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의 비의를 찾아 떠나는 대혐수의 모험은 계속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가 어쩌네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만 그게 뭐냐… 라는 건 어물쩡 넘어가곤 했어서 요번에는 좀 짚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냥 쉽게 “일상물”이라고 장르를 제시해도 될 것 같지만, 요즘은 일상물이라는 장르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죠. 느긋하고 태평한 미소녀들이 나와서 소소한 4컷만화적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것을 일상장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 반대로, 드라마틱이 있는 이야기는 뭘까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영웅서사라는 측면, 둘째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라는 측면입니다.
영웅서사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다시 영웅서사의 주인공은 어떤 주인공인지, 영웅서사를 성립하는 세계는 어떠한지, 이렇게 또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우선 주인공 캐릭터 측면입니다. 영웅서사의 주인공은 비범한 영웅이죠…
비범하다는 건 단순히 출생이 비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가령 처음엔 “평범한 주부다”라고 소개했던 캐릭터라 할지라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면 중반에 도달하기 전 명탐정으로 각성하는 순간이 제시될 테고, 그 시점부터는 이미 평범한 주부가 아니라 누구도 풀 수 없는 미스테리를 해결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탐정(영웅적 캐릭터)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건 주인공 자체보다도, 어쩌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는 세계의 제시”가 더 핵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주부를 탐정으로 변모시키고, 또 주부가 탐정의 면모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세계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웅서사의 두 번째 측면이겠습니다. 해결할 문제가 있는 세계가 제시되었으면, 오직 주인공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범한 인물이라는 점이 당연히 어필되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개연성 문제로 이어질 것 같으니까요.
이렇게 보자면, 우선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란 건 처리해야 할 문제가 딱히 없는 세계가 제시되어, 딱히 주인공이 영웅적 면모를 갖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겠습니다. 물론 이게 조금 모호한 지점은 있습니다. 가령 주인공 주변의 특이한 사람들을 참아내는 인내력과 선량함(제 작품 『조별과제수업 수브니에』의 주하 같은 경우)도 “영웅적인 면모”가 아닌가? 긁적긁적. 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두 번째 측면으로, 이야기 전개의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연쇄와 상승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작법서에서 나오는 「”그래서”로 이어지는 이야기」 말이죠. 어떤 장면과 사건의 결과는 다음 장면과 사건의 원인이 되고, 그 연쇄는 갈등과 위험을 점점 증진시키는 것이죠. 이 연쇄가 매끄럽고 탄탄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는 사건들이 딱히 “그래서”로 치밀하게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리고”와 “그리고”와 “그리고” 같은, 에피소드들의 병렬 배치가 이어지지 않는가 싶은데요.
이상의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자면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는 목적성이 모호한 에피소드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군요? 라고 묻게 되는데, 사실 그거야말로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있어 꼭 피해야 하는 함정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하고, 인물들의 변화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리고”와 “그리고”와 “그리고”로 이어지는 이야기」 에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저도 이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는데, 이번 글을 위해 고민해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 생각에 에피소드 병렬 배치는 차분한 누적과정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는 실상 드라마틱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누적의 목적은 물론 결정적으로 주인공에게 닥쳐올 중대한 “그래서”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병렬되고 누적되는 이야기들은 너무 소소하고 시시콜콜해서 그 자체로는 “그래서”를 이끌어내지 못하지만, 분명히 “그래서”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는 드라마틱이 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드라마틱이 계속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란 수 없이 병렬되던 “그리고”들이 마침내 결정적인 “그래서”로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갑자기 뒤흔드는 혁명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누적과 기억의 누적에서 발생하는 보다 일상적인 방식의 변화…를 모사하는 것이 드라마틱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문제는, 그 “결정적인 그리고”가 도달하기까지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붙잡아주시는 독자님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것이야말로 드라마틱 없는 이야기를 지향하는 이들의 최대 고민이자 최대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
– 연애 : 연애 요소를 활용합니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가장 일반적인 전략일 것 같습니다. 서서히 연애구도로 변해가는 인물간의 변화는,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서 가장 이질감 없이 도입할 수 있는 드라마틱일 것 같으니까요.
– 에세이 읽는 즐거움 : 일상을 바라보는 통찰과 깨달음 같은, 에세이가 추구하는 기쁨을 제공해줍니다. 일상적인 순간을 꼼꼼하게 관찰하게 되는 드라마틱 없는 이야기의 특성상, 채택하기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 재미있는 캐릭터 : 영웅은 확실히 아닙니다만, 사랑스럽고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하는 캐릭터를 제시합니다. 말하자면 만담가들, 재담가들을 출동시키는 것이죠.
