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 작정하고 무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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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이는 깜빡할 뻔 했다며 기린에게 새 속옷 꾸러미를 건네고는 오후 업무를 위해 다시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돌아갔다. 기린은 라즈베리 초콜릿 케이크를 두어 조각 더 먹었다. 마고는 기린의 식성에 고개를 저으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암합성을 위한 건지, 한복남 파랑과 은밀한 연락을 하려는 건지 살짝 궁금했지만, 기린은 이내 신경을 끄고 케이크에 집중하며 조금 전의 대화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문을 흘끔 살피고는 포크를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으로는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골드투스 통신을 연결했다. 오른쪽 귀 뒤의 뼈에 이식한 골전도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수신되지 않았다. 기린은 손가락 하트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청장님, 윤기린입니다. 이곳 비원에는 임신과 출산이 없다고 합니다. 이게 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인지, 사람도 여기에 오면 생식 기능이 제한되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여기로 넘어와 살기 전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걸 확인하겠다고 직접 임신을 시도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린은 문득 사람과 사자가 몸을 섞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졌다. 초잘생긴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으로 연기한 고전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보면 사람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아이도 갖고 그러던데.

 

영혼공명이라고 했나? 영을 나누어 일족이 된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영은 어떻게 나누는 거지. 근육남이 조수들과 영을 나누었다는 걸 보니 성별에 무관하게 행해지는 일인 것 같은데. 하긴 몸을 섞는 것도 성별과는 무관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희 엄마한테 인공 자궁 관련 주식에 투자하라고 좀 전해 주세요. 인류가 이쪽으로 이주하게 되면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비원에서 임신이 가능하든 아니든 그쪽으로 가는 게 여성들의 건강을 위해 좋으니까요.”

 

그때였다.

 

“치이익… 린 씨… 치이익…”

 

“으어억! 청장님!?”

 

잡음이 잔뜩 섞여있긴 했지만 분명히 음성신호가 수신되었다. 기린은 놀랍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청장님! 들리세요?”

 

하지만 청장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고 그 후론 잡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는데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마고가 계단을 올라와서 기린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이 깜짝이야. 언제 올라왔어?”

 

“누구랑 얘기한 거냐고.”

 

마고가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뭘 누구랑 얘기를 해. 그냥 심심해서 노래 부르고 있었어. 랩이야, 랩. 최신 히트곡인데, 청장을 꼬시는 방법이라고. 청장님 들리-세-요? 그렇다면 플리스-세이-호!”

 

기린이 가상의 마이크를 마고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마고는 호-를 해주지 않았다.

 

“별 이상한 노래가 다 있네.”

 

마고는 더이상 추궁할 방법이 없었지만 미심쩍은 눈초리로 기린을 꿰뚫을 듯이 쳐다봤다. 이 아이는 비원에 온 목적을 숨기고 있어. 그리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야. 상대 역시 세인일까. 비원에 있는 걸까. 혹은 사자 중 누군가와 내통을 하는 걸까. 중앙정부측 인사일까. 내가 여전히 서색연대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고하러 온 것일까. 아니야. 그렇다기엔 팔왕을 마주쳤을 때 전혀 알아보는 기색이 없었어.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

 

“근데 오후에는 뭐 해야 돼?”

 

마고의 시선이 부담된 기린이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충분히 고생했으니 이만 씻고 쉬도록 해. 네가 쓰는 방 옷장에서 적당한 옷 꺼내 입고.”

 

의외로 마고는 기린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거실 탁자에 있던 휴대폰을 챙겨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다. 호랭이가 버럭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기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이 층의 침실에 가서 옷장을 열었다. 총천연색 점프수트 여러 벌이 걸려 있었다. 호랭이 너 취향 참 일관성 있구나. 속옷은 다행히 무난하게 검은색으로 사다줬네.

 

기린은 옷장을 한참 뒤적이다 무지개색 호랑이 얼굴 그림이 그려진 상아색 면티와 녹색 트레이닝복을 골라 꺼내놓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깐 침대에 누웠는데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힘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덕에 작업을 쉽게 해치울 수 있었지만 그만큼의 일로 인한 피로감은 동일한 것 같았다. 기절한 듯이 다섯 시간을 내리 잤다.

 

앞마당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저녁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기린은 창밖으로 산쪽을 먼저 살폈다. 혹시나 또 칸자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틈만 나면 그쪽 방향을 경계하게 되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가 현관 밖으로 나가 보니, 호랭이가 트럭에서 모터바이크 두 대를 내리는 중이었다.

 

“기린, 바이크 바로 받아 왔어! 길에서 태준이를 만났는데 어물쩡거리길래 산파국에 신고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바로 바이크샵에 데려가더라고. 짜식이 쓸데없이 센 척 하고 있어.”

 

바이크는 기린의 쌍둥이 오빠 정민이 방 벽에 붙여뒀던 포스터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길쭉하고 날렵한 디자인이었다. 그게 브랜드가 인디언 모터사이클이었나. 전기 스쿠터에서는 볼 수 없는 엔진과 배기통의 디자인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근데 기린 이거 탈 줄 알아? 지구에도 바이크는 있지? 뭐, 기본적으로는 자전거랑 비슷해.”

 

트럭이 떠나자 호랭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탈 줄 모른다고 하면 마고 차지가 되는 건가. 그럴 순 없지! 박물관에서나 보던 멋들어진 모터바이크를 직접 탈 수 있는 기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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