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은 연재 소설이고 리뷰이다.
이번 작품은 총 23회차인 809매 분량, 결코 짧지 않음에도 선명한 줄거리가 한 편의 영화 같다.
특히 시작하는 프롤로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이어서,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을 알고 싶을 때,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추억으로 자랐으며 지금 뭘 먹고 싶은가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진심으로 맺고 싶은 관계의 서두에서 주고받고 싶은 것은 책의 첫 쪽을 읽을 때와 다르지 않다.
의외로 ‘로터리’란 제목의 상징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은 결말에 가까워져서이다.
일단 운을 떼고 난 후, 소설은 전다진이란 주인공 남자의 회사생활로 이어진다.
첫 직장, 사회생활의 분위기 속에서 ‘전다진’이란 이름처럼 화자는 상사의 갑질과 불합리한 요구를 거절하는 법 없이 다 해낸다. 모든 것을 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적응하는데 그 속에는 같은 직장의 다른 부서를 다니고 있는 동창 최석태와의 수평적이어야 할 관계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 흔히 호구라고 지칭될 법한 존재.
그러다 이야기의 전개가 새로운 세계로 도약한다. 그 이유는 소설을 통해 확인하시라는 뜻에서 엔터키를 누르겠다.
이제부터 소설은 SF장르로 진입한다. 다진은 일명 마루타 신세가 된다.
TRAST 의학연구소의 실험용 모르모트가 된 계기는 우정으로 찍은 서류의 사인이다. 다진의 주변 세상은 그를 이용하기만 하는 것 같고 그럴 때마다 다진을 다독이는, 또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주문이자 신념이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되어 보인다.
그것은 ‘카르마’로, ‘업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익숙한 개념이다. 자세한 인도철학은 알지 못하지만 인도의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가 정치적인 의미만 아니라 삶을 속박하는 완전한 제도로 자리잡은 데서 숙명론적 관념으로 발아해 지금까지도 불평등함을 감내하는 인도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전다진은 실제로 이 카르마라는 사상을 인생 신조로 삼음으로써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뿐 아니라 변화하기 위한 다른 시도를 품지도 않는 수동적인 태도를 아주 적극적으로 견지한다.
다진이 참가하는 이 의학 실험은 다양하지만 철저히 약자로서 사회 시스템에 의해 선택권을 박탈당한 다른 이들과 함께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연구를 주도하는 닥터는 이들과 대립하는 악인으로 등장하고 다진과 같은 배를 탄 피실험자들은 한 편이 되어 연대하며 갈등을 풀어나가는 주체가 된다.
다진이 참가한 실험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설계된 일종의 타임머신, 별칭 거울관을 통해 과거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는 여행인지, 아니면 사고를 감수하고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여행이 될 지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우연과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기희생으로 승화되는지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도 들어있다.
다진의 과거 역시 단순히 행복한 기억의 반추에서만 끝나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무심했던 인연이 어떤 응보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학교폭력이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작가의 넓은 시각이 섬세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것은 독자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복선을 발견하는 재미로 연결될 것이다.
주어진 일만 불평없이 모두 수용하던 다진도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각성하게 되고 목숨을 대가로 바치고 과거를 바꾸는 일에 동참한 다진과 T는 그들이 내린 선택에 의해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로 탈바꿈한다.
소설은 한 사람의 인생관이 바뀌면 다른 사람의 미래까지 바꿀 수 있다는 평범한 진실과 함께 ‘업보’를 강조했지만 실제론 ‘선택’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주어진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은 다른 것이며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의 길이 정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닥터와 실험의 목적에 관한 반전이 결말에 있으니 스포를 함부로 발설하는 재미없는 짓은 하지 않겠다.
내가 특히 재밌게 본 것은, 타임머신의 작동과 과거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정된 여러 장치가 세밀한 설명과 함께 제시되는 부분이었다. 문득 과거에 봤던 공포영화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이 부분이 소재적 설정에서 꽤 충격적으로 느껴졌는데 아마 그 리얼한 묘사가 상상으로 재현되었기 때문이지 싶다.
너무 자세한 줄거리 설명이 소설의 신선함을 떨어뜨리고 식상하게 만들까봐 되도록 언급하지 않기 위해 애쓴 리뷰였다. 리뷰를 읽는 독자들이 직접 소설을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제목의 의미도 직접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