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부분은, 지난 2005년에 [피를 마시는 새]의 출간이 이루어진 후 영도 님의 장편 후속작이 나오지 않는다는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독자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앞세우고 있는데, 그렇게 나오는 이야기로는, 하이텔이 없어진 후에 연재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 표면적인 핑계를 앞서 두고는 계속 연재를 구상하는데 작품의 전개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쨌든, 작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는 아무 것도 없는, 저같은 호사가들의 근거없는 이야기와 함께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을 듯 싶기도 합니다.
한편 독자로서는, 혹여 이제는 작가의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지지 않았나, 라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독자이니, 작가가 작품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곳까지 그 염려가 더해지는 법이며, 그러다보니 이제 작품으로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우려에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영도 님은, [드래곤 라자]-[퓨처 워커]-[그림자 자국]과 [눈물을 마시는 새]-[피를 마시는 새]로 이어지는 두 곳의 다른 이야깃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버 더 호라이즌]-[오버 더 네뷸러]-[오버 더 미스트]와 함께 [오버 더 초이스]로 이어지는 정말 매력적인 세계도 하나 가지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계인 일곱 선장과 일곱 하이마스터들의 세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깃감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쓰지 못할 일은 없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카쉬냅 백작 더스번 경 칼파랑(과 사란디테)의 이야기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밑으로는 당연히 이야기의 내용이 있으므로, 혹여라도 아직 이야기를 읽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의 추이 혹은 결말을 알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이 밑으로 스크롤바를 내리시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단… [에소릴의 드래곤]은 딱히 무슨 반전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런 판단은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다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꾸벅)
이 이야기는 에소릴의 드래곤인 란세델리암이 나리메 공주를 납치하면서 시작됩니다.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왕의 기수이자 왕국의 기사인 카쉬냅 백작 더스번 경이 곡괭이 한 자루 비켜들고는 말 한 마리 거느리지 않고 홀홀단신 공주의 구출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 더스번 경은 오만가지 추문(!)을 안고 사는 천하의 무뢰배입니다. 팔비노 교의 성녀를 겁탈했으며, 평민에게는 귀족이라는 이유로, 귀족에게는 귀족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반란을 처리한 후에 그 수급을 나리메 공주에게 덩그러니 보내버리는, 그러나 싸움은 또 그렇게 잘 할 수 없어서 연전연승 이기지 못하는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리메 공주는, 란세델리암에게, ‘나는 더스번 경의 트로피가 되고 싶지 않다’고 강변하면서, 놓아달라고 애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은 사란디테와 조빈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름달을 보면 (여자)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사란디테와 (남자) 사슴 인간으로 변하는 조빈. 그리고, 그 둘은 필연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조빈은 그 사랑이 변할까봐, 그 사랑이 거짓일까봐 겁을 내며 사란디테를 떠나려 하고, 사란디테는 그 사랑에 빠져 그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 몰입하고 목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란세델리암에게 잡혀 있는 나리메 공주와 조빈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의기투합 – 응? – 해서 함께 에소릴에 잠입하고, 그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다르게,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드래곤 몰래 공주와 조빈이 잡힌 공간까지 가서 그 둘을 구출해내기 직전에 이르릅니다.
나리메 공주가 더스번 경을 오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만 않았다면, 조빈이 사랑에 비겁하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네 사람은 몰래 에소릴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빈은 사랑에 비겁하다 못해, 사람에게도 비겁합니다. 란세델리암의 설득에 실패하고 결국 잡아먹힐 지경이 되자, ‘몰래 다녀간 사람이 있다’라고 드래곤에게 꼰지릅니다. 명목은, 나리메 공주를 잡아먹으려는 드래곤의 시선을 뺏아보려는 처량한 시도이지만… 결국은 사랑도 배신하고 사람도 배신하는 그런 짐승같은 행동입니다. 나리메 공주는
‘너는 후식이야.’
라고 그런 비겁함에 일갈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고 형편을 재며 상황을 살피는 그런 것과는 정 반대의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도, 형편도, 상황도, 그 어떤 것이라고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연인에 대한 사랑이 그런 것이며,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의 양은, 실은 조건과 형편과 상황에 따라 그 모양이 조금씩 달라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양은 변함 없습니다. 덜 사랑하는가 더 사랑하는가는 없습니다. 사랑하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이죠. 조빈은 사란디테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조빈은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았기에, 사란디테는 조빈과 함께 보낸 나날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조빈을 구하기 위해 그 험한 에소릴까지, 그 극악무도한 더스번 경과 함께 잠입하게 되지만, 실은 사란디테도 조빈에게 속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조빈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람을 배신합니다. 사랑할 수 없다고 버리는 것은 짐승이나 할 짓입니다. 우리 사람은, 비록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지는 않습니다. 혹시라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것이죠. 금수만도 못하다, 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혹여라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존중하기라도 하라는 것이죠. 나리메 공주는 그랬고, 조빈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의 맹목적인 사랑 – 대상과 공명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만 몰입해 있는 – 의 원인이, 사란디테가 스스로를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조언합니다. 실은, 사란디테도 조빈과 같은 부류였다는 것이죠. 사랑을 배신하는 것과, 사랑을 맹신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상대편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결국 사란디테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길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에소릴의 드래곤에게 승리한 댓가로, 사란디테는 월장석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랑의 또다른 주체인 상대편을 쳐다보려면, 사랑의 주체인 나를 먼저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야겠죠. 그 모습이 아무리 형편없고 똑바로 응시하기에는 너무 힘든 모습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월장석이 필요합니다. 나의 또다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쳐다볼 수 있어야 하는 그런 매개물 말이죠. 누구나에게 그런 월장석 같은 것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사란디테처럼 더스번 경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얻게 될 것입니다.
더스번 경은 나리메 공주를, 사란디테는 월장석을 전리품으로 챙겼다면, 나리메 공주는 왜 조빈을 전리품으로 챙겼으며, 그런 조빈을 방치한 채로 그 곳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더스번 경의 트로피 양보욕을 충족시켜 주면서도, 자신은 그런 ‘짐승’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라고 하면 작가의 생각을 맞게 읽은 것일까요? (흐음)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