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두 가지 이유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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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마고의 성화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층으로 내려갔다. 전날 온종일 처음 해 보는 농사일에 온 몸의 근육이 지쳤고, 저녁에는 칸자 소동으로 놀란데다가, 밤새 빨간 도깨비 헬멧을 쓴 망나니들에게 쫓기는 꿈을 꾼 탓에 눈을 못 뜰 정도로 피곤했다.

 

식탁에 갓 구운 고구마가 올라와 있었다. 아침을 차려 주다니, 마고가 이제 친하게 지내기로 마음을 먹은 건가?

 

“먹어 둬. 중간에 배고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오늘 수로 작업 하려면 힘 좀 써야 하니까.”

 

그럼 그렇지. 그냥 소 여물 주는 마음이었군.

 

“어젯밤에는 정말 너무 놀랐어.”

 

마고와 친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대화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한 기린은 고구마를 입에 물고 운을 뗐다. 마고는 흔들의자에 앉아 말 없이 티비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그 칸자라는 것들은 자주 나타나는 거야? 어제 보안관 말로는 요즘 많아졌다던데. 혼자 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야 해?”

 

“그 정도로 조심성이 없으면 그냥 물려야지.”

 

“물리면 칸자가 된다며?”

 

“글쎄, 세인이 물린 건 못 봤으니까 모를 일이지.”

 

거참, 말본새하고는. 기린이 음소거 상태로 입을 삐죽거리자 마고가 부연 설명을 했다.

 

“칸자들은 싸우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빠르지만 평소에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그 악취가 멀리에서도 코를 찌르기 때문에 조금만 조심하면 갑자기 기습을 당할 일은 없다는 말이야. 숨어서 기다리다가 상대를 덮칠 정도의 계획을 세울 머리도 없는 녀석들이니까.”

 

“어제 내가 뒤에서 걸어오는 걸 봤다고 얘기 안 했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갑자기 공격 받는 상황 아니었어? 우리 중 누군가 저 창문 옆에 있었더라면 손 쓸 틈이 없었을 것 같은데.”

 

마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뻥 뚫린 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린은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군고구마를 먹었다.

 

“사실 이해가 안 되긴 해.”

 

마고가 입을 뗐다.

 

“창문 너머에 우리 중 누가 보인 것도 아닌데, 칸자가 창을 깨고 안을 들여다 보는 건 놈들의 행동 패턴이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알아? 칸자들은 눈 앞의 먹잇감에게 달려들 뿐, 문 뒤에 뭐가 있나 보려고 닫힌 문을 연다거나 창문을 깨고 안을 들여다 보거나 하질 않는다고.”

 

“그 탁구공 눈깔로 앞을 볼 수는 있나 보네.”

 

“시력과 청력은 대체로 좋은 편이야. 신체적인 힘이나 속도 면에서도 꽤 강한 편이고.”

 

“그래 봐야 이 몸한테는 상대가 안 되지만. 후후후.”

 

기린이 마지막 고구마를 베어 물고 턱을 치켜 올렸다.

 

“그러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네.”

 

“굼벵이가 뭔지는 알고?”

 

“다 먹었으면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마고는 기린의 질문을 못들은 체 하며 티비를 끄고 밖으로 나섰다. 그래도 오늘은 작업복을 주네. 점프수트인 걸 보니 이것도 호랭이 옷이겠구만. 팔다리를 또 한참 접어 입어야겠네. 옷을 갈아입고 현관을 나서니 장화도 준비되어 있었다. 본격 일꾼 취급이구나.

 

마고는 손짓으로 기린을 부르더니 앞장서서 산 아래 개울로 향했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갈대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마고를 따라 걷던 기린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마고!”

 

“왜?”

 

“여기 어제 칸자가 왔던 방향인데?”

 

“괜찮아. 어젯밤에 망나니들이 다 수색했잖아. 찢어진 틈이 없는 거 다 확인했다고.”

 

“그래, 그 찢어진 틈이란 게 뭐야?”

 

“넌 참 궁금한 게 많구나. 오늘 할 일이 뭔지 궁금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칸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지구와 비원 사이에 끼인 존재들이라고 알려줬잖아.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다가 틈이 벌어진 곳이 있으면 거기로 기어 나오는 거야. 보통은 한번 틈이 생기면 여러 마리가 몰려 나오는데, 이 부근에는 그런 흔적도 없고, 어제 그놈은 멀리에서 혼자 낙오되어 여기까지 흘러온 게 맞을 거야.”

 

“그 틈이란 게 지구쪽에도 생길 수 있는 건가?”

 

“그쪽으로 나가면 좀비라는 이름이 붙는 거지.”

 

재미있네. 마고는 지구에서 죽은 지 이천년 이상이 되었다고 했는데, 좀비를 어떻게 아는 걸까. 생사초가 나오는 드라마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있고, 마고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을 텐데. 물어 봐야 어차피 대답은 안 하고 말을 돌리겠지. 그래도 오늘은 대답을 좀 잘해주는 편이네. 농사일에 대한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것 외엔 말이 별로 없더니만.

 

도착해서 보니 개울은 생각보다 넓었고 허리 정도 깊이는 되어 보였다. 비원에 와서 수돗물이 아닌, 흐르는 자연의 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은 수면의 굴곡과 거품이 아니었더라면 마른 개울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맑았다. 유속이 빠른 곳에는 수초들이 누워 있었고, 느린 곳에는 이끼 낀 돌들이 자리했다. 기린은 이렇게 맑게 흐르는 물을 실제로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한강을 비롯해 지구의 모든 하천은 일미터 깊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했고, 가까이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정화사업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기린은 개울가의 커다란 바위에 엎드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투명한 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간지럽혔다. 기린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번졌다. 물살을 가르며 송사리 떼가 헤엄치고, 돌 틈에 가재가 빼꼼히 내다 보고, 수면에 소금쟁이가 뛰어다니고 했더라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