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흘산을 마주하고 홍안락은 걸음을 멈추었다.
길은 두 갈래였다.
구흘산을 에둘러 가는 길이 있고, 구흘산 주봉으로 뻗어 있는 산길이 있었다. 산을 끼고 돌면 이틀 반, 주봉을 타고 넘으면 하루 반이 걸릴 것이다.
어머니의 당부가 귓전에 울렸다.
“내 너를 얼음이 녹기도 전에 보내는 것은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니라. 군자는 너른 길로 다닌다 하였으니, 영산을 만나거든 약삭빠르게 협로로 들어서지 말고 그저 대로를 따라 민가들을 둘러서 가라.”
홍안락은 새삼 서운하였다. 질러가겠다고 무리하게 산을 넘지 말라는 당부에서 형보다 먼저 벼슬길에 오르지 말라는 어머니의 의중이 읽혔던 것이다.
지난 가을 초시에서 홍안락은 합격자 240명 안에 이름이 들었으나 형인 홍현락은 낙방하여 홀로 고향으로 내려갔던 터다. 홍안락은 한양에 방을 얻어 복시를 준비하였는데 소설(小雪)을 앞두고 돌연 고향집에서 그를 불러 내렸다. 어머니가 부쩍 입면을 어려워하고 식욕이 없어 걱정이니 어머니 곁에 머물며 공부를 하라는 형님의 서찰이 당도했던 것이다.
고향집에 내려와 보니 어머니는 불면증도 이겨내고 입맛도 되찾은 뒤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한양의 공부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내색치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문안하느라 두어 달 발이 묶였다. 소한, 대한을 지나자 조바심이 일어서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다행히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름길을 두고 돌아가라 함은, 형을 이긴 아우가 길에서 지체되길 바라는 속내가 아니겠는가.
작년가을 형님과 나란히 초시를 보러가던 길에는 구흘산을 돌아갔었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서 자란 형은 엄지손톱만 한 위험도 감수할 줄 모르는 소인배 겁보였다. 하지만 복시를 준비하는 홍안락의 처지에선 이틀 반과 하루 반, 그 하루 차이를 무사할 수 없었다.
흥, 내 보란 듯이 복시 합격자 33인 명단에 이름을 올릴 테다.
투미하기 짝이 없는 장남에게 기대를 건 것도, 귀한 것은 장남에게 골라주고 먼저 주고 넘치게 떠안기며 살아온 것도 어머니의 업이니, 복시 이후의 일들은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홍안락은 봇짐을 고쳐 메며 구흘산 주봉과 능선을 일별했다.
지난가을에는 무심히 지나치느라 몰랐으나 이렇듯 다시 마주하고 보니 구흘산은 흉산이었다. 산이 급히 달아나는 형국이니 풍수에 따르면 죄를 짓고 도망다니는 자손이 태어날 땅이었다. 또한 사각(砂角)이 험준하고 바위에 험한 살기가 감도니 불순한 자손을 배출할 산세였다. 듣기로 구흘산 안에도 민가가 더러 있다는데 오죽 무지하고 빈천하면 저런 곳에 뿌리를 내렸겠는가. 홍안락은 혀를 차며 구흘산으로 들어섰다.
산에서는 일찍 해가 지고, 산 아래 민가보다 시린 바람이 분다고들 하나 내일이면 입춘이 아닌가. 봄은 낭자들의 혈색만 돋우는 게 아니었다. 노소남녀 누구나 초라니 광대처럼 엉덩이가 들썩여지고 비루먹은 강아지조차 꼬리를 흔들며 녹는 땅 냄새를 맡고 다니는 게 봄이었다. 그러니 상서로운 봄기운은 홀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도 너끈히 품어줄 터였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객줏집 젊은 아낙이 싸준 주먹밥을 먹었다. 간밤에 묵었던 봉놋방은 이부자리와 토벽에서 누린내가 진동하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랫목은 밤새 식지 않았고 나물은 간이 잘 맞았다. 형수님을 닮아 눈매가 서글서글하던 아낙은 혼자 객줏집을 꾸려가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근방에 객줏집들이 여럿 더 들어서는 바람에 손님이 끊겼다며 지나는 말로 한탄하면서도 밝은 낯은 잃지 않았다. 아낙의 정성 덕인지 주먹밥에는 여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찰기 없는 꽁보리밥을 된장에 버무린 게 전부였으나 허기진 속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덧 숲이 깊었다.
나목들과 마른 넝쿨들이 뒤엉키어 그늘이 짙었다. 겨울 가뭄에 계곡이 말라 물소리가 끊기고 새소리도 뜸하여 주변이 적막하였다. 홍안락의 거친 숨소리와 발아래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는 것도 그 탓이었다. 입춘이 내일인데 풀이며 짐승이며 산 것들의 흔적이 이토록 귀해서야 쓰겠는가. 흉산은 흉산이었다.
하지만 마른 칡넝쿨을 뒤집어쓴 비술나무 군락지를 지날 즈음 바스락바스락, 무언가가 숲 그늘을 따라 홍안락을 따라오는 기척이 났다.
홍안락은 고개를 돌리려다 말았다.
발소리로 보아 두 발 짐승인데 저렇듯 조심스레 따라붙는다면 낯선 사내와 거리를 두고 걷는 산골 여인이거나 모종의 불온한 의도로 뒤를 밟는 자이리라. 확인을 해야 했다. 홍안락은 소맷자락에서 단검을 꺼내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뒤따르는 발소리도 빨라졌다.
필시 나를 노리는 자렷다!
장차 나라 일을 할 자가 이만한 일로 겁을 먹어서야 되겠느냐. 형님이라면 지레 겁을 먹고 악졸(惡卒) 마냥 내뺐겠지만 나는 아니다. 저놈도 하나 나도 하나이니 해볼 만할 것이다.
홍안락은 단검의 칼집을 벗겨내며 뒤를 돌았다.
“웬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