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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도와주세요. 책 읽어보신 분 찾고 있어요.

분류: 책, 글쓴이: 성찬경, 11시간 전, 댓글1, 읽음: 18

지난주에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요기라도 할 겸 24시간 카페에 갔거든요. 회사 근처에 있는 곳인데 맛은 별로지만 그 시간까지 여는 곳은 거기밖에 없어서… 간단히 커피랑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중학교 동창을 봤습니다. 그 애는 제 맞은편 끝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있었어요. 사실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고 얼굴 만으로는 그 애인지 확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애라고 생각한 건 그가 보고 있던 책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한 손에 꼿꼿이 들고 있어 표지가 다 보였기 때문에 착각일 리 없어요. 분명히 그 책이었습니다.

기억에는 ‘흉’이라는 제목이었는데요,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의 어머니가 쓴 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친구의 어머니가 작가라고 하니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제대로 된 성인이 쓴 글이었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전 읽은 책이라 내용이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마을에 살던 평범한 소녀가 잘 지내던 친구들과의 사이가 조금씩 틀어지면서 시작되는 얘기였어요. 소녀는 네 명의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특이한 건 사이가 지나치게 좋아서 모두 비슷한 머리에 비슷한 옷을 입는 걸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두 비슷하게 하고 다녔다고는 해도, 그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친구와 인기 없는 친구가 있었고 주인공인 소녀는 인기가 없는 편에 속했어요. 소녀는 가장 인기 있는 친구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사소한 거짓말로 다른 친구들을 따돌리거나 환심을 사려고 자기 거랑 같은 액세서리를 그 친구에게만 선물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점점 더 친구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다툼을 하다 실수로 가장 인기 많은 아이의 이마에 큰 상처를 내게 돼요. 좋아하던 친구의 얼굴에 너무 큰 흉이 남게 되자 소녀는 죄책감에 괴로워 하지만… 곧 그들 사이의 서열이 바뀌면서 어느새 가장 인기 있던 친구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소녀는 가장 큰 권력을 쥔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인데, 다섯 명의 아이들이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계속 서열이 변하고 그때마다 괴롭힘의 대상이 된 아이의 이마에 흉터를 새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수가 점점 늘어나서 소녀를 제외한 네 명의 이마에 비슷한 흉터가 생겼을 때 혼자만 깨끗한 얼굴을 한 소녀의 서열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때부터는 이마의 흉터보다 더 큰 흉이 필요해졌고 그전에 가치 있었던 성격이나 성적, 가정 형편, 외모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의미 없어졌어요. 단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상처 입힐 빌미만을 노리기 시작했어요.
여기서부터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점점 리미트가 해제된 것처럼 흉터를 넘어서 서로를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거든요. 정말 굴러 떨어지듯이 파국으로 치달으며 나중에는 그 대상도 당사자를 넘어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에게까지 확대돼요. 이야기의 마지막엔 아마 하나 둘 목숨을 잃거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결국 다섯 명 중 주인공 소녀 한 명만 남게 되면서 끝났던 것 같아요.

사실 몇 년 전에도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이 책을 찾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포기했거든요. 그때는 제가 뭔가 내용에 대해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들고 있던 보니 역시 존재하는 책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표지 그림도 대충 그려서 첨부합니다. 혹시 읽어보신 분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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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댓글에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당시 친구에게는 결국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지기도 했고 그 친구가 절 알아보는 것도 싫어서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오기도 전에 계산하고 도망 나왔어요. 그 여자는 제 동창이 아마도 확실할 거예요. 자세히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사실 들고 있던 책 말고도 그 친구임을 특정할 만한 특징이 있어서 알아본 게 맞습니다.

책은 어릴 때 그 친구가 빌려줘서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특별 활동의 일환으로 학기마다 친구들과 작은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도록 했는데, 그 친구는 저와 같은 독서동아리였어요. 부원은 여섯 명이었습니다. 각자 한 권의 책을 선정하고 책마다 2-3주씩 읽기로 했으니 다 읽기까지는 세네 달 정도가 걸리는 식이었는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특별활동을 진행하지 않아서 거의 학기 말이 되어서야 마지막 순서가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서가 그 친구였어요. 직접 선정한 책이 어머니가 쓰셨다는 ‘흉’이었고.

