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는 모르는 캔터베리 이야기

  • 장르: SF | 태그: #제프리초서 #캔터베리이야기 #성지순례 #라일락 #4월의실종 #소일장 #28년 #중세호러 #중세sf
  • 평점×108 | 분량: 47매 | 성향:
  • 소개: 해마다 4월이면 런던의 타바드 여관으로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주인장들은 그들의 순례길이 지루하지 않도록,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하는데… 여기까지는 초서가 쓴 &... 더보기

초서는 모르는 캔터베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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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종을 알아차린 것은 4월 무렵이었다.

우리 타바드 여관을 찾은 순례자들 무리에 식료품 조달인 스콧이 없었던 것이다.

브라이텔름스톤 출신의 스콧은 해마다 캔터베리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4월이 되면 런던으로 달려와서 한몫을 챙겨가는 장사치였다. 수도자, 본당신부, 면죄사, 기사, 장원 청지기, 소지주, 선장 등 주머니가 두둑한 순례자 무리에 슬쩍 끼어서 포도주나 고기 등의 식료품을 조달하면서 뒷돈을 남기는 식이었다. 그러니 스콧이 4월 대목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나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소지주의 방으로 갔다. 소지주라면 스콧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들국화처럼 하얀 수염을 기른 소지주는 순례자들 중에서도 다혈질 미식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아침마다 빵을 포도주에 적셔 먹는데,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빵이 딱딱하거나 덜 짜거나 더 짜면 사달이 났다. 또 포도주의 향을 맡아보지 않고도 그 빛깔만으로 어느 지역에서 몇 년도에 빚은 것인지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순례자들 말마따나 소지주는 식탁에 들이닥친 에피쿠로스의 아들이었다. 그 누구도, 그 생쥐 같은 스콧조차도 미식을 향한 소지주의 열망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소지주는 스콧이 ‘정직한 거래’를 하는 유일한 순례자였다. 그러니 스콧의 부재를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 역시 소지주일 터였다.

“어르신, 올해는 어찌 스콧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자에게 변고가 생긴 듯하네.”

“변고라니요?”

“브라이텔름스톤 집에서는 제 날짜에 출발했다는데 런던에 당도한 흔적이 없다네.”

런던에 오지 않은 걸 어찌 아느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런던의 생선장사, 푸줏간 주인, 빵집 사장, 포도주 판매상, 우유배달꾼이 죄다 이 미식가의 친구였던 것이다. 소지주는 ‘제대로 된’ 식재료를 대주는 자라면 누구든 벗으로 삼았다. 그 벗들이 하나같이 스콧을 보지 못했노라 증언했다면 그자가 정말로 런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소지주가 ‘변고’라고 표현한 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콧이 실종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어 나는 하인들이 단체로 묵는 헛간으로 갔다. 말만 헛간이지 실은 순례자들의 숙소와 분리된 별채에 가까웠다. 잘 말린 짚을 깐 침대들이 줄줄이 있고, 한쪽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도 갖춰져 있었다. 하인들은 순례자들이 달고 온 종자들이었다.

늘 큰돈을 지니고 다니는 면죄사는 강도를 막아줄 무사를 데리고 왔고 순례 중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변호사는 서류더미를 짊어질 짐꾼을 데려왔다. 소지주의 하인은 서른 중반쯤 돼 보이는 요리사였다. 스콧이 제대로 된 식재료를 대주지 않아서인지 그자는 종일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급한 대로 우리 여관의 식재료를 얻어다 쓰면서도 소지주에게서 날벼락이 떨어질까 봐 겁을 내는 듯했다. 나는 요리사에게 스콧에 대해 물었다.

요리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그자를 왜 찾으시오? 스콧이 오건 말건 주인장은 상관없지 않소?”

“우리 여관의 식재료들이 소지주 양반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신경이 쓰여서 말이오.”

나는 진짜 이유를 감추었다. 실은 3월 초쯤 스콧에게 연락이 왔다. 3월 말일까지 브라이텔름스톤의 자기 집으로 꼭 좀 와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례자들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여관주인에게는 당치도 않은 이야기여서 스콧의 뜻을 무시해 버렸던 터다.

식재료 핑계가 통했는지 요리사가 비밀을 털어놓았다.

“3월 초에 스콧에게서 기별이 왔었소.”

그 다음 문장은 내가 들은 바와 같았다. 언제까지 어디로 좀 와 달라….

나는 다른 종자들을 둘러보았다. 같은 연락을 받은 하인들이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이보시오들, 여관 주인이 그대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나는 종자들의 눈길이 쏠리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식료품 조달자 스콧에게 별도로 기별을 받은 자가 있소? 추궁하려는 게 아니니 솔직히 말해 주시오. 나와 여기 소지주의 요리사도 같은 연락을 받았으니 묻는 것이오.”

바스에서 온 부인의 어린 종자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도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의사의 종자가 말을 받았다. 그는 별채의 종자들 중 가장 멀끔한 차림새였다. 지난 흑사병으로 의사가 큰돈을 벌었다더니 그 집 하인도 소매에 고급 가죽을 덧댄 옷을 입고 있었다.

“저도 받았습니다. 스콧 씨와는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나는 소지주의 요리사만 데리고 별채 밖으로 나왔다.

“그대 주인 말로는 스콧이 순례 일정에 맞춰 브라이텔름스톤의 집에서 나선 정황이 있다 들었소. 소지주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한 거요?”

“주인님은 해마다 캔터베리 순례 시기가 다가오면 필요한 식재료 목록을 작성하여 스콧에게 보냅니다.”

“심부름을 다녀온 종자가 스콧의 소식을 전해주었겠구려.”

4월 아니랄까 봐 비가 유난했다.

순례자들은 마차 대신 말을 빌렸다. 런던의 진창길은 마차들의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기로 악명이 높았다. 서른 명에 가까운 순례자들과 또 그만큼의 종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순례자들은 런던에서 30마일 떨어진 로체스터에서 말을 바꿔 탄 다음, 다시 25마일을 더 가야 목적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에 도착할 터였다. 북적이던 손님들이 떠나가자 타바드 여관에는 축축한 침묵만 가득했다.

나는 아내와 아들에게 닷새 동안 여관 문을 닫으라 했다. 사실상 캔터베리 순례자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봄철 장사는 다한 셈이기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여관 열쇠를 맡기고, 간단한 여장을 꾸려 남서쪽 바닷가로 말을 몰았다. 브라이텔름스톤에 가서 스콧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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