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억 원대에 달하는 최고급 주상복합에 최근 ‘이상한’ 부자들이 연달아 입주합니다. 신체의 절반을 인공으로 개조한 여자, 얼굴과 양손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남자, 세 자녀가 모두 실명한 가족, 목이 한쪽으로 꺾인 여자, 얼굴에 낙서 같은 문신이 새겨진 남자가 그들이죠. 그리고 저는 ‘이상하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 작가들이 아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독자에게는 저런 특징 중 일부가 삶의 기본 조건이기도 할 테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은연중에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끝없이 고민하는 자세는 작가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물론 작중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세계관을 특정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짐작은 합니다만, 그래도 아래와 같은 문장은 사실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봐요. 저는 이 문장이 왜 필요한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평생 피부 시술에 돈을 처들여온 KIM 여사가 혀를 찼다.
이야기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가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막대한 부를 얻는 대가로 나의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가. 만약 그 대가라는 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의미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규범적인 답변이 존재하긴 하겠지만, 그건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이 이런 선택지를 받아 들 기회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그냥 사고 실험의 영역인 거죠.
주인공 재규는 경제적 약자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취한 세계관에서 경제적 약자는 사회의 최종적 약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재규에게 어느 날 거짓말처럼 선택의 기회가 찾아오죠. KIM이라는 남자가 돈 많은 노인들의 유희에 재규를 초대한 거예요. 게임의 대상으로 참가하면 원하는 만큼의 부를 손에 거머쥘 수 있습니다. 물론 웬만한 게임으로는 이 타락한 노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노인들이 원하는 것은 가난한 젊은이에게 필요한 돈을 주는 대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손상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냥 재미를 위해서고요. 따분해진 노인들이 삶의 끝자락에서 자극적인 유희를 즐긴다는 설정이죠.
공교롭게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더 게임>(2008)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과 소재는 물론이고 인물 설정과 구성도 비슷해요. 단, 영화에서는 노인이 젊은이에게 게임을 제안하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정작 게임 자체는 별 재미도, 의미도 없죠. 영화에서 게임은 노인이 젊은이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반면 이 소설에서는 게임이 아주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젊은이에게 손상을 입혀 자기네 돈의 위력을 평생 각인시키는 것이 게임의 내용이자 목적인 거예요. 훨씬 심플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는 임팩트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재규가 이 게임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조금 맥이 빠집니다. 취업 면접 합격 소식에 솔깃했던 마음이 금세 제 자리를 찾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애초에 이런 게임 제안에 흔들릴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소설 밖으로 한 발짝만 나와서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이 은밀한 게임을 공권력에 제보하지 않는 것도 의아하죠. 결국 나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안도하고 마는 인물이라는 얘긴데, 그런 인물상을 보여주기 위해 자본주의에 관한 오랜 질문을 꺼내 든 것이 제겐 그리 유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