첫 주에는 아무도 그 책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근처 서점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섯 권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한 시간 후에 다들 기분 나빠 더는 못 읽겠다고 책을 돌려줬어요. 다른 책을 선정하라고 하니 그 친구는 싫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싸움이 커져 그중에서도 가장 질색하던 아이가 너도 네 엄마도 또라이라는 둥 막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갑자기 손에 커터칼을… 들고 그 아이의 이마를 노려봤던 기억이 나요. 다들 책을 다 읽진 못했어도 그 내용까지는 어떻게든 읽은 상태여서 그 모습이 정말 섬뜩했습니다. 결국 선생님까지 오셔서야 싸움은 간신히 마무리 됐습니다.

동아리의 마지막 활동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고 다음 학기가 되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독서동아리를 만들고 저랑 그 친구는 끼워주지 않았어요. 그때의 저는 조용하고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전형적인 아싸여서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애들끼리 싸우던 상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저를 그 친구랑 같은 편으로 치부한 것 같았어요. 안 그래도 별로 친하지도 않고 결도 맞지 않는 아이였으니 기회를 삼아 함께 퇴출시켜 버렸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 소문도 안 좋게 나서 그나마 저랑 말을 섞던 몇몇 친구들도 모두 등을 돌렸고 갑자기 학교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그 지경이 되니 정말로 그 친구랑 같이 다닐 수밖에 없게 됐어요.

막상 같이 다니고 나서는 나름 재밌게 잘 지냈던 것 같아요. 친구가 저한테 정말 잘해줬던 데다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한 구석이 있어서 가끔은 덩달아 특별한 아이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 책도 그때 끝까지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기분 나빠서 읽기 싫었지만 친구가 하나뿐이니 저도 맞춰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억지로 읽었어요. 책은.. 솔직히 말해서 저번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정신인 사람이 쓴 글이 아닌 데다 표현은 투박하고 내용도 비약적이었지만, 길티플레져라고 할까요? 묘하게 현실감이 있어서 유치함이 꽤 희석되는 데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물 흐르듯 진행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가 옆에서 계속 감상을 묻고 그럴싸한 해석을 곁들여줘서 더 그렇게 느꼈던 걸 수도 있어요. 그 학기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책을 두세 번 정도 반복해 읽었습니다.

반에서 왕따가 된 저희는 2학기 때 둘이서만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동아리 명은 ‘창작동아리’였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그 친구는 글을 썼어요. 친구는 언젠가 ‘흉’의 후속작을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목도 미리 정해놨다고 했고요. ‘흉’의 표지가 너무 마음에 안든다며 후속작을 내게 되면 저에게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저희들끼리 학기 내내 후속작의 내용을 고민하고 표지 그림의 도안을 그리며 보냈던 것 같아요. 친구를 만족시키고 싶어서 저답지 않게 꽤 고어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은 친구에게 ‘흉’의 후속작을 왜 어머니가 직접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더는 글을 쓰실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않았습니다. 이후에 어머님을 한 번 뵙긴 했어요…

다음 해에 저는 이사를 가게 됐고 그 친구랑 사이도 틀어져서 그 이후의 일은 몰라요. 지금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은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아무튼 아무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하시니 이제 와 생각하면 자비출판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더 자세한 내용을 요청하셔서 추가적으로 써 본 것인데 쓰다 보니 역시 꺼림칙해지네요. 이 글은 이제 신경 쓰지 마시고 책에 대해서도 잊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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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글에서 잊어달라고 했지만 염치없게도 도움이 필요해져서 다시 글을 남깁니다. 다들 제가 끝까지 얘기하지 않아 좀 답답하셨던 것 같은데 예상하신 대로 말하지 않은 얘기가 더 있습니다.

