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장면을 이야기로 바꾼 저만의 주문은 ‘~이 수상해!’입니다. 저에게 장르문학이란 수상한 것들, 수상한 현실과 존재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1차 세계의 경험들을 ‘뭔가 수상한데?’ 하는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브릿G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특별 코너 ‘브릿G 숏터뷰’, 오랜만에 진행된 숏터뷰의 아홉 번째 게스트로 김아직 / 닥터 오돌뼈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김아직 작가님께서는 SF, 판타지, 공포를 넘나들며 개인 단편집 『낙석동 소시민 탐구 일지』를 출간하고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으로 제6회 타임리프 문학상과 제5회 황금드래곤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다채로운 작품 활동을 계속해 이어 오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2024년 황금가지 첫 책으로 출간된 제7·8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좀비 낭군가』에도 「침출수」라는 단편으로 한데 참여하셨지요.
지난번 매거진을 통해 간단한 후기 전해드렸던 제5회 황금드래곤 문학상 이야기 부문 수상자인 김아직 작가님의 면면이 궁금하여 숏터뷰를 진행하였는데요, ‘잘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영역을 넓히기 위해’ 처음에 브릿G에 오게 되셨다는 작가님은 ‘인물의 인생을 보여주는 데에 가장 적합한 장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장르적 글쓰기를 확장하고 있다며 풍성한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와 스티븐 킹, 러브크래프트를 좋아해 SF·판타지 소설뿐만 아니라 추리·스릴러·공포 소설도 꾸준히 써 보고 싶다는 작가님을 응원하며(도시 괴담집으로 거듭나게 될 듯한 ‘낙석동 시즌2’도 기대됩니다!), 이번 숏터뷰 매거진도 재미있게 읽어 주시고 많은 격려와 응원을 담은 댓글 남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숏터뷰 하단에 마련된 이벤트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Q. 2022년 제7회 황금도롱뇽 문학상에서 트로피를 받고 약 1년 뒤인 2023년 12월, 제5회 황금드래곤 문학상 이야기 부문 최종 수상작으로 작가님의 작품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 주시면」이 선정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나눠 들었던 수상 소감에 따르면 7년간 동화를 주로 쓰시다가 갑자기 브릿G에 입문해서 무작정 장르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갑자기(?) 장르소설을 쓰고자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과정에서 브릿G를 어떻게 접하고 오게 되셨는지 그 경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A. 만 7년 넘게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썼습니다. 지금도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너무나 사랑하는 작가고요. 하지만 동화와 청소년소설의 1차 독자가 어린이 청소년들이다 보니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놉시스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유로 또 어떤 시놉시스는 주인공이 어린이 청소년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어린이 청소년이 읽기에 다소 잔인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려당하곤 합니다. 그렇게 반려당한 시놉시스들이 계속 쌓였고, 어느 순간 그 시놉시스들 역시 나의 일부인데 왜 버려져야 하는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동화와 청소년소설 쓰기에 조금 지쳐 있던 시기기도 했고요. 그래서 작가 이력을 잠시 멈추더라도, 경력 단절이 와도 괜찮으니 내가 쓰고 싶은 걸 쓰자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살리지 못했던 시놉시스들 대부분이 SF, 미스터리, 호러 등의 장르물이어서 자연스레 브릿G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21년 여름이었습니다.
브릿G는 언젠가 스티븐 킹을 검색하던 중에 눈에 띈 장르문학 플랫폼입니다. 한동안 독자로서 드나들었던 곳이고요. 그러다가 브릿G의 ZA 문학 공모전,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등에 참여하면서 브릿G라는 공간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2021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날마다 12~14시를 브릿G 타임으로 정해두고 그 시간에는 브릿G에 올릴 글만 썼더랬습니다. 잘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 게 브릿G 초창기의 목표였습니다.
Q. 그렇게 브릿G에 오셔서 처음으로 공개해 주셨던 작품이 2021년 8월에 올렸던 「김문조의 스케치」입니다. 가상의 동네 낙석동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군상극을 담아내는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연작 시리즈의 첫 편으로, 포스트-코로나 시기를 보내는 지금 보아도 역설적인 풍자와 유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단편이지만 연재처럼 주기성을 가지고 작품을 순차적으로 공개했던 것도 재밌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요, 브릿G에 처음 등록해 주신 이 작품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실 만한 내용이 있을까요?
