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면 놀이

돼지가면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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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월 31일

총 한 달간의 조사 기간이었습니다. 의뢰인께서 보내주신 육성녹음파일을 문서화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육성파일 본문 중간에 조사과정과 날짜가 기입되어 있습니다. 조사결과를 알고 싶으시면 당장 맨 뒷장을 펼치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순차적으로 보실 것을 권고 드립니다.

이야기는 글로 전해지거나 입으로 전해지든 진실을 파고들고, 내적 의도를 전달합니다.

이 문서의 본질은 조사 보고서보다 이야기 해설에 가깝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여기시면 마지막 조사결과를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 이야기로 문제를 내겠습니다.

어느 공사장의 인부 셋이 작업이 끝난 뒤 집으로 귀가하지 않고, 공사장에서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였습니다. 인부들은 술 먹고 흥겹게 놀다가 어떤 여자가 창밖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술김에 인부들은 그 여자에게 욕을 퍼붓고, 음식물을 던졌습니다. 그 여자는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인부들은 술을 계속 마시다가 잠에 들었습니다.

인부들은 다음 날 작업 기록용 카메라의 필름을 인화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세 명이 가지런히 잠든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기 때문입니다. 세 명 모두가 자는데 어떻게 사진에 세 명 전부가 들어가 있을까요? 도대체 누가 사진을 찍은 걸까요?

참고로 공사장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인부들이 술 먹던 장소는 3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90년대 말이어서 필름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자동으로 찍힐 수 없었죠. 그리고 찍힌 각도는 세 명 모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였습니다. 답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그래. 너도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니 빈말이다. 너와 내가 사이 안 좋은 건 부정하지 않으마. 네가 예상했던 대로 네가 소아마비를 앓은 후 네 다리 저는 모습에 못마땅했던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네 아비와 많이 싸웠지.

사실 후유증으로 네 성장이 더디고 멈춰버린 것도 큰 이유였어. 우리는 뼈대 있는 가문인데, 네 아비는 자식을 더 낳기를 거부했지. 네 문제로 너무 오래 싸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않고 지냈다.

네 아비가 죽었을 때도 난 가지 않았지. 사람들은 나보고 독하다고 했지만 네 아비는 자식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서도 내 재산을 탐냈어. 내 재산은 내 피와 살이야. 내가 허락하지 않고는 누구에게도 넘어갈 수 없어.

그리고 너 역시 내 재산을 물려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다. 부정하지 말거라. 난 다 알고 있어. 네 아비만큼 너 역시 밉지만 그래서 네가 어려울 때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도와준 적도 없지만, 그래도 내 혈육이니 내 마지막을 지키도록 지시하기 위해 널 불렀다.

너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다 네 것이 될 테니. 확실히 말해 주마. 내 상속자로 정하기 위해 널 불렀다. 단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일인데…… 네가 이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는 꼭 한번 얘기하고 싶었다.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야. 인생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와 얘기를 자주 못하고 침묵을 선택했던 어리석음에 자책뿐이다. 그때가…… 6·25가 막 끝난 때였지.

난 그 시절 강원도 전선에 있었단다. 휴전 날이 되기 전날 밤 12시 전까지 모든 포격과 사격을 가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전선은 온 종일 포격소리로 진동했지. 낮부터 밤까지, 해가 져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해져도 북한군과 국군의 포격은 끊이지 않았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코가 막히고 눈물이 줄줄 흘렀지.

그런데 밤 12시 되기 5분 전에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어. 명령이 떨어져도 길게 늘어선 전선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래도 밤 12시가 되자 모든 공격이 딱 중지됐어. 북한군 쪽도 마찬가지였지.

나와 전우들은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어. 하지만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만세 소리가 들려오고,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외쳤지.

다음 날 학생 출신과 부상병에 한해 제대증이 발부됐어. 난 당시 대학교를 다니다가 기차를 타고 피난 중 징집됐기 때문에 나도 제대 대상이었지. 일부 전우들이 신분을 속여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 했는데, 그게 꼭 탓할 일은 아니었지. 늦거나 빠르거나 이제 모두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강원도는 산세가 험해, 차량이 다니기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차가 한 대라도 부족한 상황에 전역자에게 내줄 차가 있을 리 만무했어. 나와 대부분은 걸어서 강원도를 벗어나야 했다.

제대증과 함께 받은 감자 세 알을 주머니에 쑤셔 넣거나, 손에 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지. 지도도 없었고 근처에 민가도 없어서 내가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지. 감자 세 알을 아껴먹으며……

그래. 네가 굶주림에 대해 뭘 아는지 모르겠다. 사지가 멀쩡하지는 못했지만 너는 굶주리지는 않았잖니? 네 아비도 그랬는데. 너희 둘 다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 됐다. 원망하려 얘기한 것은 아니니 이만 하자.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너희 부자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덕분이라는 게다.

