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미담이 있어도 이 계절이 추운 까닭은

분류: 수다, 글쓴이: Izedokia, 22년 12월, 댓글1, 읽음: 99

극지방 제트 기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한파가 찾아왔다. 북극의 추위는 문명의 온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매서운 기세로 몰아쳤고, 필자는 온몸으로 그 편린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이번 겨울은 춥겠구나.’ 싶었다. 전쟁의 여파로 제주 감귤 수출이 부진하다는데, 러시아로 가지 못한 귤을 나라도 까먹으며 은근슬쩍 인상된 난방을 미적지근하게 지져볼까 싶다가도, 문득 세상이 그리 편안하지는 않구나 싶어 마음이 불편하다. 기름값‧우윳값은 왜 그렇게 많이 올랐는지, 21세기에도 절멸되지 않은 독재에 밀 생산까지 피해를 봐야 했는지, 또 노동자의 눈물로 얼룩진 제품을 파는 기업은 왜 이리도 많은지…….

시민의 필요와 정치 공학이 맞물리지 않는 상황 ― 경제동물적 발상(오가와 하루히사 『조선실학과 일본』 부론에 실린 표현인데, 필자는 지금도 이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이 강제되는 생태계 속에 질문은 많고 답은 부족하다. 커피가 없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 뇌가 이때쯤 커피를 내리라고 말하지만, 요즘은 원두 공급도 일정하지 않아 원하는 걸 찾기가 어렵다. 무어라 할까, 참으로 숨쉬기 힘든 한 해다. 지금 이 문단을 쓰는 중에도, 가볍게 산화된 커피의 산미와 타닌의 찌르는 맛이 감돈다. 근래의 일상은 전혀 안온하지 못하다.

이럴 땐 반려동물의 폭신한 앞발이나 뜨거운 국물을 아무 걱정도 없이 호로록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진다. 훈훈한 영상 미디어에는 현실 인식으로부터 오는 날카로운 통각을 모르페우스의 축복처럼 ― 혹은 저주처럼 ― 마비시키는 기능이 있다. 혹은 인간적인 미담도 진열대 한자리를 꿰차고 있을 것이다. “미담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역사적 믿음이 존재한다. 주류 이념이나 예법을 수호하는 이들에게 비석을 세워주고는 했던 옛날을 생각하면, 이러한 경향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미담 처방’도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쓰다 보니 신물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 그런데 어쩌면 옛날에도 종종 그랬을지도? ― 미담은 들어도 별로 마음이 따듯하지 않다. 최근에는 미담의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잔인한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 잦다. 소위 “미담”이라는 것의 실제 현장으로 들어가 그 부조리극 속의 무력한 개인으로서 서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미루어 둔 글이 많아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고, 너무 자세한 묘사를 하면 당사자 신상을 유추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가능한 간단한 묘사만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사고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맥락상의 결손이 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기를.

 

미역국에 쓸 국거리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손에 걸고 집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취객 한 명이 몸을 가누지 못해 후두부를 다칠 위험에 처해 있었고, 그의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를 홀로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가던 필자와 다른 행인이 그를 부축해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딱 봐도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지남력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자력으로 자택에 복귀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필자와 행인은 그가 다치지 않도록 곁을 지키다 인계를 끝내고 제 갈 길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보니 신발 자국이 난 옷과 어설피 녹은 아이스크림이 보였다. 흰옷에 난 얼룩을 문지르는 동안, 필자는 술내음과 추위가 얽혀 뒤죽박죽인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취객의 지인과 악수할 때의 감각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당혹스럽고 정신없이 흘러간 사건이었다. 그의 지인은 한사코 연락처를 달라며 감사를 표했고, 이 일을 미담으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무엇이 미담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취로 인한 지남력 저하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치가 미숙했다. 필자는 그의 안전 귀가를 확인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시민이 세 명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문제를 돕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부축만으로도 두 사람이 필요했고, 그를 달래는 데는 세 명으로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씁쓸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길 때였다. 자신이 항상 취한 채로 지내는 사람은 아니라며 두어 번 강조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그의 말이 맞다. 이 사회의 가장 차가운 변두리에 주저앉은 이들조차 매일 취해서 지낼 수는 없다. 그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있는 광경이 있을 뿐이다. 3S 정책 이후의 한국에서 술의 음울한 상징들을 발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의 거친 언어, 눈에 서린 불신, 그리고 못다 감춘 부끄러움이 어떤 사회적 맥락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취했는지, 어째서 술을 마셔야 했는지, 술이라는 게 어쩌다 그런 수단이 되었는지를 묻지 않는 사회. 그런 배경을 두고 취객을 외견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 그 모습은 개인 책임만이 아닌, 이 사회가 지닌 문제의 단편이기도 했다. 필자는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을 되뇌었다. ‘어떻게 제가 감히 당신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누가 당신을 겉모습만으로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한국은 복지 사각지대, 노동자 권익 침해, 알코올 중독, 성차별, 인종차별, 노인 소외, 그 외 셀 수 없는 다양한 현안에서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열거한 문제는 시민 개개인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기대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며, 사회 체계의 기능적인 구축과 변화에 의해서만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사람들이 직시하는 걸 누군가 바라지 않을 때, 미담은 악의 없어 보이는 불청객처럼 다가와 사실과 우리 사이에 개입한다.

