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누군가 개울 근처에서 어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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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질 때까지 고구마를 캤다. 빛에 약한 사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낮에도 지구처럼 아주 환하게 밝아지진 않았다. 지구 기준으로는 해 뜨기 직전 수준이 최대로 밝은 시간대였고, 역으로 밤에도 칠흑같이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해도 달도 없는 세계에서 어떤 원리로 이렇게 밝기의 차이가 생기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린이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극지방의 백야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비원은 지구의 아래층이라니까 북향으로만 작은 창이 나 있는 반지하의 개념이려나.

 

“해가 뜨고 지고 하는 낮과 밤이 있는 게 농사에는 더 좋지 않나?”

 

오늘은 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마고를 따라 걸으며 괜히 아는 척을 했다. 본인이 농사의 신이라도 되는 양 과거 시절을 자랑스레 떠들어대던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농사일에 관심을 보이면 조금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린으로선 당면한 최고의 과제가 마고와 친해져서 모든, 뭐든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쌀쌀맞은 대답만 돌아왔다.

 

“여기도 낮과 밤은 있어.”

 

“네가 지구의 낮과 밤을 못 봐서 그래.”

 

“왜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래, 마고도 죽기 전에는 지구에 살았겠지. 수천년 전에. 조선? 아니, 고려시대 보다도 오래 되었을 것 같은데 삼국시대 쯤이려나? 아니면 고조선? 설마 저 뾰족한 성격으로 홍익인간 사상을 설파하지는 않았겠지.

 

“사자들은 죽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던데?”

 

“흥, 너야말로 기억이 생생한가 보네? 기억 상실증은 이제 다 나은 건가?”

 

기린은 못 들은 척 현관문으로 향했다.

 

“잠깐! 그 흙투성이 옷을 입고 집 안에 들어가려고?”

 

마고가 문 앞의 공기를 뭉쳐 기린을 가로막았다. 기린은 보이지 않는 풍선에 부딪힌 것처럼 퉁, 하고 뒤로 밀려났다. 기린의 옷에 붙어있던 흙먼지들이 농밀한 공기에 옮겨붙어 공중에 떠 있다가 마고가 공기를 원래대로 흐트러뜨리자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허공에 튕겨 두 걸음 물러선 기린의 눈앞에 마고가 솜사탕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늘 집 청소까지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라면 괜찮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더러운 옷은 벗고 들어가는 게 어때?”

 

워낙에 외딴집이라 지나다니는 사자가 없단 걸 알면서도 기린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정장 재킷을 벗어서 문 옆의 상자에 걸쳤다. 바지도 벗으려고 벨트를 풀려다가 마고가 아직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멈췄다. 마고는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이 흥, 하고 콧숨을 뱉어내더니 현관문을 열었다. 안쪽에 있던 실내화를 손짓으로 자기 앞에 가져오고는 흙 묻은 장화를 벗어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린은 멈췄던 손을 놀려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재킷 위에 던졌다. 바지 밑단은 물론이고 엉덩이 부분에도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허리를 비틀고 고개를 돌려 엉덩이를 살폈더니 속옷은 실수라도 한 것 마냥 엉망이었다. 흰색 셔츠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대충 가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너는 이층 욕실을 쓰도록 해.”

 

마고가 주방 반대쪽의 문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기가 욕실이었구나. 어젯밤에는 우당탕탕 소동극 후에 안내 받은 이층 침실에서 그대로 골아떨어져서 씻지도 못했기에 욕실이 어딘지도 몰랐다. 오늘도 물은 꽤 마셨는데 일 하느라 땀으로 다 배출된 탓인지 화장실에 갈 일도 없었다.

 

계단을 통해 이층에 올라가 왼쪽으로 보이는 문은 마고의 방이었다. 오른쪽 복도에 문이 세 개 있었다. 그 중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이 어제 기린이 잠들었던 손님용 침실이다. 그 맞은편으로 보이는 두 개의 문 중 하나, 일층에서 마고가 들어간 욕실의 바로 위에 위치한 곳에 수건과 갈아입을 옷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면 또 은근히 자상한 할머니인데 말이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은 차가웠다가 뜨거웠다가 마고의 눈빛만큼이나 변덕을 부렸고, 기린은 으악, 으악, 비명을 질러대며 요란스럽게 샤워를 마쳤다.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내는 동안에도 바디클렌저의 솔잎 향이 강하게 남아서 피부에서 솔잎이 돋아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욕실 내부의 타일은 청화백자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비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마감이 투박했다. 집 안팎에서 온갖 말썽을 일으키는 것밖에 못 하는 쌍둥이 오빠 정민이 유일하게 보유한 기술이 타일 미장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싸움박질만 하고 다니는데 그나마도 큰 세력에 소속되지도 못해서 매번 보도블록에 입을 맞추는 꼴을 본 아빠가 그렇게 보도블록을 사랑하면 타일 기술이라도 배워보라고 몰아붙여서 익히게 된 것이었다. 그 쓰레기도 여기 오면 먹고 살 수는 있겠네.

 

욕실에 거울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죽은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거나. 나중에 물어봐야지 생각하고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렸다. 조명이 어둑해서 잘 보이질 않아 유리창 가까이에 다가섰다. 머리 터는 모습을 굳이 자세히 볼 필요는 없는데도, 뭐가 됐든 시야가 흐리면 선명하게 보고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던가. 유리창에 먼지 얼룩이 있으면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 닦아 내게 되질 않나.

 

뽀드득. 창을 닦아 냈다. 창은 뒷뜰을 향해 있었는데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이 보였다. 연결된 몇 개의 구릉을 따르다 보면 사아보호소 건물이 있는 산이 나왔다. 어제 밴에 실려간 노인은 체계적인 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