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서랍장이라면
언제부턴가 소설을 쓰는 자신을 상상하면 커튼을 친 작은 방과 서랍장을 떠올리게 됐어요. 방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서랍장이라니? 하지만 그 둘의 조합은 제게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자주색의 두툼한 커튼 뒤에 창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그 밖에 비가 내리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왠지 서랍장은 그곳에 꼭 있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서랍장을 여는 일과 같이 느껴집니다. 각각의 서랍에 무엇이 보관돼 있는지는 몰라요. 서랍장 전면을 빽빽하게 채운 그 서랍들은 크기도 같고 모양도 같은데다 번호 같은 것도 매겨 있지 않거든요.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차 하는 사이 손을 물릴 수도 있고(와그작!) 한입에 집어삼켜질 수도 있겠죠(꿀꺽!).
그렇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거기에 담긴 것들은 대개 조그맣고 시시한 물건들이니까요. 보풀이 인 털모자나 귀퉁이가 접힌 노트, 뚜껑이 헐거워진 립글로스나 먹다 만 레몬 사탕이 담긴 틴케이스 같은 것들. 잃어버렸거나 써버렸거나 낡은 것들. 내가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들.
직접 서랍을 열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 서랍장은 워낙에 높고 거대하거든요. 실수라도 저질렀다가는 와르르 쏟아진 서랍들에 깔려 심각하게 다칠 수도 있어요.
더군다나 그 방에는 문이 없거든요. 문이 없는 방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아주 많은 것들이 없는 사람이에요. 눈코입이 없어서 안색을 살필 수 없고 목소리가 없어서 안부를 물을 수도 없어요.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습니다. 마치 그림자처럼요. 어쩌면 내 그림자일지 모르죠. 그 사람, 나와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그 사람을 위해 그 방에 벽난로를 들여놓도록 하겠습니다. 등받이가 푹신하고 편안한 일인용 소파도.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을 쬐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 사람은 하루 중 대부분을 두 다리를 쭉 편 채로 소파에 걸터앉아 지냅니다. 그 방은 조용해요. 간혹 벽난로에서 불티가 튀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사건이라곤 벌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일단 서랍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하면 그는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다리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원하는 만큼 길게 늘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서랍까지 힘들이지 않고 쉽게 열 수 있는 거예요. 자칫 우스워 보일 수 있을 그 행동은 아주 효율적이고 우아하답니다.
그 사람은 가득 차 터져 나가기 직전인 서랍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다섯 개의 손가락은 무척 힘이 셀 뿐더러 또 섬세하기 때문에 안에 든 물건이 얼마나 무겁고 각지고 매끄럽고 얇고 나풀거리든지 간에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꺼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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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 제 용건입니다. 사실 최근에 낸 연작소설집에 실을 에세이로 바로 이 서랍장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그때는 왠지 이 장면에 수긍할 수 없더라고요. 대신 연필에 대해 썼습니다. 누군가의 꿈속을 넘나드는 연필에 대해.
서랍장에 대해서는 다른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든 쓰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게 오늘 이 자리가 됐네요. 맨 처음 구상했을 때는 그 방에 책상도 있고 문도 있고 나도 있었는데 그것들을 모두 덜어낸 게 유효했던 것 같아요. 지금 이 글에는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까지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 방도 서랍장도 에세이도 모두 핑계일 뿐이고 단순히 안부 인사를 남기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세요?
그 방의 서랍장은 때때로 달그락거리나요?
모두의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