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않은 전체(Whole)의 전말 <클라비스트 자치 구역 살인사건> 공모(감상)

대상작품: [번역] 클라비스트 자치 구역 살인 사건 (작가: 별빛의 조각들,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21시간 전, 조회 12

 

 

“나는 오래 전에 전체(Whole)를 부정했어. 앞으로 클레이브 안의 모두를 죽일 거야.”

(본문.P108)

 

 

목차

1.『전체(Whole)라는 이름의 디스토피아(Dystopia)』

2.『전체(Whole)에 대한 긍정』

3.『전체(Whole)를 만들어낸 이들』

 

 

 

1.『전체(Whole)라는 이름의 디스토피아(Dystopia)』

 

우리는 과학적으로 진보적인 발전을 이뤄낸 사회를 다룬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만, 그 안에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관계들은 오히려 퇴보를 경고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유의지의 가치를 주장하던 시민들이 AI를 비롯한 도구들의 테두리에 갇혀 생각하는 힘이 거세되고, 기술이 주는 편리함에 취해 손발을 쓰는 힘이 무뎌지며, 결국 인간관계로 엮어지는 사회의 가치조차 잊어가는 과정은 앞으로 우리가 겪을 ‘디스토피아(Dystopia)’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비스트 자치 구역 살인사건>은 제법 독특한 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개인으로 흩어지는 인간사회를 표현하는 것이 흔하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그런 발전된 사회에서 개인을 버리고 ‘전체(Whole)’를 긍정하려는 사회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답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뉘앙스는 아닙니다. 작가는 자치구역 ‘클레이브’에서 벌어진 어느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해야하는 사회의 모습과 더불어, 왜 이런 진보적인 사회에서조차 개인의 가치를 무시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고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답을 함부로 정할 수 없는 사회의 형태와, 그 사회를 긍정하고 부정하는 이들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알아볼까 합니다.

 

문해력이 부족한 독자가 적는 한 편의 독후감에 불과합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2.전체(Whole)에 대한 긍정

 

(P12). 존노 퀴퍼리스가 범인이었다. 경찰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 주는 장르적 이미지에 비해, 이 작품은 추리적 요소는 적은 편입니다. 그것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적 배경에서 기인합니다.

 

주인공이 머무르는 자치구역 ‘클레이브’는 하나의 집단으로 묘사됩니다. 거주자들은 ‘디머(Dimmer)’라는 이름의 기술로 바깥의 통신기술을 차단하고 그들만의 작은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기술은 마치 생각과 시야를 공유하는 듯한 느낌으로 제시됩니다. ‘디머(Dimmer)’를 장착하고 있는 거주자들 사이에는 그 어떤 소문도 빠르게 퍼져나가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가치를 두는 ‘전체(Whole)’의 힘을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이 ‘클레이브’ 안에서는 집단만이 존재하며, 그 집단 자체가 사회로부터 떨어진 또 다른 사회로 인식된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P45). 모두가 존노가 범인이라는 것을 안다. (중간생략)존노가 클레이브를 십 년 동안 떠나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욱하는 성질을 기억했다.

 

때문에 이 사건의 범인은 ‘존노 퀴퍼러스’라는 인물로 지목됩니다. 그들에게 비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목격증언이 공유되며, 확신에 찬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죠. 심지어 ‘클레이브’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속속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용의자가 한 명뿐인 이 게임은 더 이상 수수께끼 축에도 끼지 못 합니다.

 

(P9). 테이 오스터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제아는 그녀를 알고 있다. (중간생략)물론 테이 역시 누군가의 일리야이자 누군가의 바운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자매이자 사촌이었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부모였다. 그 사실이 그녀를 완전한 공포로, 충격과 절망, 그리고 막 싹트기 시작한 분노로 뒤덮는다.

(P10). 나제아는 테이의 영혼이 전체(Whole)와 빠르게 합일되기를 기도하는 주문을 외운 뒤,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P35). “존노 퀴퍼리스에요나제아가 말한다. 살인은 전체(Whole)에 대한 모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집단이 살인사건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이 ‘클레이브’의 거주자들은 마치 그들이 살고 있는 집단을 하나의 신앙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바깥 사회와 격리를 이루고 있다는 배경은, 곧 그 격리된 집단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곧 나에 대한 가족이자 친구이고, 내가 이 집단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앙과 힘의 대상이 되어주는 이 ‘전체(Whole)’에서 살인은 용납될 수 없는 사건으로 규정됩니다. 집단에 균열을 내는 행위는, 곧 그 집단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바깥에 보여주는 행위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P55). 클레이브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나제아는 점점 더 자주 그녀의 가족, 친구, 이웃과 너무나도 자주 걷던 그 모든 길들을 기억을 되짚듯이 걸어다녔다. 클레이브의 어디에 있든, 그녀는 그들과 나눴던 대화와 편안한 침묵의 작은 유령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바깥 세상의 그 어떤 곳도 이곳과 같지 않을 것이다.

