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환상, 뒤틀림의 계보

대상작품: <폴라리스 랩소디> 외 13개 작품
큐레이터: 민트박하, 3일전, 조회 25

사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단순히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의 내용이나 의도, 의미가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준 것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책은 스쳐 지나갔고, 어떤 책은 인상적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책은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작품의 어느 부분이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 추억, 신념, 가치관 등등.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시였습니다. 전혀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배치로 쓰인 문장이 이상하게 알 것 같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 시가 전혀 다른 의미로 와닿았고 더 많은 시를 찾아 읽으면서 어떤 문장이 저에게 와 닿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계속 찾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문장을 좋아합니다. 문장. 단어와 단어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줄글. 생각이나 감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때, 완결된 내용을 나타내는 최소의 단위.

 

브릿G에는 없지만 제가 특히 영향을 많이 받고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뽑으라면, 저는 이혜미 시인의 <보라의 바깥>을 가장 맨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시집의 모든 문장을 필사하고 싶었어요. 그만큼 모든 문장이 아름다웠고, 제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 왜 시를 쓰지 않고 있느냐…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축적인 의미의 단어로 사람의 심장을 꿰뚫어버리는 시를 저는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신 문장을 나열하여 글을 썼습니다. 읽은 책 중에서 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어린 시절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고, 특히 <타나토노트>와 여기에 이어지는 시리즈, <천사들의 제국>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고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떴습니다. 발터 뫼르스의 작품 세계관은 무척 독특한데, 이야기 속에 작가가 등장하고 그 작가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발터 뫼르스는 작가이지만, 설정상 이 이야기 속의 작가가 쓴 책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해 오는 사람입니다. 발터 뫼르스의 많은 작품은 세계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더 흥미롭습니다. 또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파격적인 장치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책에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을 다양하게 표현했고 제목이 꿈꾸는 책들의 도시인 만큼 작가와 책, 문장과 글에 대한 고찰이 많습니다. 그만큼 상상력도 풍부해서 읽다 보면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국내의 작가님들 중에서는, 이영도 작가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도 좋아하긴 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은 폴라리스 랩소디와 그에 이어지는 퓨처 워커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개념과 가치관에 대해, 그리고 세계의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한 번 비틀어서 전혀 다른 해석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구성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퓨처 워커는 반복해서 읽을수록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라, 아주 먼 나중의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오디오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실 오디오북으로 정말 외울 정도로 들어서, 리뷰도 몇 번 작성했습니다. 반복해서 듣고 있으면 새롭게 깨닫는 게 많았고, 생각도 더 많아지면서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 글을 쓸 때 듣기도 좋고요. 피를 마시는 새의 오디오북이 하루 빨리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위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은 저의 계보는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의 계보입니다.

시와 같이 아름다운 단어들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고, 아름다운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시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단어와 단어들의 적절한 배치와 배열로 만들어진 문장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아름답고 좋은 단어만 쓰려고 한 게 아닌, 의미와 배열이 다듬어진 문장을 빚어내길 바랐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계보는 ‘환상’의 계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판타지. 환상. 상상력을 발휘해 진부하지 않은, 색다른, 재미있는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창의력을 테스트하면서 더 발상의 전환을 할 수는 없을까, 더 색다른 세계를 그려낼 수는 없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소일장에 참석할 때도 보다 참신한, 보다 색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이영도 작가님에게서 영향을 받은 계보는 ‘뒤틀림’의 계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환상의 계보와 달리 뒤틀림의 계보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계의 틀을 깨트리고 전혀 다른 시야나 각도, 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멋진 작가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작품들이지만… 존경하는 작가님인만큼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생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브릿G에서 제가 추구하는 방향이랄까, 제가 쓰고 싶었던 글을 멋지게 써내신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처럼 저도 멋진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글을 읽고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느낌과 분위기의 글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이상으로 제 작품의 계보 소개 및 큐레이션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추천해주실 작품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