어두워지자 난 더는 걷지 않고, 생각에 잠겼지. 서울은 어떻게 됐을까? 대학은 어떻게 됐을까? 내가 다니던 대학은 도중에 해방을 맞아 학교 운영이 한동안 중단됐지. 전쟁 발발 삼 개월 전 3월 달에 일제 때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다시 학교를 열었어.

난 대학이 영영 사라져 버릴까봐 걱정이었단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내 부모들은 비록 똥지게를 짊어지고 다니던 무식자들이어도, 배워야 출세한다는 걸 알고 나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했다.

나 역시 대학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지. 나는 거기서 끝날 수 없었어! 어떻게든 악을 쓰고 살아남아야 했지. 요즘 너희 젊은 것들은 밍숭하고 유해 빠졌지……

그때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본 거야. 난 그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어. 푸르스름한 새벽이 오자 난 그 불빛 끝에 종전과 함께 철거되는 미군 통신기지 작업등을 봤지. 잠시 후 트럭이 한 대 오더니 나 같은 한국 사람들을 내려다 놨어.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으니 인근에 사는 여러 마을에서 뽑아온 일용자들이라 하더군. 내 사정을 말하고, 먹을 것만 주면 뭐든 하겠다고 했더니 나무 팔레트 치우는 일을 시켜주더라.

난 그때 이병연이라는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됐지. 떠꺼머리총각으로 덩치가 제법 있고, 둔하고 미련하게 생긴 데 비해, 말재주가 제법 있고 눈치가 빨랐어.

그래 그때 그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놈의 말재주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고, 나도 모르게 이 형이라 칭했지.

미군은 일당을 빵과 분유가루로 지급했어. 사발에 분유가루를 풀고 휘휘 저어 빵과 함께 꼭꼭 씹어 먹었지. 너희 부자는 나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나를 미워했어.

나 없었으면, 내가 그런 극기를 이겨내지 못했으면, 너 같이 다리 저는 병신이 어떻게 살아? 말이 심하다고? 모자라면 모자라고, 없으면 없는 거야. 내가 아닌 말했냐? 너 다리 저는 게 내 탓이야? 그만하자. 어허! 할아버지 얘기 안 끝났다.

이놈이 사람이 점잖게 얘기하니 우습게 보네! 너 아프다고 네 아비가 가정교육 안 시켜놔서 문제야. 원래 자식은 부모 그림자만 봐도 무서워해야 돼. 이제부터 점잖을 것 기대 마라!

일이 끝나서 모두 돌아갈 때가 되자 이병연이 그놈이 나보고 같이 자기네 동네로 가서 자자는 거야.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보다 남쪽이라는 것만 묻고 이병연을 따라 트럭에 올랐지. 그때는 남쪽으로 조금이라도 내려가 경기도까지만 가도 서울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이병연의 동네는 펀치볼이라는 지역이었는데, 지금도 정확한 지리명을 몰라. 당시 이병연은 그냥 펀치볼이라 했어. 나도 더는 묻지 않았지. 하룻밤 자고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

조사첨부.
X월 4일

제가 조사한 바로는 펀치볼이라는 지형명은 현재는 쓰이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들은 한국 지형은 원어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여 특징이나 전쟁 시 용도에 따라 임의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펀치볼이라는 지형은 할아버님의 구술을 따라 휴전선 쪽을 조사해 보니 현재 위치는 강원도 해안면 부근으로 추측됩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어서, 종군기자나 미군들이 쑥 들어간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내려온 토착민은 거의 없었고, 주로 전쟁 때 피난 왔거나 이주로 정착한 세대와 후손들이 터를 잡고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병연이 펀치볼이라 말한 걸로 보아 그도 토착민은 아니고 피난민으로 추정됩니다.

향토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심심한 곳으로 이름이 얽힌 소소한 전설 외에 특이하게 가치를 둘 점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형 자체의 역사보다 북한과 관련된 반공 역사가 더 깊었습니다.

구술을 따라갈 수 있게, 구술에 등장한 미군기지가 정말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한 미군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가들을 찾아갈 계획입니다.

*

미군 트럭은 어두워진 산길을 헤치며 한참을 달리다가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마을이 보이면 사람들을 내려줬어. 내가 이병연에게 우리는 어디서 자냐고 물으니 조금만 더 가야 한다고 대답하더구나.

밤이야 다 똑같은 어둠이지만 유독 이병연이 있는 마을은 더욱더 새까맣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 심지어 소리마저 밤에 묻힌 듯했어. 트럭에서 내린 이병연은 냄새만으로도 추적할 수 있는 들짐승처럼 어둠 속으로 나를 이끌었단다.

초라한 민가 몇 채가 몰려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섰는데 마을 울타리가 희미하게 보이는 거야. 어찌 된 영문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 뒷산에 웬 고풍스러운 별장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거기서 밝은 전기 빛이 흩뿌려지고 있었지.