몇 해 전 ‘흉’을 찾아보려고 한 건 집에 편지? 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편지라고 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안에 내용은 없고 작은 나이프만 들어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안에 손을 넣었다가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보낸 사람도 없고 그저 악의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순간 배가 아파지면서 불현듯 그 친구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찾아봤던 겁니다. 찾지는 못했지만요.

그날 카페에서 그 친구를 알아본 건 책도 책이지만 책을 든 오른손의 소지가 한 마디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그 친구의 특징입니다.

학기 마지막쯤이 되자 친구는 학년이 바뀌어서도 우리가 같은 반이 될 수 있을지 불안해했어요. 저도 하나뿐인 친구와 떨어지는 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히 이 특이하고 예민한 친구랑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반쯤 있었어요. 그 친구와 함께 있다 보면 가끔 마음속에 사이렌이 울릴 때가 있었거든요. 정말 위험하다는 기분이. 그런 제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무렵부터 친구는 평소보다 더 자주 함께 성공한 미래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후속작 얘기를 꺼내길래 들어주기 조금 힘들어서 나보다는 어머니랑 상의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하니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방학이 되면 자기 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엄마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매번 그 소설을 쓴 어머니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조금 놀랐습니다. ‘흉’의 내용을 생각하면 꺼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어머님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궁금하기도 해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그날의 일입니다.

종업식 날 그 친구네 집에 가기로 했어요. 하교할 때가 다 되어 같이 책상 안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제가 서랍에 넣어뒀던 ‘흉’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하필 1학기 때 크게 싸운 애가 옆으로 지나가던 중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애가 ‘흉’을 보더니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저희에게 비아냥 대기 시작했습니다. 정신 나간 책을 아주 소중히 여태 보냐는 둥 끼리끼리라는 둥… 친구가 손을 꼭 쥐고 그 애를 노려보니 그 애도 조금 겁먹은 듯했지만 비아냥을 멈추지는 않았어요. 저는 또 큰 싸움이 날까 봐 얼른 책을 주워 가방에 넣고 친구에게 나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친구는 학교를 나서는 내내 말이 없더니 갑자기 저한테 두고 온 짐이 있다면서 먼저 가라고 하더군요. 교복을 갈아입고 두 시간 뒤에 집 앞에서 만나자고요. 다시 시비를 걸러 가는 길임을 예감했지만 솔직히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아서 순순히 보내줬습니다.

약속대로 얼마 후에 친구가 알려준 집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친구네 집은 처음 가보는 동네의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3층에 살았고, 어쩐 일인지 1층에도 2층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어요. 사실 동네 자체에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요. 집은 낡고 좁았지만 평범했습니다. 들어가서 바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몸이 안 좋아 주무시는 중이라고 나중에 인사하자고 했어요. 저는 긴장이 풀렸고 한동안은 친구네 집에 있는 책 구경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평범하고 재밌게 놀았습니다. 저녁쯤 되자 갑자기 닫혀있던 방 안 쪽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친구는 어머니가 깨신 것 같다며 같이 인사하러 가자고 하더군요. 방 문이 열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각오를 했는데도… 어머님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한쪽 뺨과 코는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귀도 한쪽 없었습니다. 벌린 입 안쪽에는 이가 몇 개 빠져있었고 짧게 잘려 두피가 다 드러난 머리카락은 크고 작은 상처 때문에 듬성듬성 나지 않는 듯 보였어요. 혼탁한 눈은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보고 있기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침대 끄트머리로 돌렸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다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뒤척이는 통에 이불 밖으로 한쪽 발이 드러났는데 발가락이 모두 잘려 끝이 뭉툭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본 책에서 소녀가 당한 것과 동일한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의심에 그쳤던 모든 것들이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흉’의 저자이자 주인공이었습니다.

