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나는 팔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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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리창을 고치러 왔다고 둘러댔어.”

 

“팔왕의 얼굴을 봤는데 괜찮을까?”

 

마고의 말에 짧은 머리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팔왕은 상투머리에 한복을 입은 중년 남자의 이름이다. 이름은 모르는 사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반면 그의 얼굴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죽하면 수배 전단에도 사진이 아닌 몽타주 그림이 있을까. 아무래도 그림이다 보니 실제보다 특징이 다소 강조된 느낌이 있다. 대충 올려 묶은 상투는 봉두난발로 묘사되었고, 움푹 파인 볼과 왼쪽 관자놀이께에서 광대뼈까지 이어진 흉터 역시 직접 보는 것보다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수배전단의 성격에 맞게 정리 안 된 수염과 새까만 눈동자로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별 일 없을 거야. 비원에 온 지 얼마 안 된 애라서 아무 것도 몰라.”

 

“그래도 후환은 미리 방지하는 편이…”

 

“마고가 괜찮다잖아.”

 

팔왕이 짧은 머리 민석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작은 키와 왜소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굵고 걸걸한 음성이다. 민석은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팔왕의 큰 그림을 실제로 실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단호함 앞에 더 이상의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팔왕의 왼편에 앉은 덩치는 기범이다. 대화 보다는 싸우는 일에 능한 편이라,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비원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세력 서색연대(曙色聯隊)의 대장과 두 명의 부대장들이다.

 

“그만들 가 봐. 요즘에 호랭이 녀석도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어서 불안하니까.”

 

“호랭이는 여전히 우리를 기억 못 하나?”

 

“리셋되었으니까. 육십년 이전의 기억은 없어. 지금 너희를 보면 바로 신고하려 들걸.”

 

“그것 참 하드보일드스럽겠군.”

 

팔왕이 왼쪽 뺨의 흉터를 긁으며 낄낄 웃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갈게. 사아보호소는 우리가 계속 주시하도록 하지. 마고가 수상하다 느꼈다면 뭔가 분명히 있을 거야.”

 

팔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신호로 세 남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민석도 큰 편은 아니었는데 팔왕은 몸집이 워낙 작았고, 이 미터 가까운 거구인 기범의 옆에 있으니 더욱 작아 보였다. 그들이 일 층에 올라왔을 때 기린은 네 개째 바나나의 껍질을 벗기는 중이었다.

 

“가는 거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마고의 눈빛을 못 본 척 무시하며 기린이 현관쪽으로 다가섰다. 앞으로 나서려는 민석을 슬쩍 막으며 팔왕이 재밌다는 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볼 일을 마쳤으니 가야지.”

 

“마치다니 이제 시작 아니야?”

 

기린이 비닐창문을 향해 턱짓했다. 민석과 기범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봤지만, 팔왕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린채 기린에게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길지 않은 머리를 질끈 묶고 흙투성이의 작업복을 입은 채 바나나를 들고 있는 호랭이 또래의 여자애. 왠만한 사자들은 팔왕과 기범의 정체를 모르더라도 그 기세에 어느 정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기린은 팔왕과 마주친 시선을 유지한 채 실실 웃고 있었다.

 

“옷이 엉망이군.”

 

“오전 내내 수로 공사를 했거든. 혼, 자, 서.”

 

“저런. 날도 밝은데 힘들었겠군.”

 

“그렇지 뭐. 나도 지하실에서 가격 협상이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마고가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르니 옷도 못 갈아입고 이러고 있는 신세네.”

 

“복지가 엉망이군. 직장을 옮길 생각이 있다면 우리 회사에서 일해보겠어? 우리 일도 쉽지는 않지만 밝은 데서 일할 수 밖에 없는 농사일 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고민해볼게. 사실은 이미 스카웃 제의를 받은 곳도 있긴 해서. 거기는 산파 업무였는데, 유리 분야도 재미있겠네. 내가 또 스테인드 글라스 같은 거에 소질이 있거든.”

 

“오, 잘 됐네. 우리가 조금 밋밋한 편인데 다양한 색을 입힐 수 있는 인재가 들어오면 좋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기린은 비원의 인사법을 기억해냈다. 상대가 이름을 말하면 본인도 이름을 밝혀야 한다.

 

“인재라 생각해주니 고마워. 내 이름은 기린이야.”

 

마고가 눈을 흘겼지만 기린은 싱글벙글이다.

 

“나는 팔왕이야. 연이 닿으면 또 보자고.”

 

그의 인사말을 신호로 세 남자는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프가 마당을 떠나자 마고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비원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 왜 갑자기 수다쟁이가 됐어?”

 

기린은 말 없이 바나나씨를 골라내는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어?”

 

씨익 웃으며 씨를 뱉어냈다.

 

“수갑 차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구만.”

 

바나나를 다 먹은 기린이 검지를 흔들며 반론을 시작했다.

 

“대화 중에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수리공들을 저녁에 불렀으면 지하에서 흥정을 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야? 아까 그 한복남도 자기들은 농사일처럼 낮에 일해야 되는 직업이 아니라고 했잖아. 듣자하니 사자들은 대부분 저녁 이후에 활동을 하는 것 같은데, 일부러 다른 사자들의 눈을 피해 집을 방문한 것으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