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미영 씨의 딸은 행복할까?
– 본문 <P60, P61>
1.『순수문학』 몰락에 대한 단상
2.『무영등』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 ‘H’
3. 무영등이 필요한 겨울의 『그늘』 ‘Y’
1.『순수문학』 몰락에 대한 단상
저로서는 ‘순수문학’이라는 분야가 몰락을 걷는 추세라며 단정하는 발언이 다소 난폭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순수문학’이라는 분야가 ‘소설을 쓴다’는 행위의 디폴트값으로 여겨지던 시절을 떠올리면, 요즘 ‘순수문학’이 발을 펼 자리가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 무례한 발언에 누군가는 ‘한강’ 작가와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로 자국 문학인의 자존심을 채워준 사실로 반박하겠습니다만, 근래 ‘한강’ 작가 이외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낸 순문학인이 누구인가 하면……, 글쎄요? 떠오르는 작가가 마땅히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척도를 ‘순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이름을 듣게 되는’이라고 가정하면,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합니다.
사실 이런 순문학 몰락의 추세가 굳이 우리 문학계로 한정할 일은 아닙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순수한 문학의 추구’라는 말이 고지식한 울림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이런 흐름의 원인을 장르문학의 대세와 웹을 통한 읽을거리의 대두에서 찾곤 합니다만, 저는 순수문학을 다루는 작가들의 태도에서 그 문제를 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은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행위이고, ‘그림’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라면, ‘소설’은 남이 읽어주기를 바라기 위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목적에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소설 자체의 흥미, 장르적 재미, 그리고 작품에 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그러합니다.
다만 한국에서 보여주는 ‘순수문학’이라는 장르는 그 의도로 모든 것을 평가받고자 하는 흐름이 명확했습니다. ‘순수문학’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정의됩니다. 인간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만, 그 인간에 담긴 목소리 외에는 전부 잔재주로 취급하는 경향이 심했죠. 물론 ‘윤이형’ 같은 작가가 환상성으로 장르적 재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제가 만나고 얘기한 여느 작가들은 그런 시도 자체를 미적지근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대놓고 말하곤 했습니다. 비약이 심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순수문학의 장을 줄이고 좁힌 건 그 문학에 몸을 담고 있는 작가들이었던 셈입니다.
서두가 지루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무영등>이라는 작품을 소개하자면, 이런 순문학적 태도와 한계를 크게 벗어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평범한 인간들을 조명하는 소재도,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며 주장하는 태도도, 더 나아가 작품에 담긴 의도 또한 담담하며 또 울림만큼은 단단해야한다는 목소리 또한 선명했습니다. 작품 외적으로도 웹이라는 매체를 고려하지 않고 문단을 나누지 않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거나, 큰따옴표로 대사를 구분하지 않는 특유의 불친절함은 작품의 대상이 독자가 아니라 작가 본인에게 있다는 반증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주연의 이름을 H와 Y라는 이니셜로 생략하는 것 또한 순문학적 의도가 가득했습니다. 요즘 소설에서 인물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얼굴을 주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고, 얼굴이 없는 인물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흔히 보이는 ‘인간’과 다름없다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이 작품을 어떤 잘 만들어진 논문을 해석하는 감각으로 읽었습니다.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에 해석을 달아두며 작가님이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썼던 시간에 가까웠죠. 뒤로 이어지는 글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독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까우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2.『무영등』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 ‘H’
우선 제목으로 소개하는 ‘무영등’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무영등 (無影燈) –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등불
실제로 무영등은 수술실 등에서 환부를 명확하게 비추기 위해 사용되는 특수 조명으로, 수술 부위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두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영등은 ‘그림자(그늘)’를 없애는 데에 목적이 있으며.
둘째, 그 무영등이 필요한 대상은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라는 것입니다.
작중에 나오는 ‘H’는 이런 무영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신문기자와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다는 심도 있는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직업들의 속성은 명확합니다. 그들이 다루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인간과 사회를 주목하고 있으며,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데에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죠. 즉. H는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넘어,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등장 또한 독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사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등장은 ‘Y’가 사는 집의 현관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P3). … 그건 전날 늦은 시간에 퇴근한 Y가 배달 앱으로 주문한 뒤 그대로 잠들어버린 탓에 하루 넘도록 방치된 떡볶이였다. 그걸 다음날 들고 들어와 먹을 기분은 들지 않았기에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었다. 남자는 사실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배달한 음식이라고, 그대로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우물거렸다.