나는 이병연의 등을 찌르고 별장을 가리켰어. 이병연은 별장을 힐끗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지. 흡사 별장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내려 까는 인상이었어. 별장이 무슨 살아있는 흉악한 괴물이라도 되는 듯.

“이 형 무슨 일이오?” “말 말고 동생은 얌전히 따라와. 저긴……” ‘저긴’에서 줄어든 말이 뭘까? 무엇일 것 같냐? 너와 네 아비같이 내가 벌어온 돈에 기생하면서 자란 놈들이 뭘 알겠냐마는.

너희 같이 순둥순둥하게 살아온 것들은 내 세대의 악과 극기를 몰라. 뭐냐고? 궁금하지? 그렇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표정이 구겨지냐? 너도 네 아비와 똑같다? ……좋아.

아무튼 이병연이는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조시대 말 때 썼던 짚으로 지붕을 엮고 광과 부뚜막, 거주할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는 작은 집이었지.

들어가더니 컴컴한 방을 뒤지다가 짜리몽땅한 초 한 토막을 집어 불을 붙였어. “기다려 봐. 내 동생이 밤마다 동네를 쏘다니는데 이 불을 보고 집에 들어 올 거야. 그때 감자를 구워줄게.” “아니 이렇게 외진 동네인데 밤에 돌아다녀요?” 라고 물으니 그놈이 입을 다물더라.

잠시 후 우물쭈물 거리며 사람은 많이 아프면 많이 변한다, 라고 말을 흐릿하게 맺더구나. 그런가 보다 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촛불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비척비척 꼭 다리를 질질 끄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뭐냐. 마치 축 늘어진 무언가를 억지로 끌고 오는 듯한 소리.

소리만 들으면 전쟁 때 대량전사자 처리할 때 들은 시체 끄는 소리가 연상되더라니까. 아직 북으로 못 올라간 빨갱이들이 남아 있나? 싶어 쪼그라들…… 아니 그놈들이다 싶으면 단숨에 때려잡으려고 마음 단단히 했지.

인마! 난 아직도 너 같은 야물지 못한 놈들 백 명은 때려잡을 수 있어! 아무 말 안 했다고? 너와 네 아비는 얼굴만 봐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나는 맹수 중의 맹수인데, 네들은 왜 양이야?

아무튼 얘기를 계속 가자면 그때 이병연이 문을 벌컥 열고 “동생 왔어?” 라고 하니, 어둠 속에서 촛불 빛 속으로 누군가 건너오는데 마치 그 모습이 지금 너 같더라. 흐리멍덩한 눈빛에 똑바로 서지 못한 불안한 몸짓하며……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푹! 고개를 숙이고.

뭐, 아니라고? 웃지 마라. 고개 숙이는 것만 빼면 너랑 판박이니까? 너 혹시 그때 그놈 아니냐? 허허허. 농담인데 열 낼 필요 뭐가 있냐? 처음에 공손히 들을 걸 그랬지? 사람이 점잖게 나올 때 얌전히 들어야지. 됐다! 그만하자.

이병연이 나한테 자기 동생 현철이라며 나한테 소개시키더구나. 나는 꾸벅 목례했지만 현철이는 나를 보는지 마는 건지 방안으로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고 꼼짝도 않더라고. 이병연은 부뚜막으로 가서 광주리에 썩은 감자를 담아왔지.

“땔감이 없어 불을 켤 수 없네. 동생, 그래도 허기는 피해야 하니 이대로 먹지.” 나와 이병연, 현철은 광주리를 둘러 앉아 생감자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단다.

그러다가 퍼뜩 아까 본 별장 생각이 떠오르는 거야. “그 별장에 찾아가 품이라도 팔아 불쏘시개라도 받아올 수 있지 않아요?”

그러자 이병연과 현철이 동시에 감자를 씹던 입을 멈추고 눈동자만 굴려 나를 쳐다봤어. 어두운 방안에서 네 개의 눈동자가 나를 겨냥하더니 조금도 미동 않는 거야. 불안해진 나는 “왜요? 왜요?” 라고 물으니 “동생은 아무 말도 말고 먹고 자게나.” 라더군.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잖아? 내가 그래도 대학물을 먹은 사람인데 이런 촌무지렁이들하고 같을 수 없잖아? 너도 대학 나왔다고 으스대지만 나 다녔을 때와 너 다녔을 때는 달라. 네 아비가 대학을 못 간 건!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야.

넌 네 아비 말을 그대로 믿냐?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공부하겠다는 자식 가로막을까?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나가지 마라. 네 아비가 무슨 말을 네 머릿속에 심어줬는지 모르지만 곧이곧대로 믿지 마!

그래서 내가 호기롭게 ‘뭐가 무서운지는 모르지만 왜 저 별장을 두려워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가서 보겠다’고 말했지. 가서 사람 있으면 끼니 거리라도 챙겨와 잠자리 챙겨준 이 형한테 답례로 주고, 귀신 있으면 황천에 보내주고 오겠다! 라며 큰 소리를 친 거야.

