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시오. 이 모든 건 사실이니 의심일랑 하지 말고 잠자코 들어주면 좋겠소.
설화와 신화의 재해석과 재구성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그냥 못 지나친다.
[‘뮤즈’가 된 설화 속 이무기]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브릿G에도 이미 많다. 순수하게 영감을 주는 ‘뮤즈’와의 사랑 이야기도 있고, 그 뮤즈를 호러적인 존재로 그려 작가가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받아쓰기를 강요당하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사물에 깃든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힘으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만 작가 본인은 완전히 소거되어버리는 이야기도 있다. 나 또한 연재물 에피소드 중 하나로 쓴 적이 있다.
영감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힘이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늘 ‘누가 진짜 저작자인가’라는 불안을 건드리기에 매력적인 소재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영감의 자리에 우리 설화 속 존재를 데려다 놓았다는 점이다. 바로 ‘용이 되지 못한 강철이’ 설화에 나오는 이무기 ‘강철이’다.
[억울한 존재에게 직접 듣는 ‘구전’ 설화]
‘강철이’라는 이름의 이무기에 대한 설화는 생각보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은 경북지역에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경상북도 박곡리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비사의 한 상좌가 인간의 모습으로 천 년을 수련하다 마침내 승천하려는 순간, 절 밖에서 들려온 인간의 헛기침 소리 한 번에 추락하여 짐승이 되었다고 한다. 신이 되기 직전, 인간의 가장 사소하고 무심한 동작 하나로 모든 것이 무너진 존재. 그 좌절이 원한이 되어 그는 가뭄과 재해를 부르는 괴물로 남았다.
이 소설은 그 설화를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강철이의 목소리로 그 억울함을 직접 토로하게 만든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한 일이오.”
“천 년을 수련하여 용이 되려는 신성한 존재가, 한낱 인간의 눈짓 한 번으로 추락하다니 말도 안 된다”는 화자의 항변은, 단순히 설화의 빈틈을 채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 전체의 정서적 토대가 된다. 그가 분노하는 대상은 인간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시간과 수련을 한순간의 우연으로 무너뜨리는 운명의 부조리함 그 자체다.
작품은 일관되게 예스러운 종결어미(“~소”, “~오”)를 사용한다. 처음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이 화법이, 읽다 보면 오래 살아 온 누군가에게서 말로 전해 듣는 듯한 효과 ㅡ 찐 ‘구전口傳‘ 설화 ㅡ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좋았다. 신화적 존재의 이야기를 신화적이지 않은 현대 문체로 풀어냈다면 분명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용이 되지 못한 용들]
이름에 ‘용(龍)’ 자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되지 못한 화자와, 용이 되려다 추락한 강철이의 만남은 그래서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거울처럼 기능한다. 두 존재 모두 ‘용’이라는 기표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그 실체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강철이가 화자의 꿈을 들은 뒤 보이는 반응—”단순한 부귀영화라면 빨리 이뤄줄 수 있는데”라며 골치 아파하는 모습—은, 각종 우화에서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존재들이 인간의 ‘소박한’ 소원(보통은 화목한 가정, 일상의 평온함, 적당한 성공 등)을 듣고는 ‘차라리 금은보화는 줄 수 있는데 그건 불가능하다’라며 난색을 표하는 것과 겹쳐진다.
동시에 이 장면은 이 소설이 작가가 영감과 욕망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지점이다. 다른 ‘뮤즈’ 서사들이 성공이라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거래의 구조를 취하는 데 반해, 여기서 강철이가 요구하는 것은 정확히 반대다. 그는 화자에게서 빼앗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몇백 년간 품어온 이야기들—실패하고 좌절한 인간들의 이야기—을 내어준다. 영감을 주는 존재가 도리어 무언가를 잃어가는 서사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장르적 관습을 뒤집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실패 또한 성공이며 과정이다]
다만 이 소설의 진짜 중심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강철이의 이야기로 쓴 소설이 공모전에 당선되고, 강철이는 마침내 승천한다. 아니, ‘사라진다.’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 지점에서 화자는 오히려 멈춰 선다. “진짜 용은 남의 날개로 하늘을 나는 법이 없다”는 자각은, 빌려온 날개와 불꽃으로 쓴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결말부에서 화자가 다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영감을 받는 행위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태도로 읽힌다. 흔한 영감 서사들이 ‘뮤즈를 만나 성공했다’, 또는 ‘성공했지만 다른 부분에서 파멸했다’는 데서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그 성공 이후에도 남는 결핍을 끝까지 들여다본다.
그래서 강철이가 승천하며 사라지는 장면은 단순한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화자를 통해 자신을 추락시킨 인간을 용서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한 인간의 꿈을 위해 자신의 한(恨)까지 그대로 내어주며 스스로의 분노를 초월한다.
어쩌면, 그가 추락한 것 또한 수련의 일부가 아니었을련지.
이 한 문장은 사실 강철이 설화에만 머무는 통찰이 아니다. 영웅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승천하기 전에 한 번쯤은 떨어져봐야 한다는 것. 이는 많은 신화 속 영웅 서사가 공유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시험과 추락과 고난을 거치지 않은 영웅은 어딘가 미완성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그 패턴을 다시 끌어와 강철이에게 적용한 것은, 그래서 그저 우연한 발상이 아니라 오래된 서사 문법에 대한 정확한 적용으로 읽힌다. ‘강철’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담금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추측처럼, 어쩌면 그 추락과 천 년의 고독 자체가 신이 되기 위한 수련의 일부였을 수도 있다는 해석은, 설화 속 ‘실패’, 그리고 우리들의 ‘실패’를 다르게 읽어내는 이 소설만의 시선이기도 하다.
[지옥을 거쳐온 자만이 지옥을 지나는 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은 설화를 읽는 독자의 자리로 슬쩍 옮겨온다.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는 안 되는가’라는 물음은 비단 강철이만의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있다가 좌절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어봤을 물음이기도 하다. 다만 지옥을 거쳐온 자만이 지옥을 지나는 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는 말처럼, 천 년의 추락과 고독을 통과한 강철이였기에 다른 누군가의 꿈에 자신의 불씨를 나눠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 ‘내 글이 너무 구리다’, 또는 ‘나는 뭘 해도 안 된다’며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이 작은 손짓 하나는 건네줄 수 있을 것 같다. 추락이 끝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음 단계를 위한 어떤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설화의 언어로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이 응원하고 있는 것은 용이 되지 못한 강철이도, 작가가 된 화자도 아니라, 날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자신이 날아오르지 못했어도 그런 이들에게 기꺼이 날개를 빌려주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이다. 꿈을 이루는 순간이 곧 완성이 아니라는 것, 진짜 용이 되는 길은 그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른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강철이라는 토속적인 존재의 입을 빌려 담담하게 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성공’ 자체를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성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동시에 이 작품은 좌절한 존재조차 타인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만이 세계적인 선수를 길러내는 것은 아니듯, 용이 되지 못한 강철이도 누군가를 용으로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냈다.
나와 강철이의 이야기를 들은 당신의 가슴속에 불씨 하나가 살아났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누군가의 가슴속에 작은 불씨 하나를 남기고 싶다는 화자의 마지막 바람은, 최소한 나에게는 어느 정도 도달한 듯하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 읽은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질문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용’이 되고자 하는 당신은, 과연 누구의 날개로 날고 있는가. ‘용’이 되지 못했다면, 누구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