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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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다 끝내고 온 건데?”

 

기린이 몇 계단을 더 내려가자 마고가 황급히 계단을 올라왔다.

 

“이렇게 빨리? 너, 대충대충 한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얼마나 멋있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기린이 계단 아래쪽을 기웃거리자 마고가 그 움직임을 따라 까치발을 디디며 시야를 막았다. 둘은 마치 찰리 채플린 영화의 약속된 동작처럼 좌우로 함께 움직였다.

 

“누구 왔어?”

 

“오긴 누가 와. 올라 가자. 먹을 시간이지?”

 

마고가 기린을 떠밀다시피 하며 대답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다정함까지 묻어 나왔다. 지하실에 있는 누군가를 숨기느라 아주 필사적이구만, 하는 생각이 들자 궁금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했다. 배고픔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이천년 묵은 능구렁이 할멈의 약점을 포착할 천금 같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미중년들과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계셨나? 기린은 올라가는 척 마고를 등지고 섰다가 빙글 돌아 두 계단 아래로 내려서고는 후다닥 뛰었다.

 

“앗, 잠깐!”

 

마고가 공기 벽을 만들었지만 신체 능력을 각성한 기린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빨랐다. 끼긱 끼긱 끼긱. 기린의 재빠른 발놀림에 낡은 나무 계단도 깜짝 놀랐다는 듯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계단의 맨 아래에 도착한 기린이 발견한 것은 세 명의 남자였다. 한복 차림에 상투를 튼 중년 남자 하나와 삼십대 남자 둘이 보였는데, 기린의 기대와는 달리 탁자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내밀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일층의 거실과 동일한 크기로 꽤 넓은 편인 지하실의 벽면은 크고 작은 책이 빼곡한 책장으로 빙 둘러져 있었고 중앙에는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자리했다. 탁자 위에는 빨간 점들이 표시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엊그제 티비 뉴스 화면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세 남자가 앉은 맞은 편의 의자 하나가 직각으로 돌아간 모습에서 마고가 얼마나 다급하게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투 옆의 두 남자가 탁자 아래로 기린을 향해 라이트건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기린은 그들과 마고를 번갈아 보았다.

 

“손님들 앞에서 무례하게 무슨 짓이야?”

 

“아 쏘리 쏘리. 할멈의 은밀한 이중생활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네.”

 

이중생활이라는 단어선택에 마고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기린은 남자들에게도 사과를 건넸다.

 

“저기, 죄소…암자가, 제삼자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해. 나는 올라가 볼게.”

 

휴, 자연스러웠어. 죄송해요, 라고 할뻔 했네. 기린은 자신을 쏘아보는 마고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근데 누구야?”

 

바로 따라 올라온 마고에게 물었다. 마고가 지난밤 칸자가 깨고 들어온 창을 가리켰다. 임시로 넓은 비닐로 막아 둔 상태였다.

 

“저거, 어제 박살난 창문 보수하려고 부른 사람들.”

 

거짓말이다. 창문 수리하는데 뭐하러 지하실에서 비밀스럽게 얘기를 나눈다는 말인가. 공사 견적이 어디로 새어나갈까 봐? 말도 안 되지. 탁자 위의 지도는 또 뭐고. 빨간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어 있던데, 유리창의 이동 경로라도 되나? 뭔가 마고의 약점이 될 만한 비밀 한 올의 끄트머리를 살짝 잡은 상태 같은데. 이거 제대로 잡아 당기면 만화에서 스웨터 풀리듯이 술술 벗겨질 텐데. 섣불리 당겼다가는 반동으로 쏙 들어가버릴 수도 있겠지.

 

“왜?”

 

의심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린의 눈동자를 본 마고가 내심 찔리는지 선수를 쳤다.

 

“아니, 창문 공사를 하려면 창문을 보면서 해야지 왜 지하에서 얘기를 하고 있나 해서. 나중에 사이즈 안 맞고 그러는 거 아냐?”

 

마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나랑 얼마나 함께 살려고 이러니? 바깥에 나가려면 아직 멀었다. 농사일이 적성에 맞아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마고가 바나나 송이에서 하나를 떼어 기린에게 던졌다. 진한 노란색에 검은 부분이 적당히 보이게 푹 익은 바나나의 중앙에는 ‘탐라’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국산인 모양이네. 대전을 한밭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니 제주도의 이름도 여기서는 탐라인가.

 

뭔가 티비에서 봤던 뉴욕의 코리아타운 느낌이다. 서울보다 더 화려한 도시의 한 켠에 자리 잡은 코리아타운은 동시대의 서울보다 묘하게 오래된 옛날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 한국은 많은 변화를 거쳤는데, 코리아타운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당시의 모습을 버리지 못해 구식의 촌스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여기선 혹시 서울도 한양이라고 부르는 걸까? 쳇, 저승 생활 이제 삼 일찬데 모르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내가 또 뭘 모르는데?”

 

“우리 사자들은 낮 시간에는 지하가 편한 것이 당연하다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그런 거였나? 기린은 박살난 유리창을 막아 둔 비닐을 통해 밖의 밝기를 확인했다. 시간상으로는 정오가 막 지났는데, 지구에서라면 잔뜩 먹구름이 껴서 비가 쏟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