H는 자신이 배달한 음식이 현관 앞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집주인의 사정을 걱정했다고 서술합니다. 사실 그의 관심은 거리를 두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참견이 많은 편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얼굴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상대에게는 충분히 부담이 될 수 있는 행위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H의 행동은 사소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을 은연중에 어필합니다.
그런 H의 인물상을 구성하는 가장 큰 사건은, 그가 몸 담았던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습니다. H는 선배의 부름을 받고 촬영에 합류합니다. 다큐멘터리는 몸을 파는 여성이 모여 있는 집창촌의 생활을 조명하는 기획을 담고 있었고, 촬영현장에 도착해 목격한 것은 목소리만 커다란 군중의 모습이었습니다.
(P21). … 은밀했을 그곳에 들어선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색의 조끼를 맞춰 입고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모여 있었다. …(중간생략)… 사람들 옆에는 ‘범죄자 만드는 집창촌 폐쇄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든 무리는 … (이하생략)
사실 매춘부라는 소재가 사회에서 그늘로 밀려난 여성들을 조명하는 대표적인 소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 자체가 익숙한 만큼 너무 노쇠한 소재라는 지적을 감수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옛날과 다르게 성매매 자체가 불법으로 단속되는 시대에 집창촌이라는 소재 자체도 현시점에는 이질감이 심한 편입니다.
하여튼 H가 목격한 것은 그런 그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었습니다. H의 시선에서 관찰되는 군중의 모습은 다소 난폭하게 그려집니다. 그 행위가 사회에서 용인되는 정의에 부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그들 자신에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들의 행위는 누군가를 위한 선의가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저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관련된 모든 것들을 배제해야한다는 목소리만을 드높이고 있을 뿐이죠. 비록 ‘인권 보호하라’는 목소리가 섞여 있으나, 그 목소리를 받아야할 이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 또한 거둬낼 수 없는 그늘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H가 주목하고 있는 ‘미영’은 그 그늘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해당 시위가 벌어지는 집창촌에서 일하는 주민 중 하나였죠.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그녀의 피해를 조명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P22). 몇 주 전 새벽, 작은 화재가 한 업소의 절반을 태웠다 …(중간생략)… 문제는 그곳에서 지내던 미영 씨였다. 집이 없어 손님을 맞던 방에서 잠든 그녀는 가게를 빠져나오다 튄 불똥을 맞는 바람에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미영의 존재는 H가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동정인지 사명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H는 본인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에서 그녀의 피해를 조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영과 관계를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얼마 후에 그녀가 ‘연서’라는 아이를 낳아 생활을 영유하고 있단 것을 알게 됩니다.
(P46).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거든요. 근데 연서 덕분에 이유가 생겼던 거 같아요. 사는 이유, 돈을 버는 이유, 그런 거요. 혼자 오신다고 들었을 때, 이 얘기를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여러 사람이 들으면 부끄러운 이야기라서요.
그녀가 H에게 은밀히 보낸 신뢰는 또 다른 사명을 새겨주는 역할이 됩니다. 취재가 끝나고 얼마 뒤, 미영은 그날 화재와 관련되어 있던 남자에게 학대를 당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 순간, 미영은 H에게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P50).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문장이 전부였던 메시지는 모텔에 들어가기 직전에 보내진 것이었다. …(중간생략)… 그녀가 무슨 심정으로 남성을 만나기로 했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H로선 도무지 집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H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각성의 계기가 됩니다. 다큐멘터리에 미영의 사정을 공개하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다지기 시작하죠. 하지만 촬영본과 취재 자료를 들고 찾아갔을 때, 냉담한 반응이 그를 거부합니다.
(P52). 그럴 거면 소설을 쓰러 가.
소설은 허구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 본인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재현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죠.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오로지 보이는 현실을 조명하는 매체입니다. 문제는 제작진 측에서 보여주고 싶은 현실과, H가 보여줘야만 한다고 믿는 현실의 괴리감에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쓰러 가’라는 말 또한, H의 목적인 그 이상적인 의도에 너무 많은 것이 치중되어 있다는 비난에 가까운 말이 아닐까 해석됩니다.