– “그래서”의 순간을 확실히 준비한다 : 가장 필요한 부분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정적인 “그래서”를 위해 독자들이 다소 지루한 “그리고”들을 견뎌왔는데, “그래서”가 시시하면 독자들의 실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건 이 정도군요. 아마 만화라면 수단이 조금 더 있겠습니다. 그림이 예쁜 것만으로 조금 지루한 대목도 느긋하게 감상하고 넘어갈 가치가 생기겠죠. 애니메이션이라면 성우연기와 OST가 같은 기능을 해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야기쓰기가 쉬워진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소설가보다는 활용할 수단이 좀 더 있는 편이긴 하죠.
정리해보겠습니다.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는 사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순간을 위해 지속적으로 드라마틱을 유예하게 됩니다.
– 그러나 이 전략은 일반적으로 독자들을 지루하게 합니다(적어도 흥분되고 긴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루함을 견뎌낼 이유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느냐, 이게 승부처인 것 같습니다.
– 또한 결정적인 “그래서”의 순간을 언제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그래서”의 순간은 단조로움을 견뎌낸 보상으로서 확실해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유예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의 순간은 독자들이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로 아주 적당합니다. 따라서 너무 아끼지만 말고 제때 내보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조별과제수업 수브니에』 에서 “사연 있는 물건과 그 미스테리의 해결”이라는 드라마 요소를 도입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재담가 캐릭터들도 출동시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량의 부족만 입증하지 않았나 싶은데, 결정적으로는 “그래서”가 너무 약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제 슬슬 수브니에도 “결정적인 그래서”를 향해 가는 중이라는 점을 공지해드리며…굽실굽실)
『어린 왕자 자리』는 어떨까요?
이번 리뷰에선 「드라마틱이 없는 “그리고”의 나열」을 어떻게 견뎌내게 하는지, 그 양상을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확인과 검증 :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세계가 제시되는 작품입니다. 천체가 지구로 떨어지고 있…거든요(어째서 있…거든요 인지는 작품을 보시면 압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인문계라서, 진짜로 운석이 떨어지는지 어떤지 정확히 알아볼 학술적 전문성도 없습니다.
허블도 여러모로 신비한 초능력 어린이입니다만, 대기권을 솟구쳐 올라 운석을 빅뱅펀치로 요격해버리는 캐릭터는 아닙니다.
즉, 문제 상황이 있는 세계가 제시되었지만, 그것이 영웅적 주인공의 임무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일단은 제멋대로,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로 판정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의 과정 (1) 무력한 주인공
주인공은 어정쩡한 입장에 놓인 학생입니다. 나이도 많아졌는데 진로도 불투명하고 아르바이트나 근근이 해 나가는 중입니다. 꿈을 잃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일단 울적한 자세로 대응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또한 관찰자이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자기 안에서 혼란스럽게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적 동요를 일일히 관찰해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타입입니다. 물론 1인칭 시점이다보니 그렇게 되는 점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태도가 문학적으로 어떤 성과를 얻어내느냐!겠죠.
주인공은 성숙한 분위기의 사회인과 활기찬 동생 캐릭터와도 조우합니다만, 여기서 연애구도를 섣불리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저는 좀 기대하긴 했었는데요…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식의 인간관계만 이어집니다(주인공이 만남을 대하는 태도가 그런 식입니다). 주인공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건조하고, 만남의 순간부터 허망한 이별을 강하게 전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운석 충돌을 대하는 태도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뭐어어!!!!!! 하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의 이 차분하고 마음속의 방에서 웅크리고 있는 듯한 태도 때문에, 운석 충돌이라는 유서 깊은 비일상적 소재는 겪을 리 없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짜릿함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부담감에 대한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공의 상황에서 말해보자면, 운석은 헛된 바람으로 중요한 시기를 소모해버린 대가… 와 등치되는 것이겠죠. 나이는 먹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과거에 해왔던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던 것 같고, 후회해봤자 돌이킬 방법은 없으며 시간은 봐주는 것 없이 무자비하게 밀려 들어온다. 이미 빛바래고, 시시해지고, 어린 시절 떠올렸던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 확정되어버렸고 주인공은 저항할 방법 없이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가슴을 치는 후회와 아픔이라 한들, 우리는 그런 “운석”에만 얽매이지는 않으며, 그보다는 우리 일상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에 우선 눈이 가고 거기서 만족스러운 행복을 영위하게 됩니다. 혹자는 어리석은 태도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비범한 영웅이 아닌 바에야 대부분 이게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 같습니다.
