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미처 수행하지 못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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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씨.”

 

닥터는 매끈한 거울관 앞에서 실험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진경을 불렀다.

 

“오늘은 다른 일을 부탁합니다.”

 

진경은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실험은 어쩌고요?

 

“실험은 괜찮습니다.”

 

닥터는 진경의 속질문에 대답했다. 진경은 불안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 진경에게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

 

“전다진 씨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진경은 고개를 돌려 멤버들 머릿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MIRROR-ONE’ 하나만 파트너 없이 홀로 있었다. 그제서야 진경은 다진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닥터는 가운 포켓에서 파란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 진경에게 건넸다.

 

“마스터 키입니다. 전다진 씨 방에 가서 무슨 일인지 보고 오십시오.”

 

닥터는 마스터 키를 진경에게 건네고 자리를 떴다. 진경은 마스터 키를 주머니에 넣고 실험실에서 나왔다.

 

진경이 다른 멤버의 방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개인의 공간에 찾아가지 않는 건 멤버들 간에 암묵적인 룰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멤버들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저런 걱정에 무작정 걷다보니 진경은 어느새 다진의 방 앞에 도착했다. 진경은 방주인의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는 게 중범죄처럼 느껴졌지만 태구에게 일어난 사고가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며 진경은 파란 플라스틱 카드를 문고리에 가져갔다. 삐빅, 하고 개폐 알림음이 울리며 매끈한 벽에 네모난 구멍이 생겼다.

 

“실례할게요. 다진 씨?”

 

방은 수천 년 동안 생명체가 깃들지 않은 동굴처럼 고요했다. 진경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경은 다진에게 아무 일도 없다면(그러길 강력히 바랬다) 갑자기 불을 켜서 그를 당황시키고 싶지 않았다.

 

진경은 몇 번이라도 다진의 방에 방문한 것처럼 익숙하게 어둠을 헤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진의 방이 진경의 방과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진경은 거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현관등을 켰다. 빛은 어둠을 날카롭게 밀어내며 영역을 넓혔다. 진경은 빛과 어둠의 경계선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방안에 놓인 물건은 아무리 조심스러운 침입자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이 없는 걸로 보아 불법 침입자는 진경을 제외하면 없어 보였다. 희미한 빛의 영역에 다진의 모습은 없었다. 탐색을 계속하려면 빛의 영역을 조금 더 넓혀야 했다. 진경은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머리를 벽으로 향하게 하고 전원을 눌러 다음 징검돌을 만들었다. 어둠에 섞인 물체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다진 씨?”

 

진경은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고 눈을 감고 있는 다진을 발견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다진을 보고 진경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면 오히려 불안했을 것이다. 다진은 악몽이라도 꾸는지 식은 땀으로 얼굴이 젖어 있었고 약한 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앓는 소리도 냈다. 진경은 다진의 상태만 보고 바로 돌아갈 참이었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진경은 고민 끝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죽을 끓일 수 있는 주방도 없었고 다진의 상태를 모르니 약을 처방받아 올 수도 없었다. 진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식은땀을 닦아주고 다진이 깰 때까지 곁을 지키는 일밖에 없었지만 진경은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진경은 땀을 닦을 수건을 가지러 현관문 옆에 빌트인 된 서랍으로 되돌아갔다. 방주인이 내용물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곳에 수건이 있을 것이다. 서랍에는 진경이 바란 물건이 있었다. 진경은 수건을 손에 쥐고 다진에게 돌아가려는데 서랍 위에서 수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갈색 가죽으로 하드커버를 만든 양장본이 삐뚤게 놓여있었다. 모든 물건이 반듯하게 놓여있는 다진의 방에서 질서를 어긴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경은 수건과 갈색 책을 들고 다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잔뜩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다진의 팔다리를 펴서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진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진경이 원하는 모양대로 순순히 자세를 바꿨다. 진경은 마른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주고 그의 상태를 언제라도 볼 수 있도록 침대와 마주 보는 곳에 의자를 두었다. 한숨을 돌린 진경은 책상에 놓은 갈색 책에 시선이 갔다.

 

진경은 갈색 책을 펼치기를 망설였다. 사적인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게 예의다. 반대로 진경이 같은 상황을 겪는다고 가정해보자.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불법 침입해서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다. 당연히 기분 나쁘다. 진경은 갈색 책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갈색 책은 명백하게 수상했다. 모든 물건을 반듯하게 정리 정돈하는 다진의 성격으로 보아 현관에 함부로 물건을 둘 리 없었다. 이것 때문에 다진이 쓰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정체를 밝혀야 한다. 진경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갈색 책의 커버를 열었다.

 

 

 

[누군가가 나중에 읽는다고 가정하고 글을 쓰는 게 쑥스럽지만 필요한 일이기에 참고 씁니다. 이것은 제가 겪은 사실이며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이 일기를 읽는다면 필시 저는 제가 계획한 일에 도전한 것이고 높은 확률로 실패했을 겁니다. 제 계획이 성공해서 아무도 이것을 읽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읽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뛰어든 거니까. 창피하지만 이 글은 제 고해성사이기도 합니다. 다짜고짜 고백이라 해서 놀랐겠지만 미리 말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고 결심을 굳히는데 도움이 되기에 그리 한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진경은 책을 계속 읽기를 망설였다. 남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사람이 비밀이라 정한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다음 문장을 읽고 있었다.

 

 

 

[고해성사부터 하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왜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진경의 숨을 삼켰다. 그녀가 한정 지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비밀이었다. 기껏해야 개인의 치부 정도가 적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살인 고백이라니. 분명 이 책의 주인은 TRAST 연구소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외부 사람이 TRAST 연구소에 침입해서 물건을 남긴다는 상상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TRAST 연구소에서 만난 사람 중에 살인자가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멤버 중에 사람을 죽일 인물은 절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절대라는 것은 없다. 진경의 불길한 상상력에 날개가 돋았다. 일기의 주인은 처음부터 천인공노할 나쁜 놈이었고 그 때문에 연구소에 들어온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 멤버들 사이에 유대감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진정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경도 마찬가지다. 멤버들에게 보인 건 여러 개의 자신의 얼굴들 중 하나일 뿐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가면이 벗겨질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완전히 벗겨진 적은 없었다. 벗겨질 뻔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진경도 멤버들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진경은 만약 티타임이 다시 시작된다면 멤버들에게 관심을 갖자고 다짐했다. 진경은 생각의 꼬리를 말고 다음 페이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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