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픽 두 번째 주제는 비인간입니다. 인간은 영생을 위한 강인한 신체를 갖기 위해 스스로 사이보그가 되길 희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안드로이드가 정말로 마음을 가졌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로봇을 사랑하는 세상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인간과 로봇이 대립하는 세상의 이야기 또한 존재합니다.
이번 큐레이션에서는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비인간에서 다시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 사회 속 비인간들과 비인간 사회 속 인간들에 대해 다룹니다. 이전 큐레이션 작품들과 중복되는 작품이 몇 개 있을 수 있습니다.
미열(확장본)
녹등가에 있는 사람들은 사라져도 사회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족속들이야. 쓰레기를 치운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어.
나를 악마라고 부르지 마!
인간의 약한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시대, 사람들은 저마다 공랭식과 수랭식으로 여름을 버텼고 하디는 냉각수 부족으로 헐떡입니다. 그를 안타깝게 생각한 세이는 하디에게 인간에게서 냉각수를 뽑아오겠다는 끔찍한 말을 하고, 하디는 기겁하며 이를 거절하죠. 그러나 세이가 떠난 뒤 하디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다가 미열과 광기에 사로잡혀 결국 녹등가로 향합니다. 주사기와 더플백을 들고 빈자들의 소굴로 나선 그는 폐허가 된 집에서 한 노인을 마주하고, 노인과 거래를 하게 됩니다.
제니의 노래
“꼭 보고 싶다.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제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가정에 보급된 거의 1세대의 로봇이었다. 당시의 로봇들은 기본 재질이 튼튼하기도 했거니와 생체기술이 접목되지 않은 로봇이어서 오랫동안 작동이 가능했다.
언제부터인가 과학기술은 사람보다 기술 자체를 위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통해야만 사는 우리와는 달리 기술은 계속 발전했지요. 이곳의 안드로이드들은 과거 인간으로 살아가다 약해진 육체를 버리고 기계로 의식을 이식한 존재들입니다. 어느날 17845호는 도시를 순찰하던 도중 백 년 전의 모습과 동일한 인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달리고, 마침내 그를 마주합니다. 그러나 17845호는 인간을 마주하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어떠한 기억의 파편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저 닳아지지 않는 신체에 의식을 계속해서 업로딩 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보존되는 것일까요. 노래와도 같은 여정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나무의 노래
예를 들어, 너는 나의 장제사지.
네 손이 갈라지고 터지고, 운석칼 하나가 닳고 사라지고, 네가 자라 성체가 되는 것도 나에게는 찰나. 숨을 몇 번 쉬면 지나가는 일.
말발굽에 편자를 박아 연마하는 장제사처럼, 아주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다듬는 장제사 또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대를 이어 나무를 보살피고, 그들의 노래를 듣지요. 그러나 나무는 너무나도 오래 살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자신을 다듬어주던 장제사가 이미 세상을 떠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무한한 생명을 사는 이들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주가 사그라들 때까지 끝나지 않는 나무들의 노래를 우리는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창공의 등대
“안녕, 기분은 어떤가요? 먼 우주에서 듣고 있을 낯선 사람…”
방송 전파 송신기를 뜯어 고치며 먼 우주로부터 들려오는 주파수를 몇 년이고 수집해온 에르벤은 외계에서 자신에게 보낸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그와의 만남을 꿈꿉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던 신호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는데 몰두하고, 그 해석이 비로소 끝났을 때 그를 만나러 아주 머나먼 행성으로 고민도 없이 떠난 에르벤은 얕은 물 속에서 해삼 모양의 외계인을 발견합니다. 사랑으로 울렁이는 무지개빛 비눗방울과도 같은 다정한 SF 로맨스 중단편으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사랑 이야기와 인외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블루, 가끔 무지개
추락하는 우주선의 운전석에 앉아, 나는 처절하게 후회했다. 벼락치기로 면허를 따는데 그친 짧은 경험을 가지고 혼자 이 먼 곳에 오다니. 첫 여행지로 지구를 택하다니. 용감하게 무식했구나.
사고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지구에 불시착하게 된 외계인 블루는 산을 헤매던 도중 집에서 홀로 살고 있는 어린 아이 산하를 만나게 됩니다. 비를 부르는 외계인 블루는 산하의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와 함께 지내기로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은 블루를 졸졸 쫒아다니는 비 때문에 눅눅해지고 곰팡이까지 끼게 됩니다. 함께 하면 행복하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 관계를 블루와 산하는 어떻게 마주볼 수 있을지 따라가는 것이 이야기의 묘미입니다. 잔잔하면서 따뜻한, 위로를 주는 어른 동화책을 읽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토와 카이소
이때 나는 문득 사토가 얼마나 살아왔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때때로 어린아이 같기도 했지만, 다른 때에는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 같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너무 어린아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게, 달이 참 아름답구나.” 사토는 나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던 카이소는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모래로만 이루어진 허허벌판 속에 표류하게 됩니다. 그때 사토라는 신원미상의 남자가 그를 찾아오고, 카이소는 그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받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 동안 카이소는 사토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빠져드는 건 카이소 뿐만이 아니었죠. 어떨 땐 함께 달을 보기도 하고, 사토의 부탁으로 고래를 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래알처럼 반짝이던 그와의 아름다운 추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만남이 있다면 작별도 필연적인 것이죠. 이 여정의 끝에서 카이소는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까요, 그가 사막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전해줄까요.
내 애인은 DNA
그래서 이걸 조금이라도 빨리 남기고 싶었어요. 제 애인의 DNA는 계속 변해왔고 변해가겠죠. 그 시간이 아쉬웠어요. 처음으로 시간이 아쉬워졌어요.
그래서 저는 그 DNA도 사랑하려고 했어요.
지구를 여행하던 도중 규소 기반 생명체인 ‘나’는 바에서 애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6년을 사귄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된 ‘나’는 애인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돌아갑니다. 애인의 DNA를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늘 빠르게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지구인들의 DNA를 ‘나’는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배양액에 DNA를 넣고 애인을 복제하기 시작하죠. 수많은 시간 동안 애인은 태어나고 죽길 무수히 반복했습니다. ‘나’는 결국 애인을, 지구에서 만났던 그 순간의 애인을 다시 한 번 마주할 수 있을까요? 어딘가 소름끼치면서도 두근거리는 이 묘한 SF 로맨스릴러에 계속해서 빠져들게 됩니다.
비공식 블루그린벨트
그건 내가 목욕탕을 운영해서 일까, 그럴듯한 추측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갈만 한 곳은 여기 밖에 없다.
뿌듯해라니. 내가 언제 이런 말을, 이런 생각을 했었나 떠올려 보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날 거리에 인간들 대신 개구리들이 나타나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욕탕을 운영하던 ‘나’는 이러한 현상이 처음에는 의아하고 귀찮았지만, 계속해서 목욕탕에 출입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 개구리들을 보며 어느 순간 가슴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잊고 있었던 그 감정을 말이죠. 사실 ‘나’는 어쩌면 인간들의 방식보다 개구리들의 방식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경쟁사회와는 달리, 개구리들의 사회에서는 정말로 보람차다는 감정과 편안함을 느꼈으니까요. 그러니 개구리가 판을 치는 이 이상한 세상에서도 조금 더 목욕탕을 운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