미담은 우리 사회의 미숙한 면을 가리는 장막으로, 우연히 발생한 선의로 사회적 문제를 메꿀 수 있다는 도시형 전설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근원과 실체가 모호한 도덕성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회 생태학적 프로파간다이고, 인간성의 고고한 성채가 이미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변화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자유 지상주의의 토대이다. 복잡한 역학 때문에 마치 외계에서 온 대량의 난민이나 어둠 속에 도사린 형체 없는 괴물처럼 추상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이 적용되지만, 닫힌 눈꺼풀 너머의 실체를 확인하고 나면 그저 헐벗은 인간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문제들 ― 시민이 종종 눈을 돌리고 싶어 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있어 미담은 강력한 아편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개인의 능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으며, 개별자의 자율과 성정이 사회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진통 처방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시민이 언제나 공동체의 능동적인 일원이 아니라 때로는 방관자이고 무력한 존재이며, 위인이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비정규적 존재의 특성이 일반 대중에게서 항상 발휘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비록 선행이 위치에 상관없이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확률과 조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러한 신화는 충분한 수준의 인구 밀집과 기반시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문명의 첫 증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만오천 년 전 인간의 접골된 넓적다리뼈’라고 대답했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의 주장에 깊이 공감한다. 그것은 사회가 동료를 돌봄으로써 탄생했다는 수사법이며, 문명사회의 의의가 ‘그 어떤 구성원도 저버리지 않음’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만일 사회를 유기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의 일차 원칙은 구성원을 유지‧증가시키는 것이고, 이에 따라 이차 원칙은 도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연인을 공동체의 힘으로 포용하여 유기체에 합류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감히 주장하건대, 사회의 존립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척도는 그것이 구성원을 얼마나 섬세하게 돌보는가에 있다.

상술한 척도를 기준으로 2022년의 한국을 평가하자면, 전통적 미신과 시장의 관성만으로 접합을 유지하는 가운데 유기체가 여전히 분열하지 않은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질병을 발견하기 위해 이전보다 많은 의료비를 부담하게 될 예정이고, 그럼에도 고용 유지에 필요한 정책 지원은 이전만 못 하게 될 것이다. 품귀로 인해 연탄을 빌려 쓰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난방비는 4년간 인상될 것이고, 전기료 역시 예고된 대로 같은 기조로 흐르게 된다. 무어라 할까, 이번 한국의 겨울은 유달리 춥다.

성탄절마다 연탄 봉사의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기사가 많더니, 올해는 그런 종류의 미담이 적다고 오히려 불평까지 늘어놓는 실정이다. 그런 추위 속에 번화가에는 구세군 종소리가 울리고, 그 옆의 불이 번뜩이는 가게에서는 사람의 못다 쉰 숨이 남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팔고 있다. 매스미디어에는 음식과 술, 그리고 선물의 환상이 전시되어 있다. “먹고 취해라.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리라. 조용히 살아라. 자유 시장이 알아서 필요한 걸 줄 테니.” 복음적인 이미지가 적록이 자아내는 보색 대비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지럽게 맴돈다.

‘그런 세상에서 쓰러지면 누가 일으켜주기는 할까?’ 그런 의문을 가질수록 오히려 정신만 번쩍 드는 것 같다. 한심하다고 욕을 먹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확률이, 아니, 그 자리의 영원한 전시물로 방치될 확률이 차라리 높을 것이다. 부러진 다리가 접골되지 못한 채 굳어버린 현대 사회의 화석으로 말이다.

 

우연한 선의가 시민을 구한다는 구조의 미담은 ‘행동 모방’ 외에 어떠한 사회적인 이익도 생산할 수 없다. 참람히 글쟁이를 자처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러한 구성의 도시형 전설은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문인들이 감히 남발하지 말아야 할 글이다. 비록 여러 소주제와 단어로 난잡하게 엮은 글이지만, 텍스트의 사막을 오가는 순례자가 필자가 세운 표목의 의미를 잘 헤아리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의 끝으로 걸음 하는 동안 성탄절의 전야가 지나갔다. 전야(Eve)라 하니, 슬라브 문화에는 선조들의 밤(Dziady, Forefather’s Eve)이라는 휴일이 있다는 게 떠오른다. (Dziady는 폴란드 시인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작품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 온기를 더하고자 했던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들과 접할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지금의 현상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필자는 궁금하다. 여러 시민의 노력으로 반세기에 걸쳐 지핀 불이, 말장난과 소극이 부른 핌불베트르에 의해 단 1년 만에 사그라들었을 때, 열사였던 우리 사회의 선배들은 무어라 말할 것인가?

전혀 따듯하지 않은 이 겨울에, 대답은 없고 허공에 입김만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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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자유게시판에 이런 걸 올려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홀린 것처럼 끄적이기는 했는데 어디 게시할 곳은 없고, 그렇다고 묵혀 두자니 아깝고, 그래서 하나의 “수다”로 여기에 올려봅니다. 다소 민감한 사회적 담론도 포함하고 있어, 제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정책에 위배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는 합니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규칙에 명시된 대로 비공개 처리나 삭제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여러분께 기쁨과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

Izedo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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