A. 낙석동은 돌이 툭툭 굴러떨어지듯, 일상에 인물들이 의도치 않은 사건과 변수들이 생기는 마을입니다.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연작을 쓰기 전에도 낙석동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더러 썼습니다.(타임리프 공모전 우수작 「라젠카가 우리를 구원한다 했지」도 낙석동이 배경입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재난을 담아낸 낙석동 연작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닥친 낙석동을 배경으로 남녀노소, 외계인이 고루 섞이고 장르들도 섞인 연작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12개의 시놉시스를 가지고 시작한 시리즈는 아니었습니다. 시놉시스가 완성된 것은 3편 정도였습니다. 대신 낙석동에 살거나 여타의 이유로 낙석동에 찾아온 여러 인물을 구상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인물들 스케치가 끝난 뒤에 1편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한 건 가장 비호감인 인물 하나,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 하나, 이렇게 두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낙석동 사람 중에 누가 가장 비호감일까 혹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을까를 고민한 결과 중년 남자 김문조 씨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김문조는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어 늘 주눅이 들어 있고, 무책임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음침하다는 오해를 사곤 하고, 과거의 아픈 기억에 지배당하는 캐릭터였습니다. 딱 보면 비호감이고 알고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 누구일까 고민한 결과 김문조와 비슷한 능력(그림을 그려서 현실을 바꾸는)의 소유자이면서, 초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그에 따른 기회비용으로 잠이 들고 마는, 낙석고 1학년 한세인 학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지구의 모차렐라 치즈에 빠져버린 외계인 하촵크 씨도 후보에 있었지만 김문조와 대비 효과를 확실히 보여주기에는 한세인 학생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명의 주인공이 정해지니 1편의 로그라인이 나왔습니다. 김문조가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폭주하고 한세인 학생이 스치듯 등장하여 김문조의 폭주를 멈추는 이야기. 두 인물의 캐릭터와 한 줄 로그라인만 가지고 노트북 앞에 앉았고, 그렇게 탈고한 작품이 「김문조의 스케치」입니다. 구체적인 시놉시스 없이 들어간 작품이라 엔딩 장면에 (이름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세인 학생이 등장했을 때 저도 무척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이자 저의 첫 브릿G 발표작인 「김문조의 스케치」가 편집부 추천작에 선정되었을 땐 너무 기뻐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아직’이라는 작가의 첫걸음을 내딛게 해준 김문조 씨, 한세인 학생과 브릿G 편집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Q. 벌써 출간한 지 반년 정도 지난 단편집 『낙석동 소시민 탐구 일지』의 제목을 함께 논의하던 과정이 떠오릅니다. 작가님께서 처음에는 『데카메론』 같은 이야기를 써 보려고 낙석동 시리즈를 시작하였으나 데카메론과 달리 역병과 발병지에 집중한 이야기가 완성되어 제목을 ‘낙석동 데카메론’으로 쓰지 않았다고 언급해 주셨었는데요. 『데카메론』의 어떤 지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또, 100편의 이야기가 담긴 『데카메론』처럼 더 풀어내고 싶은 낙석동 이야기도 있을까요?
A. 『데카메론』의 가장 큰 매력은 ‘재난의 현재성’이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보카치오는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크게 퍼지던 1351년에 이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흑사병이라는 당대의 경험을 배경으로 ‘정숙한 부인 일곱 명과 청년 세 명이 역병이 돌던 끔찍한 시기에 모여 앉아 열흘 동안 주고받은 이야기’를 쓴 것이죠.
『데카메론』은 흑사병으로 인한 불안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입니다. 처음 낙석동 연작을 구상할 때는 저도 낙석동에 모인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지구적 팬데믹은 작가에게도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팬데믹을 단순한 시대 배경으로 두기보다 이야기의 복판으로 끌어오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재난의 충실한 기록자이면서 동시에 유희의 생산자여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데카메론』과는 구조적 유사성이 사라졌고 연작의 제목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콜레라 환자가 타고 있다는 깃발을 내걸고 항해를 이어가던 노년의 주인공들을 생각하니, 딱히 주인공일 것 같지 않은 인물들, 그야말로 동네 소시민들이 팬데믹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낙석동 연작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제목을 패러디하여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이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습니다.
