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육체에 대한 소란스러운 웅변 <맑시스트> 감상

대상작품: 맑시스트 (작가: 김상원,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1일전, 조회 11

누군가의 육체가 곧 그 사람의 인생과 자아를 결정한다는 주제야말로,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 하고 스러지는 것이 당연한 인간들에게 무척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온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장 지금 세대까지도 웹툰과 영화를 가리지 않고 쓰이는 주제인 만큼 공감이 쉬운 것도 한 몫 합니다. 넷플릭스 영화 <왓츠 인사이드>같은 작품 또한 작년에 공개되었다는 걸 떠올리면, 다른 누군가의 육체로 살 수 있다는 그 그릇된 욕망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번에 읽은 <맑시스트> 또한 이런 흐름을 타고 욕망을 매력적으로 꼬집는 작품이었습니다. 육체를 빌리고 공유할 수 있다는 어느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며, 그것을 곧 자아의 통합이라는 거대한 주제로 연결시키는 솜씨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어수선하고 예의가 거세된 화자의 말투와 더불어, 사건에 휘말리는 동기 또한 진부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육체’라는 절대적인 소유권의 상징을 마치 세입자가 오고가는 물건처럼 표현하는 익살스러움은 작품에 몰입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유난히 소란스럽고 삐걱거리는 결말 또한 누군가에게는 코웃음만 삐져나오는 장면이 될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눈이 번뜩 뜨이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소설의 첫인상에 비하면 흐름 자체가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육체에 대한 고찰을 가볍고 유머스럽게 비트는 비유는 흥미가 동하면서도, 결국 이 작품이 작가의 시선과 고찰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어수선해지는 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확하고 구체화될 수 있는 소재들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것이 얼마나 효과를 봤는가는 둘째치더라도, 작가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사이 소설로서의 인상은 누군가의 웅변으로 변질됩니다. 당장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사회비판에 대한 시선이 등장할 것을 예상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작가는 오로지 그 시선 하나에만 집중하며 구성을 망가뜨리는 선택을 한 셈입니다. 좋게 말하면 작품의 방향이 뚜렷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그 방향이 작가 본인이 다루기에는 힘이 모자르다는 고찰 자체가 부족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자꾸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흐름을 깨는 화자의 독백은 덤입니다.

 

즉, 작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형태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소재에 담겨 있습니다. 자아를 비롯한 사상적 이야기는 손에 담기지 않는 액체나 마찬가지로 느껴집니다. 결국 그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 또한 보이지 않는 액체를 컵에 담아놓고 박물관처럼 전시하는 일차원적인 행위로 나타납니다. 결국 저 같은 독자로서 가장 공감하기 힘든 주제가 아이러니하게도 ‘맑시스트’라는 제목 그 자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차라리 혹자가 참신하다고 평가하는 그 소재 하나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구성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달아봅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멋진 작품 보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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