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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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일기를 읽은 다진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뜬눈으로 천장을 보던 다진은 여덟 시가 되기 전에 실험실로 향했다.

 

정시에만 개방되는 실험실 문은 무슨 연유인지 열려 있었다. 실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암막 커튼으로 구분된 별실에는 연구원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피험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과 실험자들을 잇는 건 닥터 하나였다. 다진은 실험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습니까?”

 

별실에서 나온 닥터가 다진을 향해 걸어왔다.

 

“네, 괜찮아졌어요.”

 

다진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전다진 씨, 몸 관리는 철저하게 해주십시오. 건강도 당신의 의무입니다. 연구소에서 공짜로 숙식을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닥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단 결석한 건 다진 하나였지만 그를 간호하기 위해 진경도 빠졌으니 결과적으로 두 명 분의 실험 결과가 빠진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십시오.”

 

닥터는 매몰차게 등을 돌려 별실로 사라졌다.

 

아홉 시에 가까워지자 멤버들이 하나씩 실험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각자의 ‘MIRROR-ONE’ 앞에 섰다. 다진도 본인의 거울관 앞에 섰다. 닥터는 멤버가 전부 모이자 그들을 실험실 중앙으로 모았다.

 

“어제 전다진 씨가 몸살로 실험에서 빠졌었습니다.”

 

진경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일제히 다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멤버들은 어제 다진이 빠진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몸을 관리하는 것도 실험의 일환이고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하루에 필요한 실험 결과값이 쌓이지 않으면 연구 기간은 늘어납니다. 나 하나쯤은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곳에 있는 건 공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실험에 참여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놀고 먹으라고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어제 전다진 씨가 불참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최근 실험 데이터 질이 나빠졌습니다. 체력이 부족하면 호스트에 머무는 시간도 짧아집니다. 그러면 취할 수 있는 실험 결과의 양과 질 모두 나빠집니다. 여러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닥터가 뱉은 마지막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간다는 이야기는 한국이 월드컵 우승을 한다는 국가대표 감독의 포부처럼 허황되게 들렸다.

 

“그러면 오늘도 부탁합니다.”

 

닥터의 당부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MIRROR-ONE’ 앞에 섰다.

 

“다진 씨, 실험 끝나고 기다려요.”

 

진경은 다진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남겼다. 진경은 추가 설명을 바라는 다진을 두고 자신의 거울관으로 들어갔다.

 

다진의 몸 상태를 고려했는지 오늘 도착지는 다진이 선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감흥이 없었다. 현실 문제들이 전다진이라는 자루에 가득 차있어 과분한 사랑이 들어올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운 어머니의 살냄새를 맡아도 행복해지지도 차분해지지도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다진은 진경의 ‘MIRROR-ONE’을 보았다. 명멸하는 ‘MIRROR-ONE’을 보니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진은 실험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실험이 끝난 멤버들은 다진과 눈인사만 나누고 실험실을 나갔다. 태구의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무슨 일 있었냐고 걱정해주거나 식당에서 기다리겠다며 말을 걸었겠지만 지금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오래 기다렸죠?”

 

진경이 다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실험을 막 끝낸 참이었다.

 

“아니에요.”

 

“그럼 갈까요?”

 

다진은 앞장선 진경의 뒤를 쫓았다. 진경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그녀는 이제 실험을 막 끝냈고 어제 태구가 당한 사고에 대해 상당 부분을 알게 되었다. 태구의 부탁대로 다진이 끝까지 막아야 했던 진실이었다. 알게 되더라도 태구의 일기를 진경이 직접 읽는 방식은 아니다. 다진이 알려주는 방식이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다진은 어떻게 갈색 일기의 존재를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알 수 없었는지 불가사의했다.

 

진경을 따라 도착한 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다진 씨 방만큼 깨끗하지 않지만 들어와요.”

 

다진은 묘한 긴장감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진도 다른 사람의 공간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다진은 금세 익숙해졌다. 방 구조가 똑같았다.

 

“편하게 앉아요.”

 

진경은 거실에 자리 잡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따랐다.

 

“오렌지 주스는 어떻게 가져왔어요?”

 

“미리 신청하면 받을 수 있어요. 몰랐어요?”

 

다진은 오렌지 주스를 가득 담은 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럼 물만 마신 거에요?”

 

“마시고 싶으면 식당에 가서 마시고 왔어요. 컵에 따라서 방으로 가져오기도 했고요.”

 

진경은 파안했다.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다진은 입에 다시 컵을 가져갔다.

 

“안내서를 꼼꼼하게 읽지 않았군요?”

 

“네, 저는 뭐. 주어진 대로 살자는 주의라서요.”

 

다진은 이 말을 하면서 석연치 않은 찜찜함을 느꼈다. 이를 알리 없는 진경은 소리 내어 웃었다.

 

“주문서가 있어요. 현관문에 기다란 구멍 있잖아요. 신청하면 거기로 주문서를 넣어줘요. 그때 필요한 물건을 체크해서 식당에 있는 상자에 넣으면 되는데. 필요하면 자세하게 알려줄게요.”

 

“고마워요.”

 

짧은 대화를 끝으로 한동안 주스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만약 시선끼리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면 조금 더 시끄러웠을 것이다.

 

“먼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제가 부주의한 탓에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 계속 일어나네요.”

 

침묵을 깬 건 다진이었다.

 

“다진 씨가 사과할 일 아니에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어요. 저도 태구가 당한 사고에 의문이 항상 있었거든요. 아마 다른 멤버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무슨 일인지 확실하게 저만 알고 있었군요.”

 

다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절대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변명을 덧붙였다.

 

“저도 알아요. 제가 다진 씨였어도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을 거에요. 닥터 눈 밖에 나면 큰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어요.”

 

진경의 추측은 반만 맞았다. 다진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는 닥터에게 찍힐까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제일의 이유가 아니었다. 진실을 진경에게 알리는 건 다진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었다. 다진에게 주제넘은 행동은 업보를 쌓는 일이었다. 어리석게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태구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솔직히 실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잖아요. 나도, 다진 씨도, 다른 멤버들도. 기준도 올라가서 지금은 온 정신을 실험에 쏟아 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