『낙석동 소시민 탐구일지』 마지막 편인 「두 마을 이야기」에는 코로나로 아포칼립스를 맞은 평행우주의 낙석동이 등장합니다. 낙석동은 어떤 이야기든 가능한 동네입니다. 『낙석동 소시민 탐구일지』가 낙석동에 어떤 인물들이 사느냐를 보여주는 연작이었다면, 낙석동 시즌2는 낙석동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느냐를 보여주는 연작이 될 것입니다. 낙석동을 괴담의 무대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낙석동 소시민 탐구 일지』에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풀어낸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마다 소시민 히어로가 등장하는 휴먼 드라마로 외계인, 타임루프, 강화인간, 평행 우주와 같은 SF부터 초능력자, 환생 같은 판타지에 괴담 같은 오컬트도 살짝 곁들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풀어내어 부제를 ‘김아직 SF 판타지 연작 소설’이라고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르를 넘나들며 연대와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님만의 비결이 있을까요? 평소 작품의 다양한 소재나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으며, 어떻게 이야기로 구성하시는지 집필 과정이나 작가님만의 작업 스타일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낙석동 소시민 탐구 일지』는 철저히 인물 중심의 연작이었기 때문에, 인물의 인생이 장르를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특정 장르를 추구하기보다 인물의 인생을 보여주는 데에 가장 적합한 장르를 선택하는 방식을 택했죠.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쓰다가 장르문학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정착하기보다 다양한 장르를 써보고 실험하고 싶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고, 장르는 그 이야기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브릿G 초창기 목표가 장르 도장 깨기였는데 낯선 장르들의 작법서를 찾아 읽고, 장르 창작 강연도 듣고, 장르별 추천도서도 따라 읽으면서 감을 잡아갔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미스터리와 호러가 어려운데, 읽는 맛을 알아버려서 저도 많이 써볼 생각입니다.
소재나 아이디어는 대부분 일상적인 공간에서 얻습니다. 경험적 세계를 1차 세계라고 한다면 이야기의 세계를 2차 세계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눈에 보이는 1차 세계에서 2차 세계를 끄집어내 풀어내는 게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에나 있는 벽장이 누군가에겐 나니아로 가는 통로가 되고, 어린아이들의 시끄러운 비명이 몬스터 세상에선 도시가 돌아가게 하는 연료가 되고요. 그래서 저도 제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이야기로 바꿔 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 동네 단골 카페에 글 쓰러 가는 길에 주상복합 단지를 지나가는데, 거기 경비원분과 주민자치회의 회장으로 추정되는 분이 코로나 예방 접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습니다. 실제 분위기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그 장면을 발상 노트에 적었고, 그렇게 「외계인 파타흐 씨의 1차 접종」 로그라인을 완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범한 장면을 이야기로 바꾼 저만의 주문은 ‘~이 수상해!’입니다. 경비원과 자치회장의 일상적인 대화도 ‘경비원과 주민자치회장의 대화가 수상해!’로 관점을 달리하는 순간,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저에게 장르문학이란 수상한 것들, 수상한 현실과 존재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1차 세계의 경험들을 ‘뭔가 수상한데?’ 하는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누가 빨강머리 독고 씨의 계좌에 돈을 보냈나」라는 미스터리 단편을 썼는데, 그 단편도 버스에서 본 빨강머리 남자가 수상해서 쓴 작품입니다.
Q. 『낙석동 소시민 탐구 일지』는 슈퍼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이웃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데요. 특히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사건을 해석하고 다루는 과정은 현실적이고 따뜻해서 희망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와중에도 조금 무서운 분위기로 시작되는 단편도 있었는데요, 「낙석고등학교 1학년 7반 00번」, 「그것의 이름」에서는 유령이나 괴물 같은 존재가 이야기 초반에 등장해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괴담을 즐겨 읽거나 공포·스릴러 소설에도 관심이 많으실까요?
