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데이빗은 거대한 얼음 안에서 발견된다. 그 오랜 세월을 정지된 기계조각으로 차갑게 얼어붙어있던 데이빗은 끝내 사랑하는 엄마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훌쩍 뛰어넘은 로봇들, 외계의 존재, 인류의 멸망 등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 그리고 ‘가치’이다.
브릿지라는 플랫폼은 특이하다. 그냥 한 번 읽고 지나치기 어려운, 여운이 남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작품들이 많다. 그건 SF도 마찬가지다. 종이에 인쇄된 해도연님의 책을 다 읽은 뒤에 내가 좋았던 다른 작품들도 한 번 묶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SF가 <스타워즈>식 서부활극 정도로 국한되는 장르가 아니며 오히려 인간에 대한, 가치에 대한 통찰이 더 잘 보이는 따뜻한 장르라는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넓게 많이 읽는 독자가 아니어서, 이 ‘큐레이션’은 브릿지에 올라온 수많은 좋은 작품 가운데 극히 일부일 거라는 점을 전제하는 바이다.
인연
꿈을 꾸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이상한 행성. 그 자체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 행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의 ‘무게’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크지 않다. 그저 단서 정도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더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이번에 책으로 묶여나온 작품 가운데 하나.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향기가 가득하다. 다 읽고 난 뒤에는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진다.
에우로파, 혹은 유로파(Europa)로 불리는 목성의 위성에 대해서는 수 많은 소설들이 나와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덕목은 마지막에 있다.
사랑
여러 장르의 작품을 쓰시는 리체르카님의 SF. ‘엽편’이라고 얕봐서는 안 된다. 그 짧은 작품 속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근미래의 세계가 밀도있게 그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도 엄연한 현실인 ‘이주민’의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사랑, 사랑의 위대함을 말한다.
묵직한 스트레이트를 내지르는 호러 작품으로 먼저 만났던 작가님. <우주에서 온 선물>은 선이 아주 고운 이야기다. 미래 먼 미래에 바뀌게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두 가지를 섞어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준다.
거울
‘온도’는 여기서 차용해온 단어다. 박부용 작가님의 <온도계의 수은>은 아주 경쾌하게 달린다. 어찌 보면 코믹하기도 한 이야기인데, 단어 몇 개만 바꾼다면 우리가 몸담은 회사, 사회에서 매일 매일 오가는 대화이다. 딜레마 상황을 통해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넌 어떻게 살고 있니?”라고 묻고 있다.
루주아님의 <근위대 초탄 명중률 개선 문제에 대한 보고서>는 장황하게 전개되는 우리 사는 세상의 문제들이 결국 아주 단순한 요소로 환원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부조리, 그리고 욕망에 대한 풍자다.
한 세계를 정복하려는 자,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 실행에 옮긴다. 반전도 재미있지만 오히려 그 반전이 일어나기 전 각 지역의 대표들이 벌이는 뜨거운 논쟁, 과연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 지에 대한 논쟁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