“아니여. 동생 저기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있어.” 이병연이가 덜덜 떨면서 일어선 내 발목을 잡았지. 그러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

원래 이병연이는 여기서 대대로 살던 토박이였어. 전쟁 발발 후 피난도 가지 못했다더구나. 북괴 놈들한테 마을을 점령당하긴 했는데 분지지형이니 방어에는 적합해도 낙동강 전선으로 집중되는 공격 이동에는 맞지 않은 덕에 몇 명 완장 채운 빨갱이들만 남겨놓고 지나갔대.

빨갱이들도 작은 마을이어서 그런지 가난하고 뭐 건질 것이 없으니까 매일 마을 중앙에 사람들 모아놓고, 정신교육이며 사상교육이며 자아비판 이런 걸로 괴롭히다가, 미군이 인천으로 들어오자 마을을 버리고 다시 삼팔선 위로 도망쳤다더구나.

시간이 흘러 국군 1사단이 평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쯤 그 별장으로 한 가족이 들어왔어. 경성에서 미술대학 교수였다는 남자와 스무 살 정도 되는 딸, 그리고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것으로 보인 아들이었지.

원래 별장이 누구 것이었는지는, 마을 주민들도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당당하게 들어와 사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 별장 소유주였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이 난리 통에 배운 사람이 빨갱이들한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게 더 궁금했을 때였어.

별장 앞으로는 뒷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지. 이병연이가 이웃마을에 품일이라도 알아보러 샛길을 지나가는데 교수 딸이 별장 대문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는 거야.

“저기 품삯을 쌀로 드려도 될까요?” 전쟁 통에 쌀이 귀할 때였는데 당연히 되지. 이병연이는 으리으리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어. 일거리는 대단치 않았어. 낡은 가구와 무너진 담장 보수였지.

딸이 열어준 창고로 가 공구를 찾다가 물을 게 있어서 딸을 찾으니 안 보이는 거야. 이병연이는 조심스레 별장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

그런데 거실에 교수와 딸이 있었어. 딸은 벌거벗고 소파 위에 서 있었고, 교수는 그런 모습을 화폭에 그리고 있었지. 이병연이는 벌거벗은 딸을 그리는 교수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댔지.

교수는 이병연이를 등지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어서 보지 못했는데 딸은 이병연이를 본 거야. 입모양으로 조용히 ‘쉿’ 하더니 “방해하지 말고 나가주세요.”라고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히 말했어.

이병연이는 다시 나와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일에 집중했지. 일이 끝날 때쯤 딸이 나와 일이 끝난 걸 보고는 이병연이를 데려가더니 쌀 반 가마니를 내줬어.

딸과 얼굴 마주치기도 민망해서 발끝만 멀거니 바라보는 이병연에게 딸이 살포시 웃었어. “천륜이 중요하지만 사람은 욕심을 못 이기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사람들 말에 민감해요. 말씀하시면 찾아가실 거예요.”

이병연은 넙죽 인사만 하고 가마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 참 맞는 말이야. 아무리 하늘이 높다 하더라도 사람은 하늘도 이길 수 있어. 내가 그런 심정으로 맨손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이만큼 떵떵거리며 살지. 네들 부자가 나를 싫어해도 내 돈은 그렇지 않잖아? 너무 솔직했나? 인상 구기려면 마음대로 구겨 봐라. 불리해지는 건 너니.

*

조사첨부
X월 7일

현재 강원도 해안면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개발로 지형이 많이 변해 정확히 어디가 그때의 펀치볼이라 불리는 곳이었는지 찾기 힘듭니다.

부동산과 향토 연구가를 찾아갔는데 아무래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보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소지역이 아닌 이곳 전부가 펀치볼이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도 있었습니다.

부동산에 물어보니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건물은 없다고 합니다. 별장을 물어보자 그렇게 오래 세워진 별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광산업에 의존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구경거리가 적고, 휴전선이 가까워 안보에 관련된 기념물만 있습니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건물 건축허가가 쉽게 나지 않습니다.

최근 세워진 별장이 2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현재 저희 조사팀원들이 서울에서 주한미군 연구가를 찾고 있습니다.

추신 : 향토연구가에 의하면 토박이들이 절대 펀치볼이라 이곳을 지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해안면이라는 이름이 옛날에 이곳에 득실했던 뱀을 내쫓기 위해 만든 이름이어서(유래 전설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던 6·25 세대 사람들이 사용할 리가 없다고 합니다.

신뢰성 높은 설명이 있는데 미군이 사용하는 명칭을 당시 국군이나 한국 사람들이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를 했다는 뜻입니다.

*

중공군 개입으로 1월 4일을 기점으로 국군이 후퇴하는 때였지. 북한 사람들도 빨갱이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지.

