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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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다진의 세계가 좁아지고 위아래가 뒤바뀌었다. 묵직한 물체가 쓰러지는 둔중한 소리가 들리고 충격이 전해졌다. 놀란 표정의 남자아이 네댓 명이 다진에게 달려왔다. 그 중에는 석태도 있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터질 것 같은 두통에 다진은 방향 키를 놓치고 말았다. 호스트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탑승자는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희미해지는 시계 속에 포개지는 여러 아이들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소란스러운 소리마저 점점 먹먹하게 멀어졌다.

 

다진의 눈을 감쌌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머리를 터뜨릴 것 같던 두통은 온데간데없었고 천둥소리는 고요 속에 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은 눈으로 덮인 것처럼 새하얬다. 다진 만이 하얀 공간에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다진은 무작정 걸었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모르지만 일단 걷고 또 걸었다. 이곳이 어디든 존재의 끝은 반드시 존재한다. 끝이 없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얀 공간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또 닿을 수 없었다.

 

다진은 이번에야말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TRAST 병동으로 옮겨졌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희미하지만 감각이 남아있었다. 이 박사와 주 간호사를 천사라고 오인할 정도의 감각. 몸이 떠오르는 감각. 하지만 지금은 착각할 수 있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걷고 있지만 땅을 딛고 있는 느낌이 없었다. 무중력 공간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다진은 걷기를 그만두고 그대로 앉았다. 위도, 아래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앉을 수 있었다.

 

과거를 바꾸고 달라진 미래를 직접 맞이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다진은 결과에 만족했다. 애초에 시도에 의의를 둔 도전이었다. 뜻밖에 얻은 성과도 있었다. 석태의 진심이다. 짧은 순간에 진심을 폭발할 정도라면 석태도 항상 답답했던 것이다. 진작 오해를 벗어버리고 석태와 마주했다면, 대화를 나누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방적인 오해로 점철되진 않았을 것이다. 다진도 석태가 발사한 총알을 견뎌야 할 업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석태의 행동에 대해 한 번이라도 의문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다진에게 미련이 남는 건 석태와 직접 대화하지 못한 것 하나였다. 그 길은 어린 다진이 대신 걸어줄 것이다. 소년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어떻습니까.”

 

사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마지막까지 저를 괴롭히는군요. T도 전다진 씨도.”

 

다진은 목소리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닥터, 오랜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지났죠?”

 

“얼마나 지난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하루? 이틀?”

 

정적.

 

“TRAST 연구소는 참 신기한 곳이에요.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쪽 사람들이 나타나요.”

 

다진은 위로 머리를 들고(아래인지도 모르겠다) 소리 높여 외쳤다.

 

“저는 죽은 건가요? 아니면….”

 

“그건 전다진 씨가 하기 나름입니다.”

 

사위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다진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공간에 파란 점이 생겼다. 파란 점은 세로로 점점 길어졌다. 다진은 일어나 점을 향해 나아갔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세로로 늘어진 점이 다가왔을 때만 크기가 커졌다.

 

“저를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진은 이제 궁금한 건 참지 않을 심산이었다. 두려워할 업보는 더 이상 없었다.

 

“제가 왜 T를 죽입니까?”

 

“타임머신으로 과거를 바꾸려고 했으니까요.”

 

닥터는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입을 크게 벌려 박장대소했다. 닥터가 인간처럼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뭐가 웃기죠? 사람이 죽었다고요!”

 

다진은 닥터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다진과 닥터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진은 멈추지 않았다.

 

“태구가 죽었을 때 당신이 보인 냉혈한 같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당신이라면 태구를 죽이지 않고도 방해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야. TRAST 연구소라면….”

 

“저희는 신이 아닙니다.”

 

닥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T가 사고를 당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고를 처리하는 일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아직도 사고라고 말할 거에요? 그건 사고가 아니야. 당신이 태구를 죽인 거라고!”

 

성난 목소리가 끝을 모르는 공간에 부딪쳐 두 사람의 고막을 두드렸다. 세로로 늘어진 점은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전다진 씨가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군요. T에게 발생한 사고는 제 능력을 한참 벗어났습니다.”

 

또다시 ‘사고’라고? 다진은 닥터의 주둥이를 막고 싶었다.

 

“그럼, 저도 사고로 처리하겠군요.”

 

“T는 사고를 당한 겁니다. 그리고 전다진 씨.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갈갈이 찢어 죽일 생각이겠지.”

 

닥터는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왜 ‘MIRROR-ONE’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는지 기억합니까?”

 

“시압(時壓)에 짓눌린다고 했었죠.”

 

“기억하고 있으면서 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합니까?”

 

“당연하죠. 태구는 당신이 보여준 사진과는 달랐어요. 사진은 찌그러진 콜라캔 같았지만 태구는… 위아래로 찢겨진 모습이었어요. 당신이 말한 것과 보여준 것과 달랐어요! 멤버들도 전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찡그린 닥터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제야 다진이 드러낸 적대심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아, 제가 오해하게 한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