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 신령한 짐승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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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청과 백이 섞이면 연청색이 된다고 알고 있던 마고는 눈 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얀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튀어나간 호랭이를 짙푸른 비늘을 두른 청룡이 덮쳐 짓누르자 설원의 동백꽃처럼 붉은색이 점점이 피어났다. 힘 없이 떨어진 마고의 입술 사이에서 어떤 소리가 새어나오기도 전에 호랭이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하얀 털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아악! 안 돼!!”

 

마고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용의 몸통을 마구 두드렸지만, 단단한 비늘에 퉁겨져 나올뿐이었다. 용은 발톱을 세워 비늘을 긁어대는 호랭이를 앞발로 내리 누르며 꼬리를 휘둘러 마고를 멀찍이 밀어냈다. 날아간 마고가 장에 부딪쳐 위에 있던 술병이며 그릇들이 와장창 쏟아져 깨졌다.

 

“푸허억!”

 

마추가 청룡의 몸통에 피를 토했다.

 

호랭이는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속에서도 턱에 힘을 더해 마추의 목덜미에 박은 이빨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호랭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가 마추의 것인지 호랭이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마고가 다시 달려들어 용의 이빨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아가리를 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드득. 끝내 호랭이의 어깨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랭아 그만 놓고 피해….”

 

마고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호랭이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오히려 고개를 움직여 마추의 목을 더욱 압박했다.

 

마고는 바닥에서 술병 조각을 집어들고 용의 눈을 향해 있는 힘껏 찔렀다. 그러나 투명한 수정처럼 단단한 눈알에 미끄러질뿐 용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팔을 휘둘렀지만, 용은 오히려 눈알을 굴려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마고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고의 손만 상처를 입어 피가 배어나왔다. 절망이 서서히 마고를 옭아맸다.

 

용을 밀어내지 못한 호랭이의 앞발이 파르르 떨렸다. 호랭이는 꺼져가는 힘을 그러모아 이빨을 더 깊이 박았다. 마추가 다시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 진득한 핏물이 청룡의 촘촘한 비늘 위를 고통의 시간처럼 느릿하게 흘렀다.

 

마고의 눈이 파란 비늘 위 피의 흐름을 좇았다. 단단한 갑옷 같은 표면을 미끄러지던 핏물이 용의 겨드랑이 쪽으로 모여들었다. 바로 그곳에 철옹성 같던 비늘 사이의 틈이 있었다.

 

마고는 손이 하얘지도록 힘껏 병 조각을 움켜쥐고 비늘의 틈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리곤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을 살필 겨를도 없이 두 손을 겹쳐 끝까지 밀어 넣었다. 절망의 어둠 사이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용이 뇌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온 몸을 꼬았다가 고통에 겨운 듯이 벽에 머리를 짓이겼다.

 

“호랭아, 지금이야! 어서 피해야 해!”

 

마고가 큰 소리로 외쳤으나 온 몸의 하얗던 털이 붉게 물든 호랭이는 입을 벌릴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했다. 사지를 꿈틀거리는 마추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힘 없이 쓰러졌다. 애초에 제 다리 힘으로 서 있던 게 아니라 청룡에게 물려 들려있었던 것이었다.

 

마고는 호랭이를 안아 일으켰다. 호랭이의 어깨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호랭이의 머리를 껴안은 마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깐만 기다려, 호랭아. 내가 지난 번에 도서관에서 익힌 신수를 치유하는 술법을 써 볼게.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목이 반쯤 뜯겨진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누운 마추가 마고의 팔을 움켜 쥐었다. 마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을 뿌리치고, 호랭이를 치유하기 위한 술법을 기억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청룡의 요란한 몸부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완벽해 보이던 방어막은 약점에 가해진 병 조각 하나 만큼의 공격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 쉬던 용은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 같은 날숨을 뱉어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신수의 상처 부위에 짝지인 천인의 피를 바르고….”

 

마고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신수 치유술의 내용을 입으로 되뇌었다. 마침 마고의 손에 상처가 있었기에 호랭이의 어깨에 손바닥을 문질러 피를 바를 수 있었다.

 

“상처 부위를 최대한 오무린 후….”

 

호랭이의 찢어발겨진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 쥐자,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왔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그 다음, 그 다음, 주문을 왼다.”

 

마고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무한한 우주를 꿰는 인과율의 흐름으로 천인과 하나가 된 신령한 짐승이시여, 동에서 오는 걸음 서에서 맞이하고, 북에서 오는 액을 남에서 막았으니, 천지의 회전은 멈출 수 없으외다. 하나의 선은 끊길 수 없으외다.”

 

마고의 눈물이 후두둑 손등 위로 떨어졌다.

 

“천지의 회전은 멈출 수 없으외다. 하나의 선은 끊길 수 없으외다.”

 

반복되는 주문속에 호랭이의 벌어진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부서진 뼈가 뭉쳐지고, 끊어진 근육이 이어지고, 갈라진 가죽이 다시 붙었다. 힘 없이 늘어졌던 은색 수염이 펼쳐지고, 황금빛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마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보야, 왜 그렇게까지….”

 

마고의 말에 호랭이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입을 열었다.

 

“대감도 대감이지만, 진천랑은… 천제를 닮아서….”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