펀치볼은 분지지형이어서 피난 물결의 행로 한가운데 위치하진 않았지만, 주변 마을과 시장들이 영향을 받아 식량을 구하기 힘들었어.

산지가 많아 화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마을 사람들은 전쟁으로 생필품이 늘 부족했고, 분지지형은 안개가 심하고 습도가 높아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지. 외부에 의존해 마을을 유지했는데…… 이제 점점 죄어오기 시작한 거야.

그때 이병연은 마을에 돌던 소문을 들었대. 안개 속에서 웬 돼지가 울고 있기에 혹시 누가 돼지를 잡으려다가 놓친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사람이었다는 소문 말이야.

글쎄 조그만 꼬마가 돼지가면을 쓰고 안개 속에서 꿀꿀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어떤 사람은 꼬마가 돼지흉내를 내자 교수댁 딸이 홀연히 나타나 데려갔다는데, 전부 카더라 하는 소문일 뿐, 직접 본 것 같지는 않았다고.

이병연이 교수 가족 눈에 들어 어쩌다가 머슴 역할 하는 삼식이라는 동생에게 소문에 대해 물으려 삼식이 집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병연이가 갑자기 말을 끊고, 침묵하다가 “동생. 내 평생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건 처음 봤어.” 라며 현철이 눈치를 보더라.

“삼식아. 뭔 일이여.” “형님 비키소!” 하고는 삼식이가 자기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바닥에 한 바가지 가득 토악질을 하는 거야.

이병연이 등을 두드려 주며 “인마 아무리 굶어도 이상한 건 먹지 말아야지!” 하니 “형님, 나 돼지고기 먹었소.” “인마 좋은 걸 먹고 왜 토해?” 하니 더는 대답하지 않고 구역질만 꺽꺽.

펀치볼은 원래 뱀이 가득 차서 뱀을 쫓으려 돼지를 길렀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야. 그래서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는데, 빨갱이 놈들이 마을의 돼지를 모조리 잡아먹고 씨를 말렸지.

그런데 삼식이는 어디서 돼지고기를 먹었을까? 교수댁에서? 그 점잖은 사람들이 돼지나 키울 수 있을까? 이병연이 묻는 말에 삼식이는 대답하지 않고 드러누웠어.

원래 촌동네라는 게 그렇듯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을 돌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개와 고양이도 잡아먹고, 나무가구와 가죽 혁대마저 끓여 먹는 마을 사람들은 삼식이 상태보다 돼지고기를 어디서 났는지에 더 집중했지.

사람은 말이야, 굶주리거나 극한 상황에 몰리면 본성이 나와. 그게 사실 그 사람의 본 모습이야. 내가 악으로 깡으로 돈 벌고, 네들 먹여 살릴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했지만 지금 나보다 잘 된 사람이 누가 있냐? 다 선비인 척, 점잖은 척하며 위선적으로 살았지. 그 사람들도 본성은 다 나와 똑같은 거야. 다만 아닌 척하는 거지.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병연이는 딸의 일을 도와준 일도 있어서 본인이 직접 가서 돼지고기가 안 되면 양짓살이나 비계라도 얻어 볼까 하고 가려 했는데 다른 이가 나섰지.

마을에 단둘이 살던 형제가 있었는데 어린 동생이 배고파서 매일 징징대자 못 참고는 “사람이 같이 살아야지! 혼자만 맛있는 거 먹으면 뭔 재미야!” 일갈하고 기세등등하게 별장으로 향했어.

참 웃기지 않냐? 사람이 똑같이 사는 거 아냐. 달라. 아주 많이 달라. 네 아비나 다른 사람들 나한테 인생이 어쩌느니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마음 곱게 쓰라고 그렇게 부처님처럼 말을 했지만 결국은 다 내가 모은 재산에 아쉬운 소리 하더라.

나한테 아쉬운 소리했으면 도와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나같이 돈! 돈! 돈! 그리고 여기서 얘기 듣는 너도 상속 때문이지? 그래. 부정 안 하겠다.

야 참 네 아비가 자식 하나 잘 길렀어. 뭐? 비꼬는 거 아니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그대로 말하는 게 어떻게 비꼬는 거냐? 난 독하게 마음먹었고, 거칠게 살았어도 마음은 항상 대로를 걷는 정도 인이었어. 군자 대행로라는 말 알지?

그래. 그 별장으로 향한 형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말이야. 그리고 그 사이에 삼식이는 뭐든지 먹으면 토하고, 가끔씩 눈을 허옇게 뒤집고 발광을 해댄 거야.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이 말이야.

도대체 돼지고기를 먹고 왜 저러는지 아무도 몰랐지. 이병연이 말고는 아무도 삼식이를 챙기지 않았더랬지. 사람들은 그저 오매불망 별장으로 간 사람이 손에 돼지고기를 들고 내려오길 기다렸던 거야. 참 사람들 알고 보면 다 개새끼들이야. 그렇지?