작중 허블에게 운석 관측의 진위여부를 묻는 대목을 살펴보자면, 저의 이런 해석이 아주 엇나가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부분은 제가 이 작품에서 제일 좋았던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픽션 속에서 가정된 상황을 나의 이야기나 내 주변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야말로, 그리하여, 그로부터 나 자신을 향한, 타인을 향한 연결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보니까요 (반대로 드라마틱한 이야기에서 가정된 상황이란. 일탈의 즐거움으로 독자들을 이끌기 위한 것일 테고요. 어디까지나 일반론입니다만). 그래서 저도 드라마틱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무력한 주인공은 이 작품에 드라마틱이 없도록 공고히 합니다. 그럼에도 드라마틱 없는 “그리고”를 가치 있게 하는 기여도 나름 하고 있는데, 통찰력 있는 사물 서술이 그것입니다. 에세이 읽기 같은 감흥을 선사해주는 것이지요. 물론 이걸 해내는 것은 작가님의 문장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언젠가 다가올 “그래서”의 순간이 있다, 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장치가 없다면 독자를 붙잡아둘 수 있을 가능성은 낮아지니까요.
그 “그래서”를 기대하게 하는 것은 물론 운석입니다. 주인공의 개인사와 등치되는 장치라고 해도 결국엔 운석이 떨어지는 극단적인 순간이 오지 않겠어…? 라는 긴장과 기대, 예측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다만 운석이 독자들에게 “크하하! 나는 운석이다! 지구를 멸망시켜주마! 무섭지!” 하고 위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운석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과 흥분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만약 운석 묘사가 위기감을 유발한다면, 이건 더 이상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앞서 말씀드린 과정을 통해 운석은 그저 관조적인 사색만 제공해주는 정도지요. 그러니 “그래서”의 순간이 오기까지 독자들을 붙잡아 둘 이유, 즉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이야기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그 역할은 허블이 해내야만 합니다.
그래서의 과정 (2) 슈퍼 어린이 허블
어른이 난데없이 신비한 초능력 소녀를 돌봐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선입견에 따라 허블에 대해 이것저것 예측해보겠습니다.
주인공이 매우 건조하고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라, 허블이 이런 주인공의 손목을 잡아끌어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대뜸 이런 낡은 구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일단 주인공과 허블, 두 인물과 유사한 형태의 조합이 과거에 그런 식으로 많이 활용되곤 했으니까요. 더구나 허블처럼 신비한 초능력 소녀…설정의 캐릭터라면 더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 이야기에 꼴사나운 전개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꼴사나운 전개가 있었다면 꽤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요(추가로, 매우 논쟁적인 이야기가 되기도 했겠죠…)? 그렇지 않았던 덕분에 음습함 없이 꽤나 건강한 이야기가 되고는 있습니다만.
그럼 오히려 이렇게 묻게 되는데, 허블은 그럼 뭐 하러 등장해야 하느냐…
허블은 주인공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이어야만 합니다.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는 사실 드라마틱이 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냥저냥 하루하루 흘러가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내 이 작품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허블은 여기 왜 있지? 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데에 허블은 어떤 기여를 하는가…
허블이 등장인물로서 다른 인물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있는데, 주인공이 다른 인물을 대하는 태도와 허블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성애자 남성 주인공 입장에서 꽤나 매력적일 여성 캐릭터 둘과 이벤트가 있어도 연애구도가 쉽사리 성사되지 않을 정도로, 주인공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조차 관조적입니다. 조력자는 “애프터”라던가 “차였다”같은 농담도 계속 사용하는 안정적 수입의 성숙한 연상 여성이며, 대선이는 “어느 날 갑자기 접점이 생기는 씩씩한 연하 여성 캐릭터”로, 연애 관계가 예고된 픽션에서라면 뭔가 기대해봄 직한 캐릭터들입니다만 정말 용무만 딱 보고 보내버린다는 느낌이죠. 정말 필사적인 드라마틱 거부여서 감탄했습니다.
물론, 모름지기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라면 이래야 합니다.
