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평생 동안 노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십 대 학생들이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그들에게 공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 주는 도구가 아니라 높은 수입을 보장해 주는 직업을 갖기 위한 고된 노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공부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든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습니다. 물론 그 공부라는 것이 시험 점수를 1점이라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브릿G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는 것이 공부가 되기도 합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공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 선택하는 모든 일에서 파생되는 깨달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산타 시스템>은 크리스마스 특집 소설로 읽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차라리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같은 때가 더 적합한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유지해 주거나 증폭시켜 주는 소설이 아니라 무참히 깨부수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시작은 지난해 이루지 못했던 일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깜냥에 대한 냉철한 분석 끝에 도출한 새로운 목표에 대한 집중으로 여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낫다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서두엔 ‘고어한 묘사’가 많으며 ‘스플래터’에 가깝다는 안내문이 등장합니다. 고어와 크리스마스의 조합이라니. 처음에 저는 상당히 상업적인 스토리를 예상하고 작품을 읽기 시작했지만 읽다 보니 오만 가지 사회상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주인공 엘프는 산타의 공장에서 도망친 낙오자입니다. 폭압적인 산타 밑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중노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산타의 손에 가족과 여자친구까지 잃었습니다. ‘고어한 묘사’는 주로 산타의 폭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노동을 하느라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자존감과 정체성 등등 그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엘프 노동자들은 실수를 하거나 목표한 바를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깁니다. 사지가 찢겨서요.
주인공 엘프는 산타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 선물 포장을 하느라 철야근무 중인 공장에 잠입해 때를 노리지요. 도중에 그는 심각한 광증을 보이는 루돌프를 수술하는 현장에 참여합니다. 관리자는 산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루돌프의 내장기관을 모두 들어내고 배터리를 채우면 효율적으로 썰매를 몰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요.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말과 함께요. 산타는 흔쾌히 허락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작품을 알레고리로 읽어버렸습니다. 저쪽 세계 엘프의 현실은 이쪽 세계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름없다고요. 일본에서 ‘사축’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부품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온갖 효율적인 방법으로 (과)사용되다가 배터리가 다하면 혹은 보다 성능 좋은 다른 배터리가 발견되면 쉽게 버려지는 존재 말입니다. 이건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이전에 없던 깨달음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상투적인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상투적이 되었다는 것만큼 슬픈 일도 있을까요.
<혼자 살아가기>라는 책에서 인류학교수 송제숙은 자유주의적 에토스와 신자유주의적 에토스를 대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주의적 에토스는 자아 혹은 개인을 노동 시장의 상품으로 만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에토스는 자아의 모든 측면을 시장성 있는 혹은 시장중심적 요소로 개발 착취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측면을 시장성에 집중해 개발해야 합니다. 적은 예산과 적은 노동력, 짧은 시간으로 최고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이러한 일에 진저리를 치며,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 자유를 찾아 떠나겠어!”라는 결심을 외치고 회사 밖으로 나온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는 얼마 안 가 조직에 소속되지 못한 프리랜서의 삶이 얼마나 신산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지 못하면 굶어 죽고 마니까요. (그러니 프리랜서는 지나치게 겸손하면 손가락만 빨게 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조직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놈의 ‘상품성’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헨리 D. 소로우처럼 아름다운 호숫가에 집을 지어 놓고 국가가 무어냐, 세금이 무어냐 당당히 거부하며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게 아니라면요. (물론 소로우도 세금 체납 문제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산타 시스템>의 산타는 스스로를 관념의 상품으로 칭합니다. 엘프는 공장에 소속된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상 자존감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요소를 상품성의 극대화를 위한 행동에 투입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지가 찢길 정도로 끔찍한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그러니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에 읽기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산타가 저지르는 고어한 행위들을 떠나서요.
로렌 벌랜트는 이런 말로 우리의 폐부를 들쑤십니다.
“생의 구축과 인간 목숨의 마모를 분간할 수 없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의 일상적 경험은 살아 있는 죽음 혹은 느린 죽음이다.”
<산타 시스템>의 주인공 엘프는 이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죽은 듯 살 것이냐, 천천히 죽어갈 것이냐의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는 산타를 죽이려 하지만, 산타가 그에게 전하는 말은 뜻밖에도 산타 역시 하나의 상품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엘프는 산타를 상품으로 만든 타깃을 향해 한 걸음 전진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엘프는 더 깊은 진실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타를 상품으로 만든 최종 원인은 무엇일까요? 산타가 노동자의 인권을 짓밟아 가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생산량을 채웠던 이유가 뭘까요? 단순히 산타가 악인 중의 악인이라서 그랬을까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 등장하는 근대적 이야기에 대부분의 독자는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제 작가들은 절대적인 악도 없으며 절대적인 선도 없다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지요. 한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요. 그를 양면적인 인간으로 몰고 가는 사회와 시스템에 대해서요. 저는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산타 시스템>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작품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에 대한 다상냥님의 선행하는 리뷰가 존재하며 구조적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내린 리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감상적 측면의 다양성을 위해 이 리뷰를 덧붙여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