(P56). 클레이브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충격과 그 피해자를 자기 ᄄᆞᆯ이 발견했다는 사실이 복합적으로 두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제아는 그들이 한 편으로는 그녀와의 이별이 일시적으로나마 미뤄졌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P57). 어쩌면 그녀는 이 예상치 못한 시간의 한 조각을 그들에게 빚진 것일지도 모른다. – 자신이 사랑하면서도 떠나버릴 모든 이들에게.

 

시점의 중심을 잡고 있는 ‘나제아’는 곧 클레이브를 떠날 예정으로 소개됩니다. 클레이브를 떠난다는 것은 곧, 그녀가 이제까지 믿고 있던 전체(Whole)를 부정한다는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번 살인사건에서 그녀가 믿고 있던 전체(Whole)의 균열을 목격하고 이주를 잠시 미루는 모습을 보입니다. 즉, 그녀 또한 아직 ‘클레이브’의 구성원이며, 제 자신을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67). “그래도 그는 아직 클레이비스트야.” 나제아가 낮게 중얼거린다. “전체(Whole)를 포기한 적은 없잖아.”

(P68). “하지만 클레이브를 떠난 지 십 년이 지났어, 나제아.” 그가 긴 세월을 표현하려는 듯 숟가락을 크게 휘두른다.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니지. 사람은 변해. 밖에 더더욱.”

(P71). 클레이비스트는 잘못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나제아는 존노가 여전히 클레이비스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이렇듯 ‘전체(Whole)’라는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제아에게는, 존노가 벌인 살인사건은 납득할 수 없는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존노 또한 한때는 ‘클레이브’를 떠났던 이주민이었습니다. 비록 다시 ‘클레이브’로 돌아와 ‘전체(Whole)’에 흡수되길 희망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이라는 균열이었습니다. 작중에서 비밀처럼 숨겨져 있던 존노가 테이의 관계를 떠올려본다면, 이 살인은 단순한 ‘전체(Whole)’에 대한 반항을 넘어, 결국 가족과 친구를 ‘전체(Whole)’라는 테두리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사회를 역설하는 듯한 느낌으로도 다가옵니다.

 

(P120). “나도 떠나면, 너무 많이 변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나제아는 집단을 떠났다가 끝내 ‘전체(Whole)’로 흡수되지 못 하고 비극을 일으킨 존노에게 자신을 겹쳐봅니다. 결국 고민과 답을 독자에게 미뤄집니다. 존노가 벌인 일이 ‘전체(Whole)’를 벗어난 자의 말로인지, 아니면 ‘전체(Whole)’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있던 인간의 순리인지 말이죠. 하지만 떠나기도 전에 돌아올 길을 궁리하는 나제아의 모습은, 끝내 ‘전체(Whole)’에서 벗어나지 못 할 거라는 의미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3.전체(Whole)를 만들어낸 이들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역시, 거주자들이 힘으로 의지하는 ‘전체(Whole)’의 근원입니다. 현실에서 어떤 ‘집단’의 탄생은 의도적인 설계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자연적으로 해당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경우도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클레이브’ 혹은 ‘클레이비스트’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거주자들의 형태는 명백히 의도적인 설계가 엿보입니다. ‘임플란트’라고 부르는 고성능 도구로 그들 스스로를 묶고, ‘전체(Whole)’라는 가치관을 정의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적대하는 형태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체(Whole)’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의도로 비롯될까요? 작품에서는 이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집단을 적대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이 살인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P12). 존노 퀴퍼리스가 범인이었다. 경찰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P48). “우리가 말하는 이유는, 경찰이 어머니를 위한 정의구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경찰이 신경 쓰는 건 어떻게 하면 클레이브를 혼란스럽게 만들까 뿐이야.”

(P49). “경찰이 신경 안 쓰는 건 나도 알아.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원래 오늘 여길 떠나기로 했잖아.”

 

이번 살인사건으로 ‘클레이브’를 정탐하는 ‘경찰’의 존재는, 엄연히 이 거주지 또한 공권력이라는 사회 시스템이 눈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거주자들이 표하는 것은, 그런 공권력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거주자들에게 공권력이란 자신의 집단을 무너뜨리려는 외부 세력이며, 그들을 반동으로 규정하며 탄압하는 거대한 힘으로 비춰집니다.

 

(P20). “존노가 자백을 안 하고 있어. 아직 물증도 없고 (중간생략)내일쯤이면 진짜 경찰들이 클레이브 안에 우글거릴 거래. 그럼 모든 게 달라질지도 몰라.”