A. 어릴 때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 『공포의 검은 커튼』, 러셀의 『보이지 않는 생물 바이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장르적으로는 미스터리와 SF인데, 어릴 적 저에겐 세 권 다 공포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애거서 크리스티, 스티븐 킹, 러브크래프트 등 제가 사랑했던 작가들의 작품 기저에는 늘 공포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막연히 공포나 스릴러는 제 영역이 아니라고만 생각했는데 몇 년 전부터 좀비물을 시작으로 조금씩 써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괴이물도 쓰고 싶고, 현실공포를 꽉 차게 담아낸 스릴러도 쓰고 싶고, 코스믹호러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Q. 제5회 황금드래곤 문학상 이야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브릿G에 공개된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 본심 심사평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A. 저는 제 작품이 후보작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타임리프 공모전 수상작이 아니라 우수작이었기 때문에 후보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다가 편집자님의 메일을 받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때가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나온 직후였는데 영화가 주는 충격에 수상 소식까지 더해져서 영화관 로비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시상식까지 대외비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뭔가 뜨거운 공을 누군가와 주거니 받거니 하지 못하고 혼자 들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수상작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헤라클레스에게서 히드라를 구하고 싶던 오랜 소원을 담아낸 작품이어서, 탈고 후에 제 안에서 묵은 통증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심 심사평을 처음 봤던 순간도 생생합니다. 김종일 작가님의 녹화된 장르문학 강연을 들으면서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심사평에서 김종일 작가님 이름을 발견한 순간 조금 울컥했습니다. 신화적 비유가 과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작가님의 충고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 주력 장르가 SF였기 때문에 심완선 평론가님의 이름을 보고도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혼자 내적 친밀감을 키우고 있었던 평론가님께 심사평과 축하를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신의 자식도 왕의 혈통도 아닌” 주인공 캐릭터에 주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박광규 선생님께서 시간여행으로 인한 혼란을 다룬 부분을 심사평에서 언급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쓰면서 공을 들였던 부분 중 하나였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간상 오류들이 주인공 글라우케의 모험 때문이라는 작품의 세계관을 읽어 주신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Q. 본격적으로 단행본 『노비스 탐정 길은목』 출간을 기점으로 최영희와 김아직이라는 필명을 구분하여 사용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전해 주시기로는 평행우주에서는 ‘최영희’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청소년 책 등을 쓰고 있어 장르소설 작가로서 이력을 완전히 분리하고자 했다고 하셨었는데요, 필명인 ‘김아직’에서 ‘아직(Yet)’은 마이클 부블레의 노래인 「The Best Is Yet To Come」에서 따왔다며 작가님의 좌우명이라고도 하셨더랬지요. 작가님의 좌우명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또 「라젠카가 우리를 구원한다 했지」와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으로 제5·6회 타임리프 문학상 우수상을 연달아 수상하는 등 브릿G에는 SF와 판타지를 많이 발표하셨는데 써 보고 싶은 다른 장르의 이야기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앞으로 작가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작품 활동의 방향성이나 목표가 있을까요?
A. 삶은 언제나 현재가 중요하다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가 두려움으로 가득할 땐 미래에 희망을 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살리지 못한 시놉시스들이 쌓여가면서, 점점 새로운 이야기에 도전하는 게 두려워지고, 동화작가로서 청소년소설가로서 바닥이 드러난 게 아닐까 두렵고 슬펐습니다. 내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버린 것 같았고 편집자분들이나 동료작가들과의 소통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이클 부블레의 익숙한 노랫말이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마이클 부블레는 오래전 김연아 선수의 갈라쇼 덕에 알게 된 가수입니다. 갈라쇼를 계기로 그 가수의 곡들을 찾아 들었고, 「The Best Is Yet To Come」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두고 가끔 듣던 그 곡이 힘들었던 시기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태양을 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당신은 태양이 빛나는 걸 보지 못했어요. (…) 최고는(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거든요.”
“당신은 날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의 발은 땅에서 떨어진 적 없어요. (…) 최고는(가장 높이 나는 순간) 아직 오지 않았거든요.”
이런 노랫말들이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는 아직 더 쓸 수 있고, 너는 아직 쓰고 싶은 게 많이 있고, 네가 쓸 최고의 글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시절 ‘yet’이라는 부사가 저를 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아직이 되었습니다.