더구나 주인공은 이 인물들에게 별칭을 붙이는데, 단순히 작가님의 유머일 수도 있습니다만 타인과의 관계에 적당히 거리를 두려는 주인공의 태도에 비춰보면… 주인공의 이 특이한 습성은, 속된 말을 좀 쓰자면 아다리가 잘 맞습니다. 남의 이름을 익히기를 일부러 기피하는 듯한 이런 태도는, 주인공이 타인에게 마음을 닫은 인간이라고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허블에게만은 좀 다릅니다. 물론 임시양육자라는 책임감이 달려있다고는 하지만, 허블이 입을 옷을 쇼핑하고, 먹을 음식 메뉴를 신중하게 고르고, 알바 장소에 허블을 데리고 가는 등, 신경 써야 하는 동거인이 생긴 덕분에 주인공의 일상에도 일정 부분 활력이 더해지는 점은 확실합니다. 다른 인물들에게 거리를 두는 주인공의 태도에 비춰보자면 허블에게만큼은 태도가 꽤나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있죠. 아니, 감정 교류나 심지어 스킨십(이상한 의미 아님)에서도, 타인을 대하는 주인공의 일반 방침에 비교하면 허블은 너무나도 특이합니다.
더 논의를 이끌어보기 전에 덜컥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어서 먼저 짚겠습니다. 왜 (주인공의 일상에 활력과 변화를 주는) 역할을 (슈퍼)어린이가 해야 하는가… (슈퍼)어린이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린이 캐릭터를 배제해야 하는가?
물론 허블이 주인공의 마망 역할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 픽션의 설계상 “주인공 내면의 무너진 지점에 대응하기 위해 출현한 캐릭터가 아니냐”라는 의혹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일단 주인공에게는 “실패한 어른이다”라는 마음의 공허함과 상처가 설정되어있고, 다른 등장인물보다도 허블과 가장 긴밀하게 내면 교류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인공에게 결핍이 설정되는 거야 정석적인 작법이고, 또 거기에 대응해서 주변인물과 상황이 설정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마는,
그 결핍에 대응하는 인물이 (슈퍼) 어린이다…라…
이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슈퍼한 어린이들의 활약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욕망이 무척 강하기 때문이죠. 아마도 “픽션을 쓰고 싶어!”라는 욕망을 부채질한 작품이 어린시절 보았던 『번개전사 슈퍼 그랑죠』였던 탓이겠습니다만.
그런데 한동안 “어린이가 활약하는 픽션”에 대한 비판 의견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을 왜 어린이에게 맡기느냐, 매우 퇴행적인 창작 의도다, 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를 때려치우게 하는 어른 악당?의 만화가 SNS에서 크게 호응받는 것도 봤고요.
이런 비판의견에 대한 반론도 있고 저도 이 반론에 동참하는 편입니다만, 애초 이런 비판이 왜 나왔는지 맥락이 이해되다보니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싶은 싱숭생숭한 기분에 곧잘 빠지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어린이가 우주 평화를 위해 활약하는 픽션이라면 어떻게든 반론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른 일개인의 심적 문제에 어린이가 개입하는 건… 이거야말로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자면 허블이 어린이가 아닌 경우를 상상하면, 역시 허블은 어린이어야 했다, 라고 결론 내리게 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건 어쩌면 어린이 캐릭터를 선호하는 제 성향 탓일까요? 만약 이게 제 음습한? 취향 탓이라면 반성할 일이겠으나, 그러나 허블이 할머니였거나, 아니면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의 성인이었다면 분명히 이 이야기는 성질과 느낌이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허블이 어린이였기에 성립된 성취라는 것이 있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슈퍼 어린이 허블을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인정하고, 어른을 위해 출연하는 어린이 캐릭터에 관한 도덕논쟁은 배제하겠습니다(저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럼 허블은 대체 뭐냐? 마망은 아니라 할지라도, 주인공에게 있어 허블이란 뭔가…뭔가 이름을 붙여야 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요정은 어떨까요?
왜 허블이어야만 하는가 – 요정의 역할
저는 허블이 요정 캐릭터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정 유형의 캐릭터라는 것은 제가 황순원 선생님의 『움직이는 성』을 공부할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지연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남주인공1 준태에 비하면 미성숙한 “아기성인”입니다만, 사납게 날뛰는 맹견을 말 한두 마디로 진정시키는 비범성을 보입니다. 말하자면, 슈퍼 소녀입니다. 슈퍼 소녀라는 점은 요정 캐릭터를 성립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이죠.