친구는 다정하게 어머님에게 저를 소개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그때라도 도망쳤어야 했는데, 친구가 어머님을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통에 순간 안쓰러움을 느꼈어요. 거기서 도망치는 건 아프신 어머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머님은 친구가 어렸을 때 소설을 출간하신 후 얼마 안 되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뚜렷한 의식도 없이 저렇게 누워서 자리만 보전하고 계시다고요. 친구의 눈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어서, 저는 간신히 위로의 말을 꺼냈습니다. 그래서 네가 후속작을 대신 써드리고 싶은 거였구나, 하고요. 그런데 친구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를 비어있는 다세대 주택 반지하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별로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텅 빈 작은 원룸 가운데 작은 소반과 초가 놓여 있었어요. 겨울이라 몹시 춥고 캄캄했는데 반지하 방은 습기가 가득해서 그야말로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습니다. 친구는 태연히 초에 불을 붙이고 앉아서 어머니가 실패한 이유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자세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세 가지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 친구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2. 미움과 사랑을 헛갈려 쓸데없는 상처를 늘려선 안된다.

3. 진정한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대등하게 상처 입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등한 상처. 머릿속에 큰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겁을 먹어서인지 추워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거기는 반지하라 문까지 몇 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거든요. 그 계단을 뛰어오르다 넘어지거나 친구에게 잡힐 확률이 높을 것 같았습니다. 친구는 기어이 주머니에서 칼까지 꺼냈습니다. 칼 끝에는 이미 피가 묻어있었어요. 제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친구가 자기는 아까 이미 ‘확인’을 해봤다고 했어요. 누구를 미워서 상처 입히는 것에는 자신이 상처 입는 것에 대한 계산이 들어있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상대만 다치고 나는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진짜 사랑은 모든 게 부서지고 돌이킬 수 없어도 끝까지 함께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 애는 자기 오른손을 소반 위에 올려놨습니다. 제 떨리는 손에는 칼을 들려줬고요. 처음이라 무서울 테니 자기가 먼저 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울면서 못한다고 했어요. 계속… 계속 못하겠다고 했어요. 제발 보내달라고 정말 계속 못하겠다고 했는데… 친구는 칼을 든 제 손을 한 손으로 꽉 쥐고는 자기 손가락을 내리찍었습니다. 으직, 하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나요. 그 애의 길고 긴 비명소리도. 집에서 들었던 그 애의 어머님이 내던 소리랑 너무 비슷했습니다. 저는 정신이 나가 칼을 던져버리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힘겹게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제 목덜미를 애가 뒤에서 잡아당겼고 저는 뒤로 넘어졌습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제 얼굴 위를 순간 그 친구의 피투성이 손이 우악스럽게 덮어 눌렀어요. 입 안 쪽으로 미지근하고 딱딱한 뭔가가 떨어졌고 저는 그게 아까 제가 자른 그 애의 손가락인 걸 알았습니다. 손가락. 그 애는 피투성이의 남은 손가락으로 제 입 안에 들어간 손가락 조각을 목구멍 쪽으로 쑤셔 넣었습니다. 손가락이 넘어가면서 손톱이 입천장과 혀 안쪽을 긁었고 저는 저항하려 했지만 그 와중에도 손을 쓰면 붙잡혀 손가락이 잘릴까 봐 끝까지 주먹을 쥐고 몸만 비틀어대다 결국 그 애의 손가락을 삼켰습니다.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애 몸에서 힘이 빠지자 저는 온 힘을 다해 그 애의 손을 뿌리치고 정신없이 도망쳤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 손가락이 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친구가 쫓아오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어요. 그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친구가 다시 일어나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 같았거든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요. 뛰는 내내 위장으로 넘어간 손가락이 배 속에서 제 몸과 함께 흔들렸습니다. 토하고 싶은 충동과 절대 토하고 싶지 않은 충동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배 속에 그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지만 다시 그 손가락의 감촉을 식도와 혀로 느낄 자신도 없었어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처음 간 동네라 길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눈앞에 보이는 경찰서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피투성이의 저를 보고 경찰 아저씨들이 놀라서 달려 나왔습니다. 저는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아서 계속 울기만 하다 결국 기절 했던 것 같아요. 이후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후일담을 들려드리면, 그 친구의 칼에 피가 묻어있던 건 예상하신 대로 학교에서 시비를 걸었던 그 애를 칼로 그어 미워하는 마음을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 애는 목이 졸려 정신을 잃은 사이 지하 창고에 갇혔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마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고 합니다. 울면서 소리를 지르는 걸 경비아저씨가 발견해 다행히 구출되었습니다. 이마를 칼로 여러 번 그어 놨다고 들었어요. 아마 큰 흉터가 남았을 겁니다. 또 그 친구는 제가 도망친 후에 얼마간 저를 쫓아왔던 게 맞습니다.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서 그렇게 멀리까지 쫓아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애는 경찰에 붙잡혔지만 결과적으로 다친 건 제가 아닌 친구였고 제 사건보다는 다른 친구의 이마에 상처를 낸 일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 애가 학교를 계속 다녔는지, 소년원에 가거나 전학을 갔는지는 제가 먼저 전학을 갔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저는 새 학년에 올라가기 전에 먼 친척집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몇 번인가, 이사를 가기 전 그 친구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 부모님이 받아 아주 크게 화를 내며 끊어버려서 그 애가 제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필담으로나마 그 애의 손가락을 자르게 된 일을 경찰과 부모님께 말했지만 책에 대한 얘기나 손가락을 삼킨 일은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나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손가락은 결국 토해내지 못하고 배 속에서 소화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가끔 불안한 기분이 들 때면 배 속에서 손가락이 위 벽을 긁어대는 느낌이 들어요. 제 가방 안에 있던 ‘흉’은 퇴원한 후에 부모님 몰래 폐지함에 버렸습니다.

