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빙글빙글 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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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은 매서웠고, 회피는 날렵했으며, 모든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매끈했다. 날카롭게 휘두르는 손톱에 괴물뱀의 몸통은 두부처럼 갈라지고 잘렸다. 커다란 몸뚱이들이 지푸라기처럼 휙휙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또아리를 틀었다가 마구잡이로 공격을 해 봐도 호랭이의 옷깃 조차 스치지 못했다. 수십 마리의 인면 구렁이들이 쇳소리를 내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저 정도는 돼야 필살 어쩌고지.”

 

입을 떡 벌리고 관전하는 기린에게 소라가 가슴팍에 양팔을 꼬고 핀잔을 주었다.

 

“너는 그냥 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 옆에서 보니까 빈틈도 엄청 많더라.”

 

“이게 기껏 배에 바람구멍 생길 뻔한 거 구해줬더니, 이제 와서 평가질이야? 무식하게 힘만 센 펀치 한 번 맛 볼래?”

 

기린이 발끈해서 으르렁거렸지만, 소라는 못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호랭이 쟤는 아까 미로랑 싸울 때 저랬으면 좋았을 걸. 아까는 라이트건만 쏴대더니.”

 

“그놈한테는 심정적으로 복잡한 부분이 있었을 거야.”

 

닥터윤에게 수술을 받고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호랭이가 그간의 사정을 듣고 잊었던 기억들을 되찾으면서 겪은 혼란은 기린으로서도 어렴풋이 짐작만 할뿐이었지만, 실로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충격이었을 것이다.

 

마고의 과잉보호로 자존감이 바닥이던 자신을 미로가 일으켜 세워줬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정반대였으니까. 천계에서부터 이어진 마고와의 인연과 신수 백호로서의 정체성을 삭제하고 용의 이빨로 막아 둔 흉수가 바로 미로였다니. 사실은 능력을 깔아 뭉개고 있는데 그게 응원해주는 건 줄 알고 기뻐하다 고백까지 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머리로는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을 관성적으로 자책하고 미로도 어느 부분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다. 그렇게 미로는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호랭이의 각성을 방해했다.

 

그런 존재를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광화시킴으로써 호랭이는 잠들어 있던 자신의 본모습을 온전히 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급조된 괴물뱀들로 막을 수 있으리란 건 가인의 오산이었다.

 

복도를 가득 메웠던 괴물뱀들은 모두 빛이 되어 사라지고 바닥에는 검은 피만이 흥건했다. 벽면과 천장에는 호랭이의 날카로운 공격에 긁히고 찢긴 자국들이 군데군데 남아 그 파괴력을 짐작케 했다.

 

“호랭아! 너무 멋있는 거 아냐?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싸움도 잘하고 힘도 꽤 세잖아! 나중에 나랑 팔씨름 한 번 해.”

 

“에이, 그래도 힘은 너한텐 안 되지. 기린이 너는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비원 최고의 파워걸이니까.”

 

“뭐 하는 거야, 너네 둘?”

 

둘의 꽁냥꽁냥에 소라가 닭살이 돋은 듯 자기 팔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하지만 기린과 호랭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득거렸다.

 

둘의 애정행각이 불편한 자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소라의 안경을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준이다. 여자 태준이니, 남자 소라니, 천생연분이니 하는 소리들도 마음에 안 들었다. 역시 닥터윤을 따라갔어야 하나. 고준이 노준이는 시킨 대로 닥터윤 옆에 붙어서 내 칭찬 많이 하고 있겠지. 없는 칭찬거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조수들의 고충은 헤아리지 못하는 태준이었다.

 

그때 기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이라니, 손에 전화기를 설치하다니, 쟤는 사실 인조인간인 거 아닐까. 태준이가 잡생각에 빠져 전화를 받지 않자 기린이 소라의 안경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소리쳤다.

 

“야!! 자냐?”

 

“헬로.”

 

“헬로는 무슨. 요요네는 어떻게 됐어?”

 

“그 세 명은 조금 전에 소장관사로 들어갔어. 너네 둘이 물고 빨고 하는 동안.”

 

“물고 빨지는 않았거든!”

 

“그 기계가 넘어져서 그쪽 화면은 이제 의미가 없어.”

 

“넘어졌다고?”

 

“응, 셋이 소장관사로 들어간 다음에 기계가 움찔움찔하더니 문쪽으로 엄청 빠르게 쫓아가더라. 그러다 뭐에 걸렸는지 넘어져버렸어.”

 

기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호퍼튜니티는 화성의 모래폭풍도 버텨내도록 설계된 오퍼튜니티의 후손이다. 혼자서 넘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요요 일행을 빠르게 쫓아 달렸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탐사 로봇은 주변의 움직임에 관여하지 않고 항속으로 이동하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 기본 아닌가. 설령 외계 생명체를 발견했더라도 쫓아가거나 숨거나 하는 옵션이 있을리가 없는데. 기린은 소라를 째려봤다.

 

“왜? 뭐?”

 

소라는 기린의 시선에 순간 움찔했다가 억울한 듯 맞받았다. 해체되어 있던 호퍼튜니티를 재조립해서 가동한 게 소라인데, 아무리 봐도 뭔가 조작을 할 정도로 치밀한 성격은 아닌 것 같고, 실수로 부품을 빠트린 거 아니야?

 

기린과 호랭이가 소장관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소라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 요요라는 여자도 여기 와 있어? 너희가 얘기 좀 잘 해 주라. 내 귀에서 폭탄지렁이 좀 빼 주라고. 그게 귓속을 휘젓고 다녀서 그런지 계속 어지럽고 자꾸 넘어진단 말야.”

 

기린과 호랭이는 눈을 마주치고 피식 웃었다. 그게 뻥이란 걸 알면 표정이 또 볼만 하겠군.

 

소장관사 앞의 광경은 음산하고도 기이했다. 입구 앞에 커다란 바위, 넘어진 오토바이, 부러진 나뭇가지 등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몰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긁힌 자국들이 입구를 향해 직선으로 나 있었다. 태준이가 얘기한 것처럼 호퍼튜니티도 출입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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