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게북클럽] 목매어 기다리던 코즈믹호러 신간 리뷰
낯선 이방인이여,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지 말게.
그것은 사악과 금기로 점철된 것.
한낱 지혜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니……
한 줄 요약
금기를 넘어, 광기의 산맥을 넘어.
이 책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우선 7월 구독 이벤트로 제 작품이 걸렸었고, 그 때문에 저 역시 발품 팔아가며 홍보를 하려고 했었고, 그 과정에서 저 역시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을 구매해 읽고 단문응원과 리뷰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벤트로 1만 마일리지에 당첨됐는데, 때마침 제가 그동안 모은 마일리자와 포인트가 8천이었거든요. 그래서 황금가지 18,000원 이하 도서 1권을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즉, 제가 기왕 도서를 신청할 거 18,000원에 가까운 책을 찾자고 황금가지 도서 목록을 뒤지지 않았다면 이 책을 발견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진심이에요. 벤자민 R 발데스란 칠레 작가는 제 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고, 연도 없을 겁니다. 이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침 저도 암흑 시리즈를 쓰면서 코즈믹 호러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던 만큼, 가격도 때마침 적정한 17,000원인 만큼 좋다구나 싶어서 신청했고, 오늘 낮에 막 도착해 다 읽은 참입니다.
저는 칠레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칠레 작가인 발데스는 더더욱 모르고요. 그런데 발데스는 한국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제일 당황했던 건 주인공 설정이었어요. 1952년 칠레를 배경으로…… 한국인 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산체스 페레즈 쵸이(최), 작중에서 산체스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아버지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남미로 망명해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로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작은 신문사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타국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그럭저럭 잘 적응하던 산체스는 남극 탐험 공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칠레의 원주민인 셀크남 부족민 중 한 명이 배와 선장을 고용해 남극 탐험을 꾸리고 탐험대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죠. 산체스는 단순히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기사로 끝맺으려고 했으나, 살짝 꼬이게 됩니다. 셀크남 부족민이자 탐험대를 꾸린 가브리엘 안티만이 그에게 민간 탐험대를 취재해 그 기록을 신문사가 단독으로 다루면 큰 주목을 받지 않겠냐면서요.
“저는 제 민족에게서도 버림받아 떠나야만 했습니다. 비록 저는 그들과 분리됐지만, 제 피에 흐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문화마저 떼어놓을 순 없습니다. 저는 제 민족의 신들을 찾아나설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당당히 인정받을 것입니다!”
산체스는 안티만의 동기에 감화돼 그를 따라 남극 탐험대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산체스가 남긴 탐험일지의 서문이죠.
이 소설은 러브크래프트적 구조를 충실히 따라갑니다. 셀크남 신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신화의 공백과 이면을 코즈믹 호러적 상상력으로 메웠으며, 이는 남극 탐험이라는 극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시너지를 내게 됩니다. 동시에 남극 탐험은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충실히 따라가기도 하죠. 남극 탐험대는 셀크남의 신들이 남긴 유적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고, 탐험대는 분열하며, 안티만과 산체스는 ‘이방인’으로서 서로 다른 선택을 내리게 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발데스가 ‘이방인’인 한국인 주인공 산체스를 끊임없이 내세우면서, 그 안티테제로 동족에게 추방당한 원주민 안티만과 대립시킨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안티만에게 기존 탐험대원들은 칠레를 점령한 이방인들의 후손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들 모두는 남극의 방문자이자 이방인입니다.
작중에선 끊임없이 고향과 이방의 이항 대립을 등장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들은 끊임없이 무너집니다. 읽다보면 결국 남는 건 ‘우리 모두가 이 한없이 고독한 지구에 나타난 이방인’이라는 서늘한 진술 뿐입니다. 그렇다면 원주민은 누굴까요? 우리가 이방인이고, 우리가 원주민의 빈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라면, 언젠가 돌아올 그들은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요?
발데스는 그 답을 러브크래프티안스럽게 내놓았습니다. 발데스가 담은 코즈믹 호러는 결국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사실, 우리가 지구와 무관하단 사실,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로는 그 무엇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초기에 정석적인(그러나 한편의 음험함이 숨어있는) 탐험 소설이 어느새 의심과 불안으로, 광기와 분노로 물들게 되고, 끝내 남는 것은 지독한 허무와 이질감입니다.
그 서늘한 결말은 코즈믹 호러가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결말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제게는 이것이야말로 과연 ‘정통 코즈믹 호러’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느끼는 지점이었습니다. 코즈믹 호러의 정수는 거대한 우주적 진실 앞에, 혹은 우주의 원리와 진리 가운데 우리는 무관한 존재라는 절대적인 단절과 고독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느끼게 될 때, 발데스가 묘사하는 차디찬 남극의 바람이 제 곁을 스쳐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정말이지……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재독하고 싶어지는 소설은 아녜요. 심력이 너무 소모돼서…… 남에게 추천도 못하겠습니다. 그나마 러브크래프트보단 재미있게 썼고, 지독한 설명조가 아니기도 하고, 문체 역시 남미 문학 중에서도 건조하고 차가운 문체를 가졌습니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살이 쩍쩍 갈라지고 그 사이로 냉기가 파고드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아, 물론 몰입해서 읽었으니까 이렇게 말하지, 코즈믹 호러에 익숙하지 않고 이게 뭔 소린가 싶으면 좀…… 유치하게 읽힐 순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코즈믹 호러를 좋아하신다면, 놓쳐선 안 될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저 혼자 남극에 혼자 버려지는 느낌을 가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