『노비스 탐정 길은목』을 투고할 때 브릿G 등록작가 김아직이 제 유일한 프로필이었습니다. 다행히 편집장님이 “나는 무이력 신인을 발굴하여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라는 답과 함께 계약서를 보내 주셔서 김아직의 첫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장르는 미스터리와 호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중세, 신화, 코스믹 호러, 이 세 가지 키워드를 SF, 호러, 미스터리 등의 장르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롤모델 아티스트인 주성치의 세계관을 담아낸, 짠하면서 웃긴 B급 SF, B급 판타지를 장·단편으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Q. 일과 중 작가님만의 글을 쓰는 루틴이 있나요? 반대로 글을 쓰지 않을 때 하는 취미나 다른 일상의 루틴은 어떠한지도 궁금합니다.
A. 오전에는 주로 독서를 합니다. 날마다 단편소설을 1편, 장편소설 100페이지, 지식 책 50~100페이지를 읽고 하루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단편소설의 경우는 장르를 가리진 않지만 읽은 뒤에는 로그라인과 그 책의 매력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는 편입니다. 장편소설은 내가 현재 쓰는 장르의 롤모델이 될 만한 도서를 선정하여 부분 필사를 병행하며 읽습니다. 그리고 지식 책의 경우는 5~10권 정도를 한꺼번에 진행하는 편인데 나머지는 저녁에 읽고 아침 독서 시간에는 신화, 중세, 사건기록물 등 관심 분야의 책을 고릅니다.
요즘은 아침 독서로 미스터리 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단편들을 하나씩 읽고 있고, 장편의 경우는 『장미의 이름』을 3독 하면서 책에서 언급된 문헌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에코의 책에서 그 문헌이 언급된 맥락과 실제 역사에서 그 문헌이 제작 발표된 맥락, 그리고 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합니다. 지식책의 경우는 『중수무원록 언해』와 『흠흠신서』를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새 작품을 쓸 때도 여타의 이유로 글을 쓰지 못할 때도, 아침 독서 시간만은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하루는 가기 때문에 글이 정말 안 써질 때도 일단 책은 읽어두려고 합니다.
평균 120분에서 150분 정도 아침 독서를 한 후에는 쉬면서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합니다.
글은 주로 오후 2시부터 저녁 9시까지 쓰는데 열람실, 카페, 스터디카페 등에서 주로 작업합니다. 글을 쓸 때는 머리가 맑을 때 새 글을 먼저 써서 최소 분량이라도 초고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개고나 수정 등은 초고를 확보한 뒤에 진행합니다.
글을 쓰다가 너무 막힐 때나 개고 작업이 힘들 때면 지금 작업 중인 원고와 전혀 다른 분위기, 다른 장르의 (현실 도피용) 단편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입니다. 브릿G 발표작 중에도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여럿인데, 가끔은 매진하는 원고보다 머리를 환기하려고 후딱 써낸 단편이 더 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저녁 9시 이후에는 운동이나 산책, 문구 쇼핑, OTT 순례, 가벼운 독서 등으로 자유 시간을 가집니다.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저녁에는 쉬어야 합니다. 몇 차례 번아웃을 겪은 뒤로 저녁 휴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풀어주고 쉬어 주지 않으면 다음 날에 읽고 쓸 에너지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Q. 브릿G에 공개된 작가님의 작품 중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께 가장 추천하고 싶은 ‘나의 작품 BEST5’를 꼽아 본다면요? 작가님의 만족도와 취향대로 간단한 이유와 함께 추천을 부탁드려 봅니다.
A.
- 40일의 바다
「40일의 바다」는 중세 SF 기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중세, 선상 호러, 코스믹 호러 등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결합한 작품입니다. 러브크래프트를 읽으면서 구상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인데, 그동안 써낼 자신이 없어서 시놉시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릿G 등록작가 3년 만에 쓸 수 있는 몸이 됐더라고요. 뭐든 포기하지 않고 3년을 하면 첫발은 내디딜 수 있는 것 같아요.