이제 왜 도움이 필요한지 말할게요. 얼마 전부터 회사 근처에서 자꾸 그 친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전에 마주쳤던 그 카페에 앉아있는 걸 봐서 그 근처로는 두 번 다시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회사 앞 육교 위에 서 있거나, 반대편 지하철 열차에 탑승하는 등 점점 더 자주, 더 가까이에서 보이고 있어요. 순식간에 사라져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왜냐하면, 어제 우편물이 또 도착했거든요. 이번엔 아주 두꺼운 서류봉투였고 안에는 몇 해 전 받았던 것과 똑같은 작은 나이프, 짧은 편지 한 장, 그리고 책 한 권이 들어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드디어 완성했다. 너는 왼손가락을 보내 줘. 앞으로도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지금도 배가 너무 아파요. 책의 제목은 ‘훼’라고 쓰여 있었고 표지에는 조악한 스케치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표지를 보고 기억이 났어요. 그건 제가 그려준 그림이고, ‘훼’는 어릴 적 그 친구가 정한 ‘흉’의 후속작 제목입니다. 사족이지만 그 친구는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오른손가락을 잘랐어요. 그러니까 오른손잡이인 제게 왼손가락을 요구한 건 그 친구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펴보지도 못했습니다. 도저히 펴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책 읽어보신 분 계실까요?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인터넷에 좀 찾아봤는데 출간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건지 아무런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요…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한 분쯤은 읽어보셨을 것 같아 도움을 청합니다. 혹시 제 얘기가 쓰여 있나요? 그렇다면 제가 명예훼손이나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할 수 있을까요? 아직 만나거나 구체적인 피해를 입은 사실은 없지만 편지에 칼이 들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협박죄로 고소하거나 접근금지 처분 등이 가능할까요? 걔가 저희 집도 회사도 아는 거 같은데 이사해야 할까요, 이대로 있으면 저 위험할까요? 제발 도와주세요. 책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저에 대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앞으로 무슨 짓을 할 계획인지도 쓰여 있나요? 혹시 저 크게 다치거나 죽나요? 아니면 그냥 손가락 하나만 잘라서 보내줘 버릴까 봐요. 그렇게 끝난다면 그게 낫잖아요. 걔도 저 때문에 손가락이 잘린 건 사실이니까요. 제발 도와주세요. 배가 너무 아파요.

성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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