 뒤로 죽은 아이 부모의 재산을 가로채 부자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저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공개 매체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이름. 죽은 아이는 영혼만 남아 이승을 떠돌게 됩니다. 짙은 보라색 어둠을 배경으로 헤매는 아이의 그림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뜯겨나간 부분으로 돌아갑니다. 아이가 주인공 아이를 만나는 장면으로요. 주인공의 부모는 무당을 부릅니다. 씻김굿이라도 해서 아이의 영혼을 달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사람들을 더 죽여서 무당에게 제공하고, 무당은 그렇게 죽은 자들의 영혼을 악귀로 만들어 아이를 쫓게 합니다. 아이는 악귀들에게 끊임없이 쫓기게 되고, 주인공 아이를 찾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공 아이는 회복되고,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삽니다. 책의 마지막 그림 한 쪽에는 어둠 속에서 아이의 영혼이 원혼에게 쫓기는 것이 그려져 있고, 반대쪽에는 밝은 빛 아래 주인공 아이와 부모가 행복해 하는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와 부모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아이는 그 문구를 끝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망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숨을 몇 번 쉴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책 읽어줬으니까… 저, 나, 쟤랑 놀아도 돼요?”
“…놀다니?”
아이가 찾아온 이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던 말이었습니다.
“누구랑?”
아이는 좀 쭈뼛거리더니 한 쪽을 가리켰습니다.
“저 방에 있는 아이요.”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제 아이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돼!”
제가 그렇게 단호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돼, 안 돼!” 나는 몇 번이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놀라서 움츠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미안해.”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돼. 미안해, 미안해.” 아이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주위를 살펴봤습니다. 눈망울에 어린 슬픔을 두려움이 집어삼켰고, 아이는 후다닥 달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뒤로 아이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느끼던 어두운 그림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공포물에서는 그런 책이 어떤 방법으로든 파괴되거나 없어지지만, 저는 아직 그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뒷부분이 여전히 없는 채로. 태워버릴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 책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책일지도 모릅니다. 그 시절 책들, 특히 아동용 책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서로 빌려주어 여러 집을 돌아다니다가 낡고 헤지고 결국은 휴지, 포장지, 벽지 또는 불쏘시개로 사용되어 없어졌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귀신이나 영혼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저를 찾아온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일 리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뒷부분을 궁금해 하다가 의식 아래 어딘가에서 그 부분을 어른들의 상상으로 메꾸려다 가위 눌리고 악몽을 꾼 것이겠지요. 제 마음 속에 걸려 있는 죄책감 – 아이를 그렇게 보내버렸다는 죄책감도 스스로 만들어낸 공상의 산물에 불과할 것이고요.
그 책의 뒷부분을 직접 써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습니다. 아이에게서 들었던 – 하지만 사실은 제 무의식이 만들어 냈던 그런 끔찍한 엔딩이 아니라, 죽은 아이가 행복해지는 진짜 해피엔딩으로요. 실제 원래 내용도 그랬을지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런 엔딩을 만들어서 좋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부담을 떨쳐버리려는 저 말고는요. 그렇다고 아이에게 들었던 대로 쓸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쓰면 문제가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몇몇 부분을 모호하게 해 버리자니 비겁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비겁하다니! 애초에 그 내용이란 것이 스스로 꿈속에서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브릿G 이벤트에 간단한 요약을 올리는 것으로 끝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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