왜 중요한 요소이냐, 그러한 비범성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정을 필요로 하는 주인공은 그 자체로는 주인공 행세를 못 하는 캐릭터이기가 일쑤입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담당할 비범한 능력도 없거니와, 행동을 촉발할 욕망도 가슴속에 꽁꽁 싸매고 밖에 못 나오게 하니까요. 『움직이는 성』의 준태가 그렇고, 『어린 왕자 자리』의 주인공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요정과 만나는 것도 주인공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연입니다(이 또한 요정 캐릭터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움직이는 성』에서 준태는 헌책방에 책을 팔았다가, 이 책을 지연이가 사면서 인연이 이어집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란 0%에 가깝다고 봐야죠. 허블 역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떠넘겨지는 형태로 주인공과 만납니다.
이런 부동자세의 주인공을 비범함이 없는 캐릭터가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공을 무장 해제시켜서 주인공으로서 동작하게 하는 것이 요정 캐릭터의 임무이며, 이런 임무를 해내려면 슈퍼 소녀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준태에게는 창애라는 아내가 있습니다만, 창애는 평범한 여성이어서 주인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괴로운 과정을 거쳐서 시시하게 끝납니다. 『어린 왕자 자리』에서도 다른 작품 같으면 메인 히로인 자리를 꿰찰 수도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둘씩이나 나오지만 주인공에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한 명은 아예 시도조차 않고, 다른 한 명은 시도했다가 무참히 실패하기까지 하죠…)
반면에 허블은 특유의 슈퍼 능력으로, 주인공이 필요할 때 마중을 나와 손잡고 귀가해주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움직이는 성』의 요정 캐릭터인 지연과 이 작품의 요정 캐릭터인 허블을 본격적으로 비교해볼 의도는 없습니다만, 하나만 더 짚어보자면 둘 사이에 발견되는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주인공 쪽이 (일단은) 어른이라는 점입니다.
왜 주인공이 어른이어야 하나? 이걸 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에서, 어른이 어른으로서 제 구실(?)을 하려면, 어른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탓 아닐까요? 이 부분은 주인공이 관찰자라는 점과 맞물려 더 치열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제가 떠올려 본 것은, 주인공은 울적한 내면의 방에 웅크리느라 자연스레 관찰자가 되었으며, 허블은 존재 자체가 관찰자라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닮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두 사람은 “동일인은 아니지만 별개인은 아닌” 관계로 분석되는 인물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고요.
허블이 관찰자라는 특이한 초능력자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그 초능력 역시 신기하다, 참신하다는 것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것도 드라마틱을 배제하는 요소라고 파악했습니다. 하늘로 솟구쳐 빅뱅펀치로 운석을 요격하는, 일탈적이고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유발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은 어른의 책임을 다 하며 허블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관찰하고), 허블은 관찰자이기 때문에 주인공을 관찰합니다.
관찰이라는 것은 아무리 즉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미 일정 시간 지속된 것을 차후에 살펴보는 행위입니다. 즉 과거를 관측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관찰하는 것은 주인공의 과거가 됩니다. 동일 대상(주인공의 과거)를 동시에 관찰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행적과 과거의 마음가짐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고 세상에 드러납니다.
허블이 어린이이고, 주인공이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돌봐주기 위해 촉발되는 자기 관찰은, 허블의 슈퍼 능력에 의해 입체적인 의미로 재해석됩니다. 두 사람은 관찰자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으며, 동일 대상을 동시 관찰하는 점 때문에 단순 별개인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허블은 단순히 동거인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과거가 생명력을 얻은 모습으로 나타난 화신이며, 그 과거와 직접 대화할 기회를 줌으로써 눌러두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는 녀석입니다. 아마 허블이 주인공 또래거나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면 허블을 주인공의 과거가 육화한 존재라고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허블이 어린이인 설정에서 오는, 그것도 마음에 결핍이 있는 어른과 얽힌 슈퍼 어린이인 데에서 오는 문학적 성취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이 허블에게 과거 추억을 겹치는 대목도 있죠. 그리고 과거가 표면을 비집고 나오게 되는 것이야말로 주인공이 바라왔던,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해야겠죠. 왜 그럴까요? 과거를 실패로 파악하고, 그로 인해 망쳐버린 미래를 감수해야 한다고 좌절했던 주인공에게, 자신의 과거가 다시 현재에 발현하고, 그 과거와 대화하고, 그를 통해 실패로만 보였던 과거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그래서 그 과거에게서 소중한 마음을 느끼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너무나 갈망했던 기회 아닐까요.