(P53). 어쩌면 H는 이런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미영 씨가 처한 끔찍한 환경과 그 한가운데서 발버둥 치는 그녀의 처절하고도 숭고한 모습을, 그것을 끝내 외면한 다큐멘터리의 비겁한 태도를…(이하생략)
작중에서 H의 고뇌와 죄책감은 그를 완성시키는 가장 커다란 원동력이라는 생각도 됩니다. 매력적인 것은 그런 요소들이 H라는 인물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작은 계기를 보여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드리운 그늘과 그림자를 거둬낼 수 있는, 한 명의 ‘무영등’으로서 역할을 쫓는 H라는 인물은, Y의 시선에서 작게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3. 무영등이 필요한 겨울의 『그늘』 ‘Y’
Y라는 인물의 첫 등장을 떠올려보면, 그녀의 비틀거리는 인생이 엿보이는 듯합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기껏 주문한 음식을 식어버릴 때까지 문 앞에 방치하고, 그 이유를 ‘기분이 아니어서’라는 말로 설명하는 무신경함도 엿보입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넘기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이런 생활에 익숙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다소 구체적인 사건으로 제시되는 H의 캐릭터에 비하면, Y의 캐릭터는 무척 평범함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는 고민과 사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뜻밖의 흐름보다는, 그녀의 일상과 과거가 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설명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마치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사회인에 가깝습니다. 좋게 말하면 공감이 될 수 있는 인물, 나쁘게 말하면 특별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에게 H는 다소 돋보이는 존재가 됩니다.
(P7). 별별 이유로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 있었고 언제까지고 그런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체념이 더욱 Y를 힘들게 했다. …(중간생략)… 그나마 일주일에 두 번 정도 H와 늦은 저녁을 함께하게 된 것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P8). 그래도 해야지,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그런 대꾸가 돌아오리라 예상했다. …(중간생략)… 하지만 H에게서 돌아온 건 괜찮다는 말이었다. 지쳐 보인다고, 그러니까 쉬어도 될 거라고. 너무 의외의 대답이어서였을까. Y는 울음을 참지 못 했다.
서술을 훑어보면 Y는 무언가를 기대하면서도 그것을 바라지 못 하는 어중간함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일이 힘들 때 조금 쉬는 게 어떠냐는 당연한 말을 받지 못 해서, 그것을 영유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죠. H는 Y에게 필요한 것을 줍니다. 그것이 Y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이유입니다.
사실 독자 입장에서 Y의 과거에 너무 많은 것이 몰려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에 빠져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던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떠난 언니의 존재, 아버지의 재혼, 그녀로서 의미를 찾기 힘든 사회생활까지……. 그것이 없을 법한 일은 아니라며 단정할 수는 있겠으나, 소설속의 그녀의 인물은 그늘 위에 그늘을 덧씌우는 듯한 부담스러움이 작용합니다. 결국 본문에서 Y를 그리며 떠올리는 것은 그녀가 겪은 시련이 아닌, 밑도 끝도 어두운 무언가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그런 Y이기에 H라는 존재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 H는 필요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H가 찍었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그늘을 자각합니다.
(P61).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시점에는 이미 내용 대부분이 Y의 머릿속에서 휘발되었고 모자이크와 목소리 변조 너머 딸의 이야기를 꺼내던 미영 씨만이 남았다. ᄄᆞᆯ이 모든 이유라 말하던 미영 씨에게 Y는 연민 대신 부러움을 느꼈다. …(중간생략)… 어쩌면 미영 씨의 모습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H가 다큐멘터리로 미영이라는 인물의 그늘을 조명하려고 했었으나, 의도치 않게도 그 이야기로 조명하게 된 것은 그 이야기를 접한 Y 본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작중에서는 Y가 미영의 이야기가 본인의 부모님과 닮았다고 말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미영의 모습을 이상적인 부모로 간주한 미영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Y는 부모님에게 그런 헌신을 받기보다는, 그녀를 가족에서 밀어낸 원흉으로 작용했습니다.
(P63). … 정말이지 맥락 없는 순간에 자신의 엄마를, 죽은 언니의 이름을 외치며 오열하던 모습을 속절없이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찾아온 건 이런 생각이었다.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행복했으려나?
해당 구절은 노골적으로 H가 미영의 딸을 떠올리며 던졌던 물음과 겹치도록 의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Y의 대사는 태어나지도 못 하고 떠난 제 언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삶을 그려보는 과정처럼 다가옵니다. ‘살아있었다면 행복했으려나?’라는 질문은 ‘언니가 나랑 똑같은 삶을 살았어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으로 읽히기도 하죠.
여기서부터는 본문에 없는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결국 Y가 부러워하는 것은 해당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입니다. 적어도 목소리를 담고, 얼굴을 담고, 끝내 그것을 그늘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를 말입니다.
‘무영등’으로 비춰질 Y의 인생은 조금 더 밝은 색을 칠할 수 있을까요? 여백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상상하며 비루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인상 깊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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