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취향 (+[13.67]에 대한 리뷰)
아래 stelo님이 쓰신 글을 읽고 보니 문득 작년에 읽은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찬호께이가 쓴 [13.67]이라는 본격추리물인데요. 좋은 작품이었고, 실제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유명 작품입니다.
저는 사실 본격추리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한때는 코난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앨러리퀸, 반다인 등 고전 추리작가들을 탐독하기도 했지만요. 아야츠지 유키토나 시마다 소지 등을 찾아 읽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본격은 손이 잘 안가더라고요.
30대가 된 이후로는 취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어요. 플롯이 정교하거나 대사가 생생한 작가들이 좋더라고요. 고전 하드보일드 추리물과 첩보물도 좋아하고요. CSI스타일의 경찰소설도 가끔 봅니다. 독서 취향이 영미권 장르물로 굳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국 추리문학계엔 역시 본격추리를 쓰시는 작가분들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양한 스타일이 있어야 장르문학 생태계가 건전해지니까요. 아무쪼록 브릿지에서도 본격 추리물을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개인 블로그를 뒤지다보니 그때 쓴 독서일지(?)가 남아있어 자유게시판에 올려봅니다. [13.67]에 대한 리뷰인데, 제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니 재미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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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홍콩 작가가 쓴 본격 추리소설이자 경찰소설. 작년에 국내에서도 호평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직접 읽어보니, 본격 추리물로는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난 작품이었다. 찬호께이는 시마다 소지상을 수상한 작가다. 게다가 시마다 소지 본인에게 재능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적었던 방식 그대로 이 소설을 리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향력이 있는 리뷰어도 아닐 뿐더러, 사실은 그리 좋은 리뷰를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읽은 책들을 잊지 않도록 기록할 뿐. 그러니 좀 더 주관적인 입장에서 내 생각을 적어보겠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나는 원래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본격 추리물에 줄곧 등장하는 기발한 트릭들이 싫다. 굳이 그 이유를 대자면, 수수께끼 풀이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풀 수 없는 문제를 내기 위해 골몰한’ 작품들을 보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추리소설은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작가와 독자들이 이 대전제에 동의해왔다. 그런데 이 ‘공정성’에 대한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에는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꽤나 높은 편이다. 단순히 독자 몰래 복선을 잘 뿌려뒀다가 막판에 허둥지둥 쓸어 담는 것은, 내가 봤을 때는 중대한 반칙이다. 오직 수수께끼를 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소한 단서들을 한두 줄 던져 놓고는, 통수를 치고 난 다음에 “진정한 탐정은 사소한 것조차 놓쳐선 안돼.” 따위의 말로 낄낄대는 거, 난 그게 사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독자를 초대해 놓고 달리기 시합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난이도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독자가 작가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함께 풀어나가는 추리물이 좋다. (매니아들 관점에서 보면 나야말로 초딩수준의 취향을 가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둘째. 나는 안락의자 탐정, 빼어난 두뇌를 무기로 하는 천재 탐정을 싫어한다.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봤을 때, 계획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단 한 번도 계획대로 일이 풀린 적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늘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계획을 세우면서 그게 완전히 맞아 떨어지길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안락의자 탐정들은 그게 된다. (그건 반칙이다.)
안락의자 탐정은 사소한 단서로 상대방의 심리와 계책을 꿰뚫어본다. 안락의자 탐정이 계획을 세우면, 거기서 단 하나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타이밍도 척척. 증거가 없을 땐 블러핑으로. 그럼 범인이 알아서 술술 털어놓으니까.
(통제된 실험환경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변수가 발생하는가? 본격 추리물에 등장하는 단순 명료한 인간사회가 내게는 마치 잘 통제된 인큐베이터 처럼 느껴진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서두에 밝힌 것 처럼, 작가가 수수께끼 풀이에 역량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내기 위해 골몰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냈는데 아귀가 안 맞으면? 아귀를 맞추기 위해 (소설 속) 현실을 수정해야 한다. 이런 반복 패턴은 무신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내 차고 속의 용”과 같다.
-내 차고 안에 용이 있어.
-차고에 어떻게 용이 들어가지?
-용이 내 차만큼 작거든.
-차고 안에 용이 있다면 어째서 거기에 얌전히 머무는 거지?
-용이 내 차고를 좋아해.
-내가 그 차고 안에 가서 용을 봐도 될까?
-그 용은 투명한 용이야.
-그럼 그 용을 한 번 만져 봐도 돼?
-그 용은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수도, 느낄 수도 없어.
차고 속의 용은 늘 이런 식이다. 모순이 생기면 그를 해결하기 위한 설명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본격 추리물의 천재 탐정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쉽게 말해 카지노 손님이 딜러를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카지노의 카드 게임은 애초부터 딜러가 근소하게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처음 몇 판은 운 좋은 손님이 이길 수도 있지만, 카지노에 자주 갈 수록 돈을 잃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확률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본격 추리물은 애초에 공정한 수수께끼가 아니다. 따라서 수수께끼 풀이를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고역일 수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 한 줄을 인용한다.
“이 추리는 실질적인 증거로 뒷받침할 수가 없어. 단지 합리적인 추론일 뿐이지.”
물론 그러시겠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전제는 틀렸다. 따라서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반드시 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천재탐정을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