이 얘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 구석에 있던 현철이라는 그 음침한 놈이 자기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는 거야. 나이 맞지 않게 웬 지랄인가 싶어 이병연에게 눈짓을 주니, 이병연은 말을 하다말고 현철이 손가락을 다 빨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더구나.

나도 뭔 일인가 싶어 유심히 보니 그는 자기 손가락에 묻은 피를 빨고 있던 거야. 스스로 깨물어서 피가 나오자 하염없이 계속 빠는 거였지.

처음에 너 소아마비 후 걸음 연습 반복했던 것처럼 미련스럽고 한숨만 나오는 광경이었지. 그놈 두 눈은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 부릅뜨고 있었어. 무서웠지. 난 인정할 때는 인정하는 사람이야. 무서웠어.

“어허, 현철아 왜 그러니?” 하니 이병연이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 크게 쭈욱 빨고 자기 사타구니 사이에 쑤셔 넣었어. 이병연이는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지.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어.

*

조사첨부.
X월 15일

해안면의 해는 원래 바다 ‘해(海)’ 자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수많은 뱀들이 마을을 뒤덮자 고승의 조언대로 뱀과 상극인 ‘해’를 돼지 ‘해(亥)’로 바꾸어 쓰고, 돼지를 기르니 뱀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안면에 펀치볼 마을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향토연구가 중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시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다며 알려왔습니다.
휴전선과 근접한 지역이라 군부대가 많이 들어서 있는데, 일종의 기념으로 전쟁 시 붙여진 이름을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아마 연구가들이 말한 것은 아주 오래된 토박이들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온 세대들이 펀치볼이라 부르지 않는다, 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펀치볼 마을이 구술 중에 나왔다는 그 펀치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 분지 내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반경이 넓어졌습니다.

위치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에, 직접 찾아가보니 부근에 오래된 주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개발로 많이 깎여 나갔지만 분명 야트막한 동산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부동산과 동사무소에 물어보니 일제 강점기 때 건물로 확인했습니다. 저번 조사는 많이 불확실했고 미숙했던 점을 인정합니다. 그 건물에 거주했던 사람에 대해 조사 중입니다.

그런데 구술에는 전역 후 걸어서 내려오다가 미군기지에 도달하셨다고 하셨고, 공사가 끝난 뒤 차로 한참을 달렸다고 하셨는데, 막상 이곳은 휴전선과 매우 근접한 위치에 있습니다.

당시에 숲이 더 울창해서 산에서 길이 더뎌졌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곳 안보 기념관 큐레이터에게 물어보니 전쟁 때는 포격과 산불, 땔감 활용 등의 이유로 민둥산이었다고 했습니다. (6·25때 이 근방에 얽힌 전투가 꽤 됐습니다.)

게다가 휴전선, DMZ로부터 1킬로미터에서 1.5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정확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

다시 이병연이가 얘기를 계속했지. 형이 돌아오지 않자, 당연히 동생은 애가 탔어. 동생은 이웃집에서 암죽을 얻어먹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러면 눈치 보이고, 형이 없으니까 애가 주눅 들었겠지.

그래서 동생은 다짜고짜 별장으로 향했어. 사람들은 계속되는 굶주림 속에서 숨겨진 이기심이 드러나 자신과 관계없다면 누가 어찌 되든 신경 안 써서인지 동생의 행동을 말리는 이도, 가라고 부추기는 이도 없었어.

이병연 역시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나 입을 다물고 있었지. 소시민들의 삶이란 그런 거야. 세상이 변해가면 변해가는 대로 흘러가 줏대 없고, 주관 없는 우민들이야.

온 천지가 기아 상태라면 무슨 짓을 해서든지 먹을 걸 마련하거나, 그도 안 되면 고향을 떠났어야 하는데 그저 나무 아래 넋 놓고 앉아서 입 벌리고 열매 떨어지길 기다리는 그런 식이야.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너 다리 전다고 취직 안 되니까 이상한 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더라? 거기 월급은 나오디? 다리 전다고 네가 미리 선 긋고…… 뭐? 나랏돈이 네 단체에 쓰인다고? 햐. 내 세금이 네 월급이네. 참 허튼 데 쓴다.

보람 같은 소리하지 마라! 네가 소아마비 막을 수 있어? 전신마비 막을 수 있어? 벙어리, 귀머거리 되는 거 막을 수 있어?

네가 그 단체에서 일하든 말든 계속 너 같은 ‘장애자’들은 계속 나올 거야. 그럼 그거 보람 있는 일이 아냐. 거기서 무슨 성취를 느낄 수 있어?

네가 아직도 인생을 잘 모르나 본데 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괜히 다른 일 못 한다고 그런데 가서 일하지 마라.

내 재산을 상속 받으려면 당장 관둬! 사람이 무엇을 하고자 마음먹으면 하늘도 못 막고, 인간들이 정해놓은 선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계속 고집 부려 봐라…… 하던 얘기나 하자.