-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
「바닥없는 샘물을 한 홉만 내어주시면」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언한 글입니다. 올림포스의 신들부터 시정잡배들까지 입을 모아 칭송하는 영웅에게서 괴물을 구해내는 존재로는 십 대 소녀가 가장 어울릴 것 같았고, 그래서 영어덜트 소설을 쓴다는 기분으로 썼던 작품입니다.
- 허스키한 시베리
「허스키한 시베리」는 장편 개고 마감에 쫓길 때 새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몇 시간 만에 탈고한, 현실 도피용 작품입니다. 쉽게 쓴 글인데 여러 독자님이 좋아해 주시고, X(구 트위터)에서도 반응이 좋았던 작품이라 저도 좋아합니다.
- 달래고파닭은 왜 Y작가의 계정을 팔로우했나
「달래고파닭은 왜 Y작가의 계정을 팔로우했나」는 또 하나의 현실 도피용 작품이자 저의 첫 렙틸리언물이었습니다. 작가가 렙틸리언들에게 납치당하여 결국 마감을 못 하는 결말이 맘에 듭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
- 더미 젬마는 어떻게 칠판 그림 하나로 츠바인 행성을 초토화시켰나
「더미 젬마는 어떻게 칠판 그림 하나로 츠바인 행성을 초토화시켰나」는 황금도롱뇽상 수상작으로, 제게 거대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입니다. 규칙상 마침표를 7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문장 하나를 엿가락처럼 늘이려고 잔머리를 굴렸던 기억이 납니다.
Q. 작가님께서 브릿G에서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거나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추천을 부탁드려 봅니다.
A.
박꼼삐 작가님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로맨스는 제가 손도 못 대는 장르여서 박꼼삐 작가님의 작품으로 대리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강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과 외계의 지성체, 인간과 사막의 모래인간이 사랑에 빠지고, 남은 이는 먼저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이야기들인데, 사랑했던 날들이 남은 이의 기억으로 치환되는 순간이 독자를 먹먹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박꼼삐의 작품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 창공의 등대
처음 이 작품을 읽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던 게 생각납니다. 좋은 단편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 가만히 누워서 쉬어야겠더라고요. 지금도 “안녕, 기분은 어떤가요? 먼 우주에서 듣고 있을 낯선 사람.” 이 문장을 떠올리면 에르벤과 데니즈가 생각나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원래 해삼을 안 먹는데 앞으로도 안 먹을 것 같아요. 해삼을 보면 그 둘의 사랑이 생각날 것 같아서요. 이 작품이 맘에 드신다면 이제 「사토와 카이소」를 읽을 차례입니다.
- 사토와 카이소
「사토와 카이소」는 사막에 조난한 화자와 사막에서 만난 신비한 친구라는 설정이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모래인간 사토가 카이소의 품에서 모래알로 흩어지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토가 카이소에게 고래를 그려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래서 이 작품 다음으로는 「사막의 고래 느와」를 읽어야 합니다.
- 사막의 고래 느와
「사막의 고래 느와」는 길 잃은 아이를 사막에서 솟아난 검은 고래 느와가 집에 데려다주는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입니다. 우주와 바다, 바다와 사막의 경계를 지우는 박꼼삐식 서사입니다. 느와의 길 안내를 받고 마을로 돌아온 아이는 그 밤, 모래에서 솟아나서 밤하늘을 헤엄치던 고래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겠지요. 제가 뭐랬어요. 박꼼삐의 작품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니까요.
박꼼삐 작가님의 새 작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Q. 마지막은 고정 질문입니다. 브릿G에 바라는 점(기능적·제도적 부분 등)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저처럼 무작정 장르문학에 발을 내딛는 작가들에게 브릿G는 정말 좋은 플랫폼인 것 같습니다. 접근도 쉽고, 장르별 공모전에, 작가님들이 주최하는 소일장까지. 즐겁게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그래서 기능적·제도적 부분에선 달리 바라는 게 없고…….
다만 크툴루 굿즈가 좀 아쉬운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크툴루를 주꾸미로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브릿G마저 시류에 편승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상당히 깜찍하고 소중하긴 한데 이게 귀엽고 끝날 일인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초장과 나무젓가락만으로 제압 가능한 비주얼의 굿즈 외에 심해에서 우리를 부르실 것 같은 비주얼의 굿즈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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