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만 지는 인생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무영등> 공모(감상)

대상작품: 무영등 (작가: 권선율,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6시간전, 조회 7

 

그래서 미영 씨의 딸은 행복할까?

– 본문 <P60, P61>

 

 

1.『순수문학』 몰락에 대한 단상

2.『무영등』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 ‘H’

3. 무영등이 필요한 겨울의 『그늘』 ‘Y’

 

 


 

 

1.『순수문학』 몰락에 대한 단상

 

저로서는 ‘순수문학’이라는 분야가 몰락을 걷는 추세라며 단정하는 발언이 다소 난폭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순수문학’이라는 분야가 ‘소설을 쓴다’는 행위의 디폴트값으로 여겨지던 시절을 떠올리면, 요즘 ‘순수문학’이 발을 펼 자리가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 무례한 발언에 누군가는 ‘한강’ 작가와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로 자국 문학인의 자존심을 채워준 사실로 반박하겠습니다만, 근래 ‘한강’ 작가 이외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낸 순문학인이 누구인가 하면……, 글쎄요? 떠오르는 작가가 마땅히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척도를 ‘순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이름을 듣게 되는’이라고 가정하면,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합니다.

 

사실 이런 순문학 몰락의 추세가 굳이 우리 문학계로 한정할 일은 아닙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순수한 문학의 추구’라는 말이 고지식한 울림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이런 흐름의 원인을 장르문학의 대세와 웹을 통한 읽을거리의 대두에서 찾곤 합니다만, 저는 순수문학을 다루는 작가들의 태도에서 그 문제를 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은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행위이고, ‘그림’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라면, ‘소설’은 남이 읽어주기를 바라기 위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목적에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소설 자체의 흥미, 장르적 재미, 그리고 작품에 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그러합니다.

 

다만 한국에서 보여주는 ‘순수문학’이라는 장르는 그 의도로 모든 것을 평가받고자 하는 흐름이 명확했습니다. ‘순수문학’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정의됩니다. 인간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만, 그 인간에 담긴 목소리 외에는 전부 잔재주로 취급하는 경향이 심했죠. 물론 ‘윤이형’ 같은 작가가 환상성으로 장르적 재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제가 만나고 얘기한 여느 작가들은 그런 시도 자체를 미적지근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대놓고 말하곤 했습니다. 비약이 심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순수문학의 장을 줄이고 좁힌 건 그 문학에 몸을 담고 있는 작가들이었던 셈입니다.

 

서두가 지루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무영등>이라는 작품을 소개하자면, 이런 순문학적 태도와 한계를 크게 벗어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평범한 인간들을 조명하는 소재도,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며 주장하는 태도도, 더 나아가 작품에 담긴 의도 또한 담담하며 또 울림만큼은 단단해야한다는 목소리 또한 선명했습니다. 작품 외적으로도 웹이라는 매체를 고려하지 않고 문단을 나누지 않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거나, 큰따옴표로 대사를 구분하지 않는 특유의 불친절함은 작품의 대상이 독자가 아니라 작가 본인에게 있다는 반증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주연의 이름을 H와 Y라는 이니셜로 생략하는 것 또한 순문학적 의도가 가득했습니다. 요즘 소설에서 인물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얼굴을 주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고, 얼굴이 없는 인물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흔히 보이는 ‘인간’과 다름없다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이 작품을 어떤 잘 만들어진 논문을 해석하는 감각으로 읽었습니다.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에 해석을 달아두며 작가님이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썼던 시간에 가까웠죠. 뒤로 이어지는 글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독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까우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2.『무영등』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 ‘H’

 

3. 무영등이 필요한 겨울의 『그늘』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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