동생이 별장으로 올라간 후, 마을을 둘러싼 산줄기에서 안개가 내려와 온 마을을 뒤덮었어. 이병연은 삼식이 먹일 죽이라도 만들어주려고 밖으로 나갔지. 옥수수 알이나 강냉이라도 얻을까 싶어 이웃집을 여기저기 기웃거렸어.

안개는 유례없이 짙었고, 마을 사람들은 불안감에 갑자기 자신의 집을 두드리는 이병연이에게 비우호적으로 대했지. 나한테 얘기 해주는 이병연이는 마을 인심이 사나워졌었다고 탄식했어.

봐라. 사람은 위기가 있을 때 변해. 소시민들을 욕할 게 아니지만 욕할 게 없는 것도 아니야. 변하려면 확 변해야 돼. 나 같으면 오히려 이병연이에게 끼닛거리 없냐고 되물었을 거야. 그럼 다신 찾아오지 않겠지.

이병연은 안개 속에서 마을 곳곳을 전전하며 양식을 구하다가 어떤 집 앞에 섰어. 인기척 소리 내도 반응이 없자, 수수대로 만든 울타리 문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

마루에 앉아 헛기침을 해보아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어. 이상하다 싶어 문에 귀를 대려다가 그제야 알았어. 여기가 별장에 간 형제의 집이라는 걸. 동생도 돌아오지 않은 거야. 떠난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이병연이는 인심도 각박하고 작은 소문에도 술렁이는 마을을 생각해서 조용히 삼식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어. 그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안개는 걷히지 않고, 낮이고 밤이고 마을을 감싸고 있었지.

너 어렸을 적에 소독차 봤지? 그 소독차처럼 뿌옇고 진한 안개가 일주일 내내 있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안개가 심해 집안에만 꼼짝 않고 머물렀어.

하지만 이병연이는 가끔씩 나와 마을을 돌아봤지. 혹시나 형과 동생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병연이는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온 마을 사람이 굶어죽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대책을 구상 중이었어.

마을 어귀를 돌 때 누군가 산에서 내려오는 거야. 이병연이는 혹시나 별장에서 온 사람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마을 사람 김 씨였어.

김 씨는 해방 전에 완장 좀 차서, 인민군 놈들이 마을을 점령할 때 친일파 숙청을 당할까봐 산으로 피신해 있었거든. 그래서 산에 나는 먹을 것을 꿰뚫고 있었어.

안개가 심하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려 산을 올라가니 누가 어설프게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대. 누군가 보니 별장 교수댁 딸과 아들이었어.

딸이 가녀린 손으로 도끼를 잡고 나무에 도끼를 꽂았다가 놓쳐다가를 반복했고, 아직 어린 아들은 옆에서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지.

김 씨가 다가가 아는 체를 하자 “가면을 만들어야 해서요. 저희 아버지가 가면을 조각하시고 싶어 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김 씨는 모두가 굶어가는 통에 조각이라 배운 사람들은 물만 먹고도 사나보다 신기하게 여겼지만 금세 일제 때 완장 찼던 통밥을 굴려, 마을이 굶어가고 있다고 과장을 해서 처자식의 굶는 사연을 구구하게 털어놨어.

“저희를 도와주시면 돼지고기를 드릴게요.” 김 씨는 돼지고기라는 말에 득달같이 도끼를 뺏어들어 나무에 흠을 내서 딸이 원하는 만큼의 목재를 떼어냈지. 완전히 나무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중간을 파낸 걸 거야.

일이 끝난 후, 딸은 김 씨를 데리고 별장으로 갔어. 이병연이처럼 별장 안에 들어오게 한 게 아니라 대문 앞에 세워뒀지.

잠시 후 딸이 광주리에 돼지고기를 수북이 담아 대문 앞에 나타났어. 김 씨는 자기보다 한참어린 여자에게 허리까지 꾸벅 숙여보이고는 신 나라 하며 마을로 돌아왔지.

얘기를 듣던 이병연이가 이상했대. 광주리에 담긴 고기는 아무리 봐도 돼지고기로 보이지 않았거든. 고기 빛깔이나 두께로 보아 전혀 다른 종류로 보였거든.

김 씨는 이병연이가 이상하게 고기를 쳐다보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까봐 얼른 두 주먹 내어주며 조용히 해라 신신당부를 했지.

이병연이는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잘게 잘라 죽에 넣었는데 왠지 그 고기가 먹기 싫었대. 그래서 삼식이한테만 죽을 떠먹였는데 여태까지 뭐든 먹으면 토하던 삼식이가 꿀떡꿀떡 죽을 넘기더니 한 그릇 더 달래.

이병연이는 신기하게 여겼지만 보살피던 동생이 기운을 차리니까 바닥까지 긁어 싹 다 먹였어.