허블은 주인공에게 그 기회를 주기 위한 요정인 것입니다. 요컨대, 허블은 허블이 아니었다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을 주인공이 자신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게끔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허블은 요정이고, 허블의 슈퍼 관찰은 위와 같은 작용으로 부동자세의 주인공에게 움직임을 부여하는 요정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허블은 주인공에게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니까요.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라… 라는 말이 굳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는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감정과 인간에 대해 늘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주인공이 허블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고, 심지어 사랑고백(이상한 거 아님…)까지 하는 동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공은 세계에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할 비범함이 없어서, 이 이야기에 드라마틱이 없게끔 합니다. 그러나 허블을 주인공이라고 파악하면, “부동자세의 주인공”이라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비범한 영웅이 됩니다. 이것이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인 『어린 왕자 자리』의 숨겨진 드라마틱이고, 이 드라마틱은 “그리고”와 “그리고”를 축적하여 “그래서”를 향해가는 과정에 독자를 붙잡아두는 장치로써 마련됩니다.
일단 마련은 되어있는데 그것이 독자를 잡아두는지는, 이 작품을 읽는 개개인이 판단하실 부분이라 제가 평가할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에서 이어지는 그래서의 문제
일전에 『40대에 마법소녀로 살기』 리뷰를 쓸 때도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로 이어지는 일상은 얼마나 어떻게 이어가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작가로서는 정성스럽게 배치하는 그 일상들이, 결국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행복감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드라마틱을 배제하겠다 의도했으면 필연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 드라마틱 없는 이야기란 작가만 만족스럽고 독자를 배신하는 허상에 불과한가…
그래서 고민이 깊었었는데, 『어린 왕자 자리』리뷰를 쓰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덕분에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 그럭저럭 결론을 내려볼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에는 사실 드라마틱이 있다” 라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존에 알고 쓴 게 아니라 이번 작품에 대해 고민하면서 얻은 나름의 결론이었습니다. 아마 이것도 잠정적인 결론이고 차후에 수련을 더 쌓으면서 업데이트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드라마틱이 없는 이야기가 “그래서”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드라마틱을 유예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그래서가 결말부까지 기약 없이 유예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의 연속된 과정에서 이 작품을 읽을 만한 가치(통찰력있는 사색적 문장이나 재치있는 캐릭터 등)를 어필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중간에 몇 번쯤은 “그래서”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독자들에게 “이 작품에는 감동적인 그래서 지점이 기다리고 있음” 이라는 신뢰를 주는 과정이 될 수 있도록요.
그러나 그 타이밍을 잡는 건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중간 그래서”라는 것도 참다 터진다는 맛이 있어야 더 즐겁겠죠. 자잘한 일상의 면모, 그 느긋하고 변함없는 생활 가운데에 묘한 불협화음과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배치하여, 이것이 당장은 묻힌 것 같더라도, 사실은 지하에서 끓는 용암처럼 “결정적인 그래서”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 이것은 아주 정밀한 작업이고, 저는 늘상 실패해왔던 것 같습니다.
『어린 왕자 자리』의 경우… 제가 짚어본 “결정적인 그래서”지점은 아마…
운석이 갖는 의미가 “기대했던 미래는 이미 실패가 확정했고 실패한 결과로서의 미래가 무자비하게 닥쳐온다”에서 허블과의 확정된 이별로 의미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아닐까 하고 파악했습니다. 이 대목은 연재분을 상당히 정주행하고서야 나오는데, 이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중간 그래서” 지점이 한두 곳쯤 더 있었다면?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작품에 “중간 그래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 작품에게 너무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대해 이것저것 추가적인 고민거리가 발생하는군요.
그러나 이미 이번 글을 위해 너무 많은 말을 주절거렸고, 분량을 더 늘리고 싶어도 저의 고민도 아직 부족하고, 이 글에 붙들린 시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40대에 마법소녀로 살기』에서 미완했던 고민을 이번 『어린 왕자 자리』에서 좀 더 보완했듯이, 다음번에 만나볼 작품이 저의 고민을 추가로 풀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람을 품으며, 고민이 부족한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해보려고 합니다.
『어린 왕자 자리』는 제가 해내지 못했던 것들 여러가지를 달성해냈다는 점에서 부러운 작품이었고, 고민을 좀 더 다듬을 수 있던 점에서 고마운 작품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껏 긴 리뷰가 달려서 반가우셨을 텐데, 작품 이야기는 하지 않고 제 이야기만 주절거리는 리뷰여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번에도)전해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