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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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후끈한 가을 바람에 황금빛 파도가 일렁였다. 풍년이었다. 통통한 낟알이 주렁주렁 달린 벼가 논마다 그득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벼베기를 하는 날이다. 가뜩이나 날이 무딘 낫으로 벼를 베는 일이 수월치 않았는데, 벼가 마구잡이로 자라난 덕분에 노동의 강도가 가중되었다.

 

“줄을 좀 맞춰서 파종할 것을 그랬네요.”

 

“내년부터는 꼭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책에 그런 내용이 왜 없었을까요?”

 

“마고님께서 추가로 넣어주십시오.”

 

두 사람이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고는 수줍은 미소를 감추려 얼른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고양이 크기로 변해서 개구리를 데리고 노는 호랭이를 흘겨 보며 허리를 두드리는 마고의 시선에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마을 아낙이 보였다.

 

“새참 드시고 하세요.”

 

새참이랬자 산나물 무침에 콩비지 따위의 별 볼 일 없는 음식뿐이었으나, 힘든 노동 중에 먹으니 천하진미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슬슬 혼인 올려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비양 자네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건가? 마고 처자한테 그럼 못써!”

 

아낙이 운을 떼자 수염 난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마을 사람들은 모종의 이유로 멀리서 이 산골까지 흘러들어온 마고가 비양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처지가 그렇다 하더라도 함께 살려면 혼인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종종 두 사람 뒤에서 들렸는데, 끝내 앞에서 얘기를 꺼낸 것이다.

 

“아이고 어르신, 저희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비양은 양손을 내저으며 민망한 눈빛으로 마고의 얼굴을 살폈다. 이분들이 뭘 몰라서 그렇지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놈이 언감생심 마고 선녀님하고 어찌 혼인을 꿈이나 꿀 수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마고는 기분이 상한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뭘 모르는 건 비양 자신이었다. 마고가 화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뭘 저렇게까지 극구 부인을 하는 거람. 내년에는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럼 우리가 대체 어떤 사인데!

 

벼베기가 끝난 후에는 묶은 볏단을 서로 기대어 세웠다. 하루 이틀 정도 말려서 개상질을 하면 탈곡이 더 수월하다고 두루마리에 적혀 있었다.

 

그리곤 뽑아 둔 지 며칠이 지난 콩에 도리깨질을 했다. 그만 쉬시라는 만류에도 있는 힘껏 도리깨를 휘둘러 바닥을 내리치는 마고를 보며, 비양은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바스라져 흩날리는 마른 콩깍지들에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리 철썩철썩 분노의 도리깨질을 해도 마고의 눈에 씌워진 콩깍지는 벗겨지지 않았다. 내일, 모레, 다음 달, 다음 계절, 이듬해를 상상하니 도리어 배시시 웃음이 지어졌다.

 

그날 늦은 오후 천계로 돌아가는 길에 마고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호랭이의 등에서 여러 차례 떨어질 뻔 했다. 호랭이는 혹시나 하는 걱정에 마고의 치맛자락을 입에 물고 노을이 지는 하늘을 서둘러 달렸다.

 

“어디 다녀오는 게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바윗돌처럼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향하는 마고를 마추 대감이 불러 세웠다.

 

“소향이와 함께 있었사옵니다.”

 

“잠깐 들어와 앉아 보거라.”

 

“죄송하오나 소녀가 심히 피곤하온데….”

 

“한시가 급한데 너는 어찌 헛짓거리만 하고 다니느냐? 어서 이리 와보거라!”

 

마추는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지독한 땀 냄새를 풍기는 딸의 꼬락서니에 콧잔등에 깊은 골을 만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시가 급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은 무슨 말씀이겠느냐! 천제와의 혼례 말이다! 그래, 네 친구인 소향이 역시 후궁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그랬나요? 그럼 친우된 도리로 금차에는 소향이에게 양보하고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니 차근차근 제대로 준비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사오….”

 

“헛소리!”

 

마추가 버럭하며 일갈하자 그의 신수인 청룡도 덩달아 입을 쩍 벌리고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노려봤다. 겁에 질린 호랭이는 꼬리를 말고 마고 뒤에 숨었다

 

“현 천제님이 오 년 전에 즉위하신 이후 벌써 열 번이나 혼인을 올렸는데도 여지껏 황손 소식이 없는 이유를 모르느냐?”

 

“소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추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럴 테지. 뭐, 확실한 것은 아니나 풍문이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 돈다면, 어느 정도 의심이 되긴 하는 법이지 않느냐? 천제님의 귀에도 분명히 흘러들어갔을 텐데, 딱히 부인도 하지 않고 모른 척 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마고는 관심사 밖의 풍문 따위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금시초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천계의 여러 가문들 사이에 제각각의 예단과 계획으로 천제님의 대를 이을 황손을 낳기 위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너는 신부 수업을 게을리하고 헛짓거리나 하고 다니느냐!”

 

“아버님, 소녀도 소향이와 함께 자수 등을 연습하고 있사옵니다.”

 

“네가 이 애비의 눈을 속이려 드는구나. 지상계에 내려가서 인간들과 어울리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입장이 난처해진 마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

 

“헌데 천제님에 대한 풍문이 무엇이옵니까?”

 

“천제님께서 여인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

 

“그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