그 후 이틀쯤 지났을까? 마을에 소문이 쫙 퍼졌어. 소문보다 고기 굽는 냄새가 더 빨리 퍼졌지. 사람들의 닦달에 김 씨는 마지못해 사연을 털어놓고, 고기는 얼마 받지 않았다고 엄살을 피웠지.

일부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선동해 별장으로 가서 음식 좀 얻어 보자 나섰어. 이병연이에게도 찾아왔지.

이병연이는 자신이 고기 얻은 일이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아 안심하면서 한참 독이 오른 사람들 눈에 튀지 않으려 무리에 합류했어.

한 떼의 사람들이 안개를 헤치며 산에 올랐어. 근데 이병연이는 안개의 서늘한 기운이 뒷목 잡는 느낌을 받았어. 마치 이러면 안 된다는 듯이.

별장의 대문이 보이자 선동했던 사람들이 냅다 문을 걷어차고 “보시오! 나오시오!” 하고 소리를 빽 질렀어. 하지만 별장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

사람들은 “이보소! 혼자만 그리 먹을 거 쌓아놓은 거 다 아니 같이 좀 먹읍시다!” “나와 봐! 배운 놈들이 더 해!” 라고 온갖 흉한 소리를 지어냈지만 그런 무식한 놈들에게 휘둘리면 배운 사람이 아니지.

너도 그래도 대학까지 나왔으니 그래 똥통학교지만 대학은 대학이지. 절대 못 배운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어라. 못 배운 것들은 못 배운 티가 나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아무리 잘 생겨도 숨길 수 없어.

전에 나랑 같이 사업하던 놈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사업할 그릇이 아니야. 나에게 형님, 형님하며 안기려 들기에 불쌍해서 걷어줬다. 데리고 있다 보니 역시 못 배운 놈이었어.

한때 나한테 사업 배우다가 독립했는데 지금은 강남에 빌딩 세 채나 뭐? 아냐. 그놈 아냐. 그 깡통 찬 놈 아냐. 네가 모르는 다른 놈이 있어. 그놈 강남에서 아주 잘 나가. 아직도 날 보면 형님, 형님 해.

네가 나랑 어울리는 사람들을 어찌 잘 아냐? 너 내 뒷조사했냐?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나주지 않은 거야. 학은 홀로 있을 때 고고한 거다.

내가 뭘 어쨌다고 사람들이 나를 피하냐? 네 아비처럼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걔도 세상을 삐뚤어지게 보고 함부로 남을 음해하니까 교통사고로 세상 빨리 떠났지.

이 새끼가 눈 희번덕거리는 거 보소? 시끄러워! 잔말 말고 내 말 들어. 너희 부자는 내 새끼지만 내 오점이기도 해. 어떻게 내 말 따라 인생사는 놈들이 한 놈도 없어!

너한테 그래도 내가 지금 은혜 베푸는 거야. 암만 가족 간이라도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는 거야.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

이병연이 말하길 별장이 아무 반응을 안 보이며 침묵을 지키자 기괴한 느낌에 사람들이 패악질 부리기를 멈췄대. 이병연이가 느꼈던 안개의 서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사람들 뒷목을 잡는지 사람들이 점점 움츠러들었지.

누군가 “그만하고 돌아가죠. 설마 있는데 없는 척하겠어요?” 하자 사람들은 그 말이 자신들에 입에서 나온 말인 양 쉽게 순응하고 돌아갔지.

돌아가는 산길에 갑자기 안개가 쉭 하는 소리를 내더니 사람들 쪽으로 몰려드는 거야. 바람 한 점 없는데 안개가 다가서니 이병연이와 마을 사람들은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 발길을 떼지 못했어.

그때 꿀꿀, 꿀꿀 돼지 울음소리가 산에 울려 퍼지는 거야. 사람들은 안개 속에서 돼지 울음소리, 하지만 명백히 사람이 흉내 내는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기겁했지.

그때 한 사람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를 가리켰는데 거기에 누군가 나무로 만든 돼지가면을 쓰고, 벌거벗은 알몸으로 산언덕을 뛰어넘어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오고 있었어.

그 돼지가면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거친 산속을 뛰어다니는데도 조금도 숨차지 않는지 쉬지 않고 꿀꿀 돼지 울음소리를 내었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그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에 질겁하곤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구르다시피 산을 내려갔지. 이병연이가 말한 걸 들어봤는데 참 가관이었을 거야. 쪽수만 믿고 기세등등하게 찾아갔다가 허우적대며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산에 내려온 마을 사람들은 땅을 굴러서 이마와 무릎 안 깨진 곳이 없었지. 돼지가면이 더는 쫓아오지 않는 게 느껴지자 친한 사람들끼리 안전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해산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어.

약속이나 한 듯 돼지가면에 대해 더는 입에 올리지 않고 말이야. 그 중 이병연이만은 그 돼지가면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절대 입을 열지 않았어.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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