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비번을 바꿨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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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으니 거리에는 사자들이 없어 한산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둘러보던 기린은 이 정도 밝기에 눈부심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랐다. 내 몸이 이렇게 프로 적응러였다니. 내일부터는 밝은 데 가면 피곤하고, 암합성도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나저나 우리 호랭이는 이렇게 밝을 때 다녀도 괜찮나.

 

“다들 쉬는 낮에 일하려면 너도 피곤하겠다.”

 

“산파는 기본적으로 빛에 어느 정도의 내성을 가져야 가능한 직업이야. 전에 봐서 알겠지만 사낭을 처음 개봉할 때, 굉장히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거든. 우리 산파들도 시력 보호를 위해서 고글을 써야 할 정도니까. 일반 사자들이 주위에서 얼쩡거리다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야.”

 

“아 그래서 그때 나한테 나무 뒤에 숨으라고 했구나. 세심한 배려였네. 몰라 줘서 미안.”

 

“그땐 네가 빛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세인인 걸 몰랐지.”

 

무심코 세인이라는 단어를 말한 호랭이가 계단 위를 흘깃했다. 기린도 혹시나 프스슷, 하는 소리가 들리진 않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건물주 꼬마는 다른 곳으로 기어간 모양이었다.

 

현관 앞에서 바이크에 올랐다. 기린은 빨간색 점프수트를 입은 호랭이가 바이크와 헬멧까지 완전히 한 세트처럼 강렬하게 시각을 자극해서 눈을 다시 찌푸렸다.

 

“정말… 과하다.”

 

“응? 뭐가?”

 

“아니야. 출발해.”

 

사아보호소는 마고의 집을 지나 십 분 정도 더 달려서 야트막한 산의 중턱에 있었다. 밖으로 넘지 못하도록 안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투명 아크릴 담장이 빙 둘러 있었는데, 유사시에는 하부의 발광장치를 가동해서 사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교차해 있고, 무장을 한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군부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에 기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이집이나 탁아소 느낌의 시설일 거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거였는데, 예상치 못한 위압감에 도둑이 제 발 저린 양 위축되는 기린이었다.

 

“호랭이 여긴 왠 일이야?”

 

입구 경비가 호랭이를 아는 눈치였다.

 

“미로 좀 보러 왔어.”

 

“약속은 했고?”

 

“우리가 미리 약속해야 만나는 사인가?”

 

경비는 살짝 비웃는 듯한 뉘앙스의 비틀어진 웃음으로 대답을 갈음하고 바리케이드를 열었다. 그 표정에 기분이 상한 기린이 욱해서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는 바람에 호랭이가 팔을 잡아 끌어 시선을 돌려야 했다. 기린은 신경질적으로 쓰로틀을 당겨 부와앙, 하는 소리로 경비에게 욕을 대신하고는 호랭이를 따라 본관 건물로 향했다.

 

“아까 그놈 표정이 왜 그따구야?”

 

주차장에서 건물로 이어지는 보도를 걸어갈 때까지도 분이 안 풀린 기린이 물었다. 지가 뭔데 우리 호랭이 앞에서 그렇게 깔보는 표정으로 쪼개는 거야.

 

“좀 창피한 이야긴데….”

 

호랭이가 주저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예전에 미로를 좋아했거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날 차 안에서도 묘한 기류가 흘렀고. 여기서 예전이라는 건 언제쯤일까? 오십 년전?

 

“내가 원래는 몸도 좀 허약하고 정신적으로도 마고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 높았어. 몇십 년을 마고네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살다가 마당이며 논밭을 조금씩 나가기 시작할 무렵에 미로를 마주쳤어. 나로서는 마고 외에 처음으로 마주친 사자였기도 했고, 꽤 반반하게 생기기도 해서….”

 

둘은 커다란 자동문을 지나 건물 안 로비로 들어섰다. 호랭이는 내부 지리에도 빠삭한 듯 거침없이 왼쪽 복도를 향해 계속 걸었다.

 

“그래, 잘생기긴 했더라. 그래서 첫눈에 반한 거야?”

 

“처음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근데 미로가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있던 부분을 고쳐주겠다며 심리치료를 해줬거든. 마고는 미로를 보면 옷속에 지렁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몸서리를 치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어쩐 일인지 치료 자체를 막지는 않았어. 사아보호소 수석 연구원이 바쁜 틈틈이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 나를 찾아와 내 마음을 만져주는데,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더라.”

 

“그거 사실은 반한 게 아닐지도 몰라. 뭔가 그걸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가 있었는데….”

 

기린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일단 부정하고 싶었다.

 

“미로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내 고백을 거절했어.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며 매달리고 여기 사아보호소에도 매일 같이 찾아왔어. 그래서 아까 정문 경비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거야. 나만 보면 그래.”

 

“재수없어. 담에 또 그러면 상판떼기에 펀치를 날릴 거야.”

 

“어쨌든 미로한테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덕분에 마고네 울타리를 벗어나 내 삶을 살아가게 되었으니까.”

 

기린은 호랭이의 표정이 아련해지는 걸 보고 미남 연구원에게 아직도 마음이 남아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복도를 한참 걸어가는 동안 대화가 끊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 들었을 수도 있다. 기린도 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슬금슬금 눈치만 보며 호랭이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끝에 멈춰선 호랭이는 제1연구실 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 옆의 패드에 오른손 엄지를 갖다 댔다.

 

“네 지문이 등록이 되어 있어?”

 

하지만 삐비빅 하는 승인 실패음과 함께 빨간 등이 깜빡였다. 호랭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패드에서 몇 개의 숫자를 눌렀다. 삐비빅.

 

“쳇, 비번을 바꿨나 보네. 미로, 문 열어!”

 

비번 입력을 두어 차례 더 시도해보고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해 문을 두드리며 목청을 높였다.

 

“뭐야?”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으며 문을 연 것은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은 무섭게 생긴 여자였다. 하얀 연구원 가운 차림에 왼손으로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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