(P25). 나제아는 어려서부터 도그(Dog)를 두려워하며 자랐다. (중간생략)그녀는 클레이브라는 공동체의 존재가 미약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들은 ‘도그(Dog)’라는 탐지로봇을 보내 주민들을 수사합니다. 거주자들이 그들을 적대하는 것을 인지하기에, 로봇이라는 수단으로 거리를 두는 셈입니다. 나제아는 그런 공권력의 도구가, 자신들의 미약한 집단을 파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공권력이 강대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부르짖는 집단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죠.

 

(P34). “클레이비스트들은 항상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도그(Dog)가 말한다. “보안 드론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없고! 모격자 절반은 중독성 약물에 취해 정신이 흐려져 있고! 하지만 걱정 마, 나디. 이 살인범은 우리가 반드시 잡을 테니까. 보장 할게!”

(P36). “존노가 테이를 죽였어요.” 도그(Dog)가 홀로그램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너의 의심은 접수됐어, 나디. 걱정 마. 존노 퀴퍼리스는 내가 인터뷰할 열일곱 번째 사람이거든. 우리가 끝까지 파고 들면 진실이 나올 거야. 우리가 얼마나 오래 파야하든지 간에 말이야.”

 

이런 불안은 공권력이 ‘클레이비스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한 몫 합니다. 공권력이 정의하는 이 자치구역은, 말 그대로 무법지대입니다. 보안 드론, 감시 카메라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배제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 공백을 ‘전체(Whole)’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짐작의 영역이지만, 현시점에서 ‘전체(Whole)’는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염증에 가깝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파고 들면 진실이 나온다? 공권력이 파내고(Dig) 싶은 것은 사회 구석에서 힘을 키우는 ‘전체(Whole)’의 존재라는 것도 당연하겠죠.

 

(P97). “경찰은 이 사건을 최대한 질질 끌 거예요, 존노. 데이터를 잔뜩 먹어치운 뒤엔 이 일을 핑계 삼아 클레이브를 위험하고, 불안정한 무법지대로 몰아갈 거고요.”

 

즉, 존노가 벌인 살인사건은 공권력이 그들을 침범하고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셈입니다. 존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모든 과정 또한, 그들이 사는 ‘전체(Whole)’를 주장하는 것을 넘어, ‘전체(Whole)’를 공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발악에 가깝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공격은, 내부에서 스스로를 뭉치게 만들 힘을 만듭니다. 그것이 작품 내에서는 ‘전체(Whole)’라는 이름으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그 ‘전체(Whole)’를 벗어났던, 혹은 벗어나려고 하는 존노와 나제아 같은 인물들을, 거주지를 무너뜨리려는 공권력과 동등한 무언가로 취급하고 있죠.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이 작은 세계는, 냉정히 말하면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공권력처럼 그들을 ‘곤란거리’로 취급하며 사회 시스템으로 재단하려는 시도가 지지를 받을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전체(Whole)’의 힘을 키워주고 의지하게 만드는 것 또한, 그런 집단 외부에서 오는 사회 시스템의 재단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사회는 해당 집단의 균열을 찾으며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반복하며, 그것이 집단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에 대한 소통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거주자들을 그들을 해치려는 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힘을 ‘집단’이라 규정합니다. 그 ‘집단’은 공격을 받을 수록 단단해지고, 구성원들에 대한 의미마저 선명해집니다. ‘전체(Whole)’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야말로, ‘전체(Whole)’가 힘을 받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P116). “……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생부라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엄마를 죽여버렸다는 사실이 아나톨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생각했겠지. 그래서 자백을 안 했던 거야. 그래서 결국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선택을 한 거지.”

 

작중에서 존노는 이런 사회 시스템을 이용하며 자신의 결말을 선택합니다. ‘전체(Whole)’라는 집단을 무너뜨릴 수도 있던 선택을 고수하던 끝에, 오히려 자신이 믿는 또 다른 가치를 선택하며 죽음을 맞이하죠. 이 죽음으로 인해 ‘전체(Whole)’는 그 형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되찾습니다.

 

(P124). 그녀는 씨앗 굴착기가 흙 위를 천천히 튀며 작은 비밀들을 하나씩 묻어두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클레이브 바깥을 끝도 없이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고 추적하는 도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물론 존노의 죽음이 ‘전체(Whole)’를 안전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결말은, ‘전체(Whole)’를 지키기 위해 그의 죽음조차 땅에 묻어둬야 할 비밀로 취급하는 현 집단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하죠. 공권력은 여전히 그 집단을 무너뜨릴 틈새를 찾고 있습니다. 만일 그 틈새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묻어야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종말에 그들이 믿는 ‘전체(Whole)’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을 끝으로, <클라비스트